이달의셀럽

캐리커처 작가 정은혜
세상에서 제일 예쁜 ‘니얼굴’
최근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등장한 발달장애인 작가 정은혜의 모습은 생경한 충격을 안겼다. 극 중 해녀 영옥(한지민)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채팅을 주고받던 상대가 장애인이라니. 우리 곁에 장애인이 있다고 기사를 쓰고, 말을 하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비장애인인 걸 당연하게 여긴 스스로에 대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꼭 만나보고 싶었다. 내 어쭙잖은 인식에 잔잔하지만 거대한 균열을 일으킨 이 사람을.
사진제공: 정은혜

시선으로부터

드라마에서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수많은 이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정은혜의 본업은 캐리커처 작가다. 경기 양평 문호리에서 매달 열리는 리버 마켓에서 부스를 차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2016년 시작한 작업의 결과물은 4,000점이 넘는다.
지난 6월에는 이런 은혜 씨의 모습을 찬찬히 따라간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개봉했다. 86분짜리 다큐멘터리는 그가 장애인으로서 겪는 불편함이나 사회적 차별을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개인으로서, 작가로서의 ‘정은혜’를 생동감 있게 들여다본다. 잠에서 막 깨 신경질이 난 모습부터 장애인 공공일자리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리버 마켓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을 그리며 웃는 모습까지 그의 다양한 일상이 풍부하게 담겼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섬세한 클로즈업 샷이다. 하루에 꼬박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리느라 부르트고 갈라진 손, 마켓 천막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에 찡그리는 얼굴, 스케치에만 집중하는 눈빛 등이 그렇다.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장애인의 고달픔’보다는 ‘작가의 장인 정신’에 집중하게 된다.
이 근원엔 독립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연출가이자 아버지인 서동일 감독이 있다. 정은혜 작가는 만화가인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와 둘이 살다가, 2008년 서 감독과 ‘가족식’을 올리며 한 가족이 됐다.
사랑으로 이뤄졌지만, 장애인과 그 가족으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운증후군의 특징적인 외모와 어색한 행동을 이상하게 봤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항상 수군거리거나 빤히 쳐다보는 눈들이 따라왔다. 은혜 씨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돌아오는 시선이 따가우니 날카로운 반응이 나왔다. 한때 대중 시선 강박증까지 있었고, 집에서 그냥 혼자 뜨개질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과 언어적 소통을 하기 어려워 서른 살 가까이 돼서도 제대로 된 일은 해보지 못했다. 한집에서 부대끼며 받는 스트레스는 오롯이 식구들의 몫이었다.

정은혜 작가의 작품 ⓒ정은혜

무지갯빛 은혜 씨

하지만 2013년 우연히 시작한 그림은 삶을 바꿨다.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갈 곳도, 할 것도 없는 은혜 씨를 데려다 “청소라도 시킬까?” 하다가 발견한 재능이었다. 청소는 안 하고 자리에 혼자 앉아 화장품 광고모델 사진을 보고 따라 그렸는데, 그걸 본 장차 작가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때부터 시작한 그림은 문호리 마켓의 부스로 이어졌다. 정은혜는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그걸 보고 그림을 그린다. 한 번도 미술을 배워본 적 없는 그의 손끝에서 독창적이고 색다른 얼굴이 재탄생한다. 사진을 뚫어져라 보면서 연필로 거침없이 선을 긋고, 다시 검은 펜으로 정돈하고, 그 위에 색칠로 마무리한다.
보통 그림을 그릴 때 종이에 어느 정도 비율로 어느 부분을 어떻게 그리겠다는 구상을 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다르다. 머릿속에서 춤을 추는 자신만의 특별한 세상이 흰 종이에 그대로 내려앉는다. 어떤 얼굴은 삐뚤빼뚤하고 또 어떤 얼굴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한장 한장 따스함이 느껴진다. 모두 저마다 예쁜 ‘니 얼굴’이다.
작가 정은혜는 사람을 보며 특정 색깔을 떠올린다. 입고 있는 옷과 사람의 느낌 전반을 색깔로 치환해 그 색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목도리 등을 뜬다. 그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함께 출연한 농인 배우 이소별을 보면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생각난다. 아주 많고 하얗게 빛나는 별.”이라며 웃었다. 사람에 대한 관심도 많고 정도 많기에 가능한 연상법이다. <니얼굴>의 감독 서동일은 “은혜 씨는 남들과 다른 소통의 채널이 있다. 그게 그림”이라며 “얼굴을 마주하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냥 그리는 게 좋았다”라고 한다. “원래 한 명 그릴 때 2시간 걸렸는데 이제는 20분 정도면 한다. 속도가 빨라졌을 때 ‘내가 많이 늘었구나’라고 생각한다.”라며 “사람들 얼굴과 생김새가 다 다르니까, 계속 그림을 그린다. 다 예쁘다.”라고 말했다.

사진제공: 정은혜
정은혜 작가의 작품 ⓒ정은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작은 그림에서 시작한 변화는 크다. <우리들의 블루스> 속 외로운 영희와 달리 현실의 은혜 씨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리버 마켓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단골 팬도 생겼다. 작품을 받은 뒤에 재주문하는 손님도 많다고 한다. 그림을 매개로 이전엔 불가능했던 관계가 만들어지고, 비로소 개인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로 거듭난 셈이다.
드라마 출연은 또 한 번 전환점이 됐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디어 마이 프렌즈> 등 세상의 따스한 이야기를 담아온 노희경 작가의 새 드라마 대본을 받았을 때 당연히 큰 기대는 없었다. 장애인을 출연시켜 준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했다. 드라마 전개상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잠깐 등장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펼쳐 본 대본에는 그의 존재감이 구석구석 돋보였다. 서 감독은 “장애인 당사자를 미디어에 등장시키기로 결심한 것도 대단한데, 대스타들이 총출동한 극의 중심에서 ‘대놓고’ 정은혜의 모습을 비춰준 제작진의 용기에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노희경 작가는 사전에 다운증후군 배우 소속사에도 연락해 연기 영상을 봤지만, 어딘가 어색한 연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가 정은혜에게 주문한 것도 자연스러움뿐이었다. 은혜 씨는 연기 수업도 따로 받지 않고 그저 대사를 외우기만 했다. 드라마에선 그의 자연스러운 말투, 좋아하는 것들, 작은 습관 같은 것이 모두 녹아들었다. 누군가를 연기하는 게 아닌 은혜 씨의 모습 자체가 내내 아름답게 빛난다.
촬영 현장에서 대기할 때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함께 촬영한 동료 배우들을 그리고, 스태프 50여 명의 얼굴을 그리고, 개와 고양이도 그렸다. 대사를 외우는 건 어려웠지만, 그래서 때론 버벅거렸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그도 다른 사람들도 바꿨다. 이젠 길거리에서 알아보고 사진을 찍자고 하는 팬도 있고, 방송국에선 출입증도 없이 안내받을 정도다.
정은혜는 “나를 보는 사람들도 달라지고, 내 마음도 달라졌다.”라며 즐거워했다. “나를 찾는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요. 제가 예쁘니까 그런가 봐요. 하하.”
이때까지 그린 얼굴 작품만 4,000여 점. 그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이랬다. “기억에 남는 특별한 한 사람은 없어요.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다 달라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는 게 좋아요. 그림의 주인공들이 저를 기억해요. 또 찾아와 주고요. 그림 그려달라고 와서 같이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그게 좋아요.”
1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끝에 나 역시 그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대왔다.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그는 장애인도 훌륭한 작가도 명품 배우도 어리광쟁이 딸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한 명의 사람일 따름이었다.

글. 김정화 『서울신문』 기자. 소년범 취재기를 담은 책 『우리가 만난 아이들』(공저)을 썼다. 사건과 사고의 홍수 속에서 비관하고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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