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고전여행

판소리 열두바탕을 찾아서
우리 시대의 강쇠와 옹녀에게
동리 신재효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에 이어 ‘변강쇠가’까지 포함해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변강쇠가’는 언젠가부터 창의 전승이 끊겨버렸고, 1971년 박동진 명창이 창을 복원하고 1979년 국립창극단의 창극으로 무대에 오른 후 오늘날에는 주로 창극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변강쇠가’ 또는 ‘변강쇠타령’은 우리 고전문학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옹녀와 강쇠는 춘향과 몽룡, 또는 심청 같은 전형적인 재자가인형(才子佳人型) 인물도 아니요, 또한 그들의 이야기는 노골적인 성행위나 질병과 죽음에 관한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흥보의 우애(友愛)나 별주부의 충(忠)과 같은 교훈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이 말초적이고 파격적인 서사는 ‘변강쇠’라는 이름을 고전적 섹슈얼리티의 대표처럼 여기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강쇠’의 유명세만큼, 지금 우리는 ‘변강쇠가’를 잘 알고 있을까?

결코 환대받지 못한 주변적 타자들

‘변강쇠가’의 주인공 옹녀와 강쇠는 떠돌이 유랑민이다. 그들은 공동체로부터 포용되지 못한 채 그 주변부를 떠돌아다닌다. 이들이 공동체로부터 ‘축출’되는 결정적 순간을 찬찬히 돌아보면 공동체의 주변부에서 차별받는 타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평안도에 사는 옹녀는 누구나 길 가다 뒤돌아볼 법한 눈부신 미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 사주에 남편을 잃는 청상살이 들어, 혼인하는 족족 남성들을 죽음에 빠뜨린다. 열다섯 살 첫날밤에 남편이 급사한 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해마다 그녀와 혼인한 남성들은 병을 얻거나 벼락을 맞고, 비상을 먹거나 포청에 잡혀 들어가는 등 갖은 이유로 죽는다. 심지어 마을 남자들은 그녀와 스치기만 해도 죽어나가, 30리 안팎에 열다섯 넘은 총각들이 없어져 여인들이 밭을 갈고 집을 짓는 광경이 벌어진다.
사실 이 남성들의 죽음이 온전히 옹녀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스스로 죄를 지어 청에 잡혀 들어가거나 우연히 벼락을 맞은 것이 어찌 아내 탓이란 말인가. 하지만 옹녀의 일은 평안도·황해도 양도에서 공론화되고, 결국 그녀는 마을 밖으로 축출된다. 옹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녀의 존재가 공동체의 기반을 흔드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불운이나 성적 방종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존립을 흔든다고 간주된 것이다.
그리하여 옹녀는 삼남으로 향하던 중 같은 유랑민 처지인 홀아비 강쇠를 만나 재가한다. 강쇠는 삼남에서 빌어먹던 이로, 평생 제대로 된 일을 해본 적 없는 나태한 인물이다. 옹녀와 결혼한 후에도 그는 아내가 번 돈을 노름과 싸움으로 탕진한다. 이런 그에게 옹녀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팔아보라 제안하는데, 강쇠는 그마저 귀찮아 마을 장승을 뽑아다 가져온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동티가 나서 죽게 된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장승을 뽑아서 훼손했다는 것은 강쇠의 태만이 개인뿐만이 아니라 공동체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로 해석되었음을 말해 준다. 원통한 장승 혼령은 통문을 돌려 조선팔도의 장승들을 불러 모았고, 병(病)을 강쇠의 온몸에 끼얹어 죽이기로 한다. 이 점에서 강쇠의 득병은 장승으로 은유되는 공동체적 권력에 의한 공적 징치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고전 서사 속에서 이렇게 공동체 차원의 ‘문제적 인물’로 간주된 이 중에서는 놀부나 옹고집 같은 인물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결코 나누려들지 않아, ‘함께 살아가는’ 풍습을 해친다. 그러나 놀부나 옹고집은 징치나 교화의 과정을 거쳐 다시 공동체의 테두리 안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이에 비해 옹녀나 강쇠에게 가해진 징치는 그들을 다시 교화시켜 경계 안으로 수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계 밖으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폭력에 가깝다. 사실 옹녀는 나름대로 도회지를 떠돌며 애를 써서 노동을 하고, 나무를 하러 갔던 강쇠도 어린아이들에게 잡목을 양보하고 좀 더 큰 나무를 찾아 산을 돌아다닌다. 그들 나름대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해왔지만, 이 두 사람은 결국 환대받지 못한 채 영원한 타자로 남게 된 것이다.

19세기 유행병을 반영한 강쇠의 득병

한편 팔도 장승들이 제각기 병을 하나씩 짊어지고 강쇠에게 달려들자 곧바로 다음 날부터 편두통·다래끼·이명·요통·임질·토사와 치질 등 만 가지 병의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부스럼이 낭자한 피부는 피고름이 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그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미음조차 삼키지 못한다.
강쇠가 당한 장승 동티는 19세기 당시 유행한 콜레라 증세와도 상당히 유사하다. 콜레라도 전염되자마자 곧바로 증상이 나타나는데, 구토와 설사로 체액이 빠져나가며 피부에도 주름이 지고 색도 거무튀튀하게 변한다. 1821년에 평양성에서 열흘 사이 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이후 바로 다음 날 황해도·서울·경기·충청·영남까지 각 도에서 보고가 동시적으로 올라온 기록이 있다
당시 콜레라는 외국과 교역이 활발한 관서지방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다. 평안도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조선팔도로 퍼지자, 많은 사람은 병을 피해, 또 파탄 난 생계를 어떻게든 이어나가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삶을 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 유랑하게 되면서 이들과 함께 병이 더 빨리 퍼져나가게 돼버렸다.
‘변강쇠가’에서는 강쇠의 죽음 이후 상을 치르기 위해 옹녀의 집에 방문한 자들도 줄줄이 병에 전염돼 죽어나간다. 특히 이 방문자들은 모두 하층민이며 유랑민이다. 떠돌이 중·초라니·풍각쟁이 패 다섯 명 모두 상장례를 도우러 집에 방문했다가 즉사하고 만다. 옹녀는 집 안에 쌓여만 가는 시체들을 처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데, 이렇게 전염병이 한창일 때에는 시체를 치우거나 제대로 묻는 일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역시도 공동체의 주변에서 떠돌아다니던 인간 군상의 열악한 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변강쇠가’의 현대적 변주

실창판소리 ‘변강쇠가’가 비록 예전의 온전한 형태 그대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지는 못하지만, ‘변강쇠’나 ‘옹녀’라는 인물은 오늘날에도 변주를 거듭하며 재해석되고 있다.
판소리 ‘변강쇠가’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는 1986년 작 엄종선 감독의 <변강쇠>를 꼽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변강쇠가’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청상살 때문에 마을에서 쫓겨나는 옹녀와 천하잡놈인 변강쇠가 만나 함께하는 시간을 그린 서사를 담는다. 다만 영화 <변강쇠>는 옹녀의 임신이라는 새로운 서사적 장치를 활용한다. 옹녀의 임신 이후 강쇠는 가정에 충실한 인물로 변모하기도 한다.
1980년대 고전적 에로물의 부흥과 함께 개봉한 이 영화 <변강쇠>로 인해, 판소리 ‘변강쇠가’는 ‘음란물’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얻게 되었고, 서사 속 섹슈얼리티만 부각되게 되었다. 그러다 2014년 국립창극단에 의해 초연된 이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변강쇠가 아닌 옹녀를 주인공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존의 인식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온 작품으로 꼽힌다. 여기서 옹녀는 죽은 변강쇠를 되찾기 위해 장승과 전쟁을 치르며, 그동안 음탕한 여인으로만 여겨졌던 옹녀를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인으로 변모시킨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수많은 기준을 앞세워 사람들을 ‘나’와 구분된 ‘타자’로 간주하고 배척하곤 한다. 특히 코로나19 유행 이후 공동체의 주변부에서 떠돌아다니다 사라지는 존재는 없는지, 이들을 포용하고 새롭게 체계 안으로 들여올 방법이 없는지에 대한 고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타자’가 사전적으로 자기가 아닌 사람을 뜻한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군가에게 타자다. 수많은 ‘강쇠’와 ‘옹녀’을 품지 못하면 결국 나 자신 역시 환대받지 못한다.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그림. 윤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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