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하나

NTOK Live+ <헨리 5세> <타르튀프> <입센의 집>
미장센의 미장센
무대의 요소를 시각적으로 배열하고 조직하는 연출로서의 미장센(mise-en-scene)을 화면에 담기는 모든 조형적 요소를 직조하는 영상의 미장센으로 만들어낸다. 배우들의 들숨과 날숨, 그리고 그사이의 쉼표까지 오롯이 담았으니, 9월엔 유럽 여행을 하는 마음으로 전편을 감상하길 권한다.

현장성과 일회성은 공연예술의 최대 장점이지만 동시에 한계다. 그래서 많은 공연예술인은 휘발되는 공연을 발달된 영상 매체로 기록하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영상은 종종 극의 정서와 상관없이 멋대로 클로즈업과 풀 샷을 반복하면서 무대 위 세트와 조명,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미장센을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 들어 공연예술의 호흡과 정서를 완벽하게 이해한 영상의 전문기술이 발달하고 그 기록이 확장되면서 이 넓은 세상, 미처 일일이 찾아가서 보지 못하는 많은 공연을 생생하게 볼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국립극장은 2014년 3월 <워 호스>를 시작으로 국내 최초로 NT Live를 극장에서 상영했고, 공연장에서 영상을 본다는 초반의 이물감을 걷어내고 지금은 국립극장의 대표 프로그램이 됐다. 지난 시즌부터 엔톡 라이브 플러스(NTOK Live+)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영국 국립극장의 NT Live에 역사적인 프랑스의 코메디 프랑세즈의 작품을 상영하는 Pathe Live,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의 ITA Live까지 확장해 유럽의 화제작을 국내 관객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영국을 상징하는 셰익스피어의 고전부터 몰리에르 400주년 기념공연, 그리고 입센의 희곡을 비틀어 현대화한 작품까지, 2022년 9월에 상영되는 NTOK Live+는 현재 동시대 유럽 연극의 흐름을 국내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한다. 연극 본연의 결을 다치지 않게 노력하면서도 영상이 가진 장점을 솜씨 좋게 조율한 작품이다.

NT Live <헨리 5세> ⓒHelen Murray

우리 시대 진짜 리더란? NT Live <헨리 5세>

헨리 5세는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3세가 이루지 못한 프랑스 정복의 꿈을 이뤄낸 왕이다. 흔히 이런 사람을 전쟁 영웅이라고 호칭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그려내는 헨리 5세는 전형적 영웅의 모습이 아니다. 탁월한 전쟁 능력을 가졌지만, 반드시 긍정적인 리더라고 볼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바탕으로 연출자 맥스 웹스터는 나약해서 거칠고, 약해서 악해질 수밖에 없는 헨리 5세를 현재화한다. 원작의 텍스트는 그대로 살리면서 현대적으로 재연하는 공연이기 때문에, 모던하면서도 고전적 이미지를 함께 가진 배우가 필요해 보인다. <왕좌의 게임>의 키트 해링턴이 가진 고전적 이미지는 무대에서도 빛을 발한다. 해링턴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인물의 광기를 보여준다.
<헨리 5세>의 경우에는 극이 격앙되는 순간에 합창이 등장하는데, 고전에서 돋보이던 기능을 현대화된 무대에서도 무리 없이 조화롭게 연출하였다. 특히 전쟁 장면에서 앙상블의 몸짓은 세련된 안무처럼 잘 직조돼 있어서 고급스러우면서도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늘 앙상블이 중요한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비교해 보면 이번 작품은 헨리 5세라는 인물에만 너무 중심을 두다 보니 다른 인물들의 캐릭터와 그 이야기가 조화롭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순하고 여백이 많은 세트 덕분에 시간과 장소를 손쉽게 옮길 수 있고, 그렇게 빈 무대는 배우들의 동선을 열어주면서 관객에게 상상의 크기를 넓힌다.
작품 속 헨리 5세는 빼어난 전쟁 기술을 지닌 왕이지만 통치하는 대신 독재하는 사람이다. 맥스 웹스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담긴 민족주의와 전쟁의 잔인함, 그리고 권력의 집착과 몰락에 대한 심리 묘사를 내밀하게 연출한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헨리 5세는 영국을 프랑스와 유혈 전쟁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아주 어린 통치자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더 잔인해졌던 것일까? 그런 왕으로서의 심리적 갈등상태를 무대에 새겨놓으면서 이 시대의 진짜 리더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마침 극의 내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유사한 면이 있어서 이야기가 사회적 맥락을 담은 의미로 확장된다.

Pathe Live <타르튀프> ⓒJan Versweyveld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 복원판 Pathe Live <타르튀프>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타르튀프』는 운문으로 된 5막의 희극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몰리에르에게 이 작품은 아픈 손가락이다. 희곡이 완성된 1664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초연되었으나, 바로 루이 14세의 검열로 공연이 금지되었다. 검열을 피해 개작된 이후 1667년에 재상연했으나 다시 공개가 금지되고, 1669년에 현재의 5막 버전으로 재수정해 공개한 후 큰 인기를 끌었다. 현재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타르튀프>는 결말이 수정된 버전이다. 프랑스에서 <타프뤼프>는 위선자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이번에 공연된 작품은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 기념으로 역사상 딱 한 번 공연됐던 베르사유 궁전의 초연 작품을 복원한 3막 버전이다. 실제로 한결 부드러워지고 사설이 많은 5막 버전에 비해 원작은 거칠고 그 끝이 명확하게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질문이 많아지는 작품이다.
최근 유럽 연극 신에서 가장 각광받는 컨템퍼러리 연출가인 이보 반 호프가 연출을 맡았다. 그의 오랜 파트너인 얀 버즈위벨트(Jan Versweyveld)가 무대와 조명을, 안 후이스(An D’Huys)가 의상을 맡았다. 그리고 반가운 이름은 세계적인 영화음악 작곡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Alexandre Desplat)이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폭력적이고 차가운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무대와 어우러져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을 더한다. 계단을 제외하면 특별한 장치가 없는 무대를 장면에 따라 직사각형의 더 작은 무대로 좁히면서 무대의 동선을 제한하는 방식은 타르튀프의 억압된 심리와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이 가지는 원작의 힘과 역사적 의미가 무척 무거운 작품이지만 무게에 눌리지 않고 최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뭔지 모를 이물감이 있다. 잘 알려진 <타르튀프>와 다른 결말에 대한 이견 때문이다. 뭔지 제대로 끝이 나지 않은 것 같은 미지근한 느낌이 초연작 대본의 특성 때문인지, 연출이 뭔가 한 가닥 매듭을 짓지 못하고 끈을 놓친 것인지 5막 버전과 비교해 보는 기회를 기대하고 있다.

ITA Live <입센의 집> ⓒJan Versweyveld

비극의 역사 ITA Live <입센의 집>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헨리크 입센은 사실주의 희곡을 창시한 현대극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연극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한때 『인형의 집』의 노라가 끝내 집을 떠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사이먼 스톤 역시도 그런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입센의 여러 작품을 활용해 사이먼 스톤은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하면서 집을 떠나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들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가족의 대서사를 만들어낸다. 지긋지긋하지만 결국 떠나지 못하는 구성원이 집을 떠도는 이야기는 유령의 이야기 같다. 입센의 전통을 이어받아 의상과 소품 하나하나 실제로 집에서 가져온 것처럼 배치한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살려낸 무대는 너무 현실적이라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배우들은 무대에 어울리는 생활인으로 연기하면서 사람들의 삶은 무대 위 인물의 삶처럼 평범하면서도 우리 삶처럼 복잡하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사이먼 스톤은 입센의 희곡에는 각기 다른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입센의 작품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처음 보는 이 작품의 캐릭터들이 낯설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입센의 집>이 만들어내는 비극에서 가장 주요한 요소가 집이기 때문에 집이라는 공간에 무척 공을 들였다. 유명 건축가 세스 커르크만(Cees Kerkman)이 설계한 집은 1964년부터 2016년까지 시대를 가로지르며 집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연대기를 담으면서 입센 작품의 고유한 특징인 억압과 비밀, 거짓말로 둘러싸인 가족의 트라우마를 읽는다. 회전하는 집은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순식간에 이루게 하면서 동시에 가족 비극이라는 연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무대장치다. <입센의 집>은 실수를 통해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하고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내는 비극을 보여준다. 인터미션을 포함해 200분이라는 시간이 지루할 틈 없게 만드는 배우들의 앙상블, 무대미술의 촘촘함이 순간순간 회화 같은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순간은 무척 아름답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