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사라지는 예술의 파편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오마주
연극에서 ‘페이드아웃(Fade-out)’은 조명을 서서히 줄여가는 기법을 뜻한다. 주로 무대를 어둡게 한 상태에서 장치나 장면을 바꾸는 순간에 활용된다. 즉, 사라짐을 위한 일종의 예고인 셈이다. 예술계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수많은 것이 ‘페이드아웃’ 됐다. 다행인 것은 사라지고 잊히는 모든 것이 언제나 안타까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간·무대·역할 등 사라진 것들이 남긴 의미를 톺아봤다.
행화탕 ⓒ김지윤

어느 목욕탕에서 치러진 장례식

쟁반을 대신하는 세숫대야. 그 속에 담긴 냉·온탕의 음료들.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 위치한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과거 시제로 기술하는 까닭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행화탕은 1958년 지어진 대중목욕탕이었다. 2000년 중반 아현동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원주민이 떠나고 인근 사우나와 찜질방 등의 신식 시설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며 이곳은 2008년 폐업을 맞이했다.
방치되던 행화탕을 탈바꿈한 이들은 문화예술콘텐츠랩 ‘축제행성’의 기획자 서상혁 감독과 주왕택 감독이다. 두 사람은 ‘예술로 목욕하는 공간’을 모토로 이곳을 재탄생시켰다. 굴뚝, 보일러실 등 목욕탕의 원형도 최대한 유지했다.
행화탕은 평소에는 카페이지만 때에 따라선 전시와 공연으로 대중을 만나는 공간이 됐다. 여전히 재개발 예정 구역인 만큼 시한부의 공간이었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하루하루 축제를 즐기는 마음으로 머물렀다.
5년간 ‘재미나게’ 운영되던 행화탕은 이별의 순간조차 흥이 넘쳤다. 2016년 5월 역사 속으로 사라짐을 기념한 장례식에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공동상주’로 나섰고, 조문객 1천여 명이 행화탕을 찾았다. 다양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이들은 시그너처 메뉴들을 즐기고 방명록에 저마다의 기록을 남겼다.
서 대표는 장례식 후 한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과거의 사실을 각색해 오늘의 행위를 더 가치 있게 만든 곳”이라고 말했다. 공간은 사라졌지만, 공간을 채운 사람들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또 다른 시작점이 됐다. 행화탕이 남긴 역사이자 유품이다.

사라진 무대, 다가온 무대

지난 2019년 5월, 한국 연극 문화의 산실이자 대학로의 터줏대감이던 극장 ‘정미소’가 17년 만에 폐관했다. 건물주가 건물 매각을 결정하며 자리를 비워달라 통보했기 때문이다.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자”며 세워진 정미소에는 <신의 아그네스> <꽃밭에서> <19 그리고 80> 등 숱한 작품이 거쳐 갔다. 상업화로 변해 가는 대학로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실험적 연극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한 곳으로 평가돼 왔지만, 경영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듬해 찾아온 팬데믹은 ‘연극의 메카’ 대학로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연극의 해’가 무색하게 대학로는 썰렁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수용 가능한 인원이 줄어들고, 관객마저 밀폐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연극 관람을 꺼리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매년 흥행 불패를 기록한 연극들도 조기 폐막 또는 잠정 중단을 공지했고, 대학로 역사의 산증인이던 극단들과 주요 소극장 역시 1~2년 새 줄줄이 폐업했다.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위기를 마주했다. 발 빠른 이들은 저항보다는 순항을 택했다. 무대를 옮긴 것이다. 국립극단은 창단 이래 최초로 신작 <불꽃놀이>를 유튜브에서 개막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 중인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도 유튜브 채널에 공연 관련 영상을 업로드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만났다. 뮤지컬 <모차르트!> 유료 온라인 공연은 약 1만 5천 명의 관객을 모았다.
무대뿐이 아니다. 오프라인 전시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작가들 역시 온라인 전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술계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연출을 고민하게 됐고, 나아가 메타버스 시대의 예술로 사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대면’의 감흥과 ‘비대면’의 무한 가능성, 두 단어의 간극은 풀어야 할 과제가 됐다.
일상으로의 복귀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며 예술계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양새다. 우려와 걱정 속에서 치러진 ‘신고식’을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부침의 시간 동안 사라진 무대들이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연극 <소프루(Sopro)> ⓒFilipe Ferreira
연극 <소프루(Sopro)> ⓒChristophe Raynaud de Lage

보이지 않는 것들의 부재

사라져 가는 것들, 그 자취에 좀 더 적극적으로 숨결을 불어넣는 작품도 있다. 오는 6월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소프루(Sopro)>다. 포르투갈 도나 마리아 2세 국립극장이 제작하고 티아구 호드리게스(Tiago Rodrigues)가 연출한 이 작품은 2017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됐다. 이후 파리 가을 축제·더블린 축제·빈 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공연예술 축제와 유수의 극장에서 공연됐다.
<소프루>는 무대 뒤편에 존재하는, 그래서 관객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삶’을 그린다. 이 삶들은 프롬프터(prompter)의 시선을 따라 배치되고 전개된다. 프롬프터란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배우에게 대사나 동작 따위를 일러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화면에 텍스트를 띄우는 장치가 개발됨에 따라 기계가 대체하고 있는 역할이다. 극은 실제 40년 넘게 프롬프터로 살아온 크리스티나 비달(Cristina Vidal)이 등장하며 시작된다. 폐허가 된 극장,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개인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몰리에르(Moliere), 장 라신(Jean Racine),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등이 탄생시킨 유럽 고전 희곡의 서사를 촘촘하게 엮어 허구와 실재, 연극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연출가 티아구 호드리게스는 크리스티나 비달을 향한 헌정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사라져 가는 모든 프롬프터에 대한 그의 경외심은 사라져 가는 문화유산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삶과 예술에 대한 예찬이자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무대를 만드는 이들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동시에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노동이 채워가는 무대, 즉 잊고 있던 당연한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소프루’는 포르투갈어로 숨, 호흡을 뜻한다. 배우들의 목소리와 음악이 아닌, 극장이라는 공간에 깃든 숨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미다. 호흡처럼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들을 돌이켜 보게 한다.
‘페이드아웃’의 다음은 ‘페이드인(Fade-in)’이다. 그사이 공백은 사라진 것들을 곱씹는 시간으로 할애해도 나쁘지 않겠다. 때때로 사라짐은 왜곡되거나 분절된 기억 사이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가치 있는 것으로 재탄생하니 말이다. 마치 크리스티나 비달처럼.

글. 김지윤 『경향신문』 편집국 토요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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