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아구 호드리게스에게 연극이란 20년 전 배우로 데뷔한 이래 줄곧 사람들 간의 모임이었으며 극장은 생각을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카페와 같은 장소이다. 1997년 연극 공동체 ‘tg STAN’과의 만남은 당시 스무 살 학생이던 그가 위계 없이 나란한 예술가와 뜻을 모은 결정적 계기였는데, 이후 이 벨기에 공동체와 협업하며 느낀 자유로움은 호드리게스의 작품 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03년 티아구 호드리게스는 마그다 비자루(Magda Bizarro)와 극단 ‘문두 페르파이투(Mundo Perfeito)’를 설립했다. 이 극단은 파리 가을 축제(Festival d’Automne a Paris), 독일 테아터포름(Theaterformen), 벨기에 쿤스텐페스티벌(kunstenfestivalsdesarts) 등에 초대되며 이름을 알렸고, 그사이 공연예술계의 샛별로 떠오른 그에게 전 세계 다양한 예술가와 함께할 기회의 장이 열렸다.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을 이어온 그는 안무가 안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Anne Teresa De Keersmaeker)가 이끄는 벨기에의 현대무용학교 ‘P.A.R.T.S.’, 연극과 무용 중심의 스위스 공연예술학교 매뉴팩처(Manufacture) 등에 초대되며 여러 기관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 및 TV 프로그램을 위한 각본 작업을 비롯해 신문에 글을 싣고, 시와 수필을 쓰기도 한다.
2015년부터 최근까지 포르투갈의 도나 마리아 2세 국립극장(National Theatre D. Maria II)의 최연소 예술감독을 지낸 그는 연극의 옹호자로서, 연극을 통해 도시와 국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도 해왔다. 그 결과 2018년 제15회 유럽 연극상(Europe Theatre Prize) ‘새로운 극적 현실(New Theatrical Realities)’ 부문1)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프랑스 문예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이자 세계 최대 규모의 연극 축제로 꼽히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차기 예술감독으로 선정되며 동시대 공연예술계의 최전선에 서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그의 예술감독 임기는 2022년 9월에 시작된다.
이처럼 배우로 시작해 작가·연출가 등 다각도로 예술을 사유하는 그에게 어떤 시선으로 연극을 바라보는지 물었다. “저는 배우의 관점에서 연극을 바라봅니다. 배우의 입장에서 대본을 쓰고, 공연을 연출하며, 연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배우입니다. 제 공연은 과정에서 비롯한 결과물에 가까운데, 이때 과정이란 최초에 설정한 비전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연극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연습이 켜켜이 쌓여 무언가를 만들어낸다고 믿는 편이죠. 인생의 마지막 날, 체크인을 한 호텔에서 누군가 직업을 묻는다면 아마도 ‘배우’라는 단어를 적어 낼 거예요.”
포르투갈 연극계에서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작품 세계는 1990년대 후반 포르투갈 연극이 보여온 행보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로, 예술적 자유와 협력적 과정에 중점을 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폭력적으로 변해 가는 세상에 맞서 ‘사라져 가는 언어’의 문제를 다룬 <창문이 열리려면(Se uma Janela se abrisse)>(2010), 살라자르 파시즘 정권의 검열에 관한 패러디극인 <무릎 아래 세 손가락(Tres dedos abaixo do Joelho)>(2012), 동명의 셰익스피어 비극을 재창조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io e Cleopatra)>(2014) 등에서 사회적·정치적 담론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호드리게스 작품의 예술적 특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실화와 허구를 뒤섞거나 고전을 재해석하고 소설을 각색하는 등 배우를 위한, 배우와 함께하는 글쓰기라는 개념과 동시에 연극을 통한 현실의 시적 변환을 추구한다. 이러한 관점은 2016년 예술가 및 관객 약 100명과 바스티유 극장(Theatre de la Bastille)을 예술적 방식으로 점령한 <바스티유 점령(Occupation Bastille)>과 같은 프로젝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소설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1857) 발표 후 받게 된 재판을 재현하며, 예술·사랑·정의를 논하는 <보바리(Bovary)>(2016),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Anna Karenina)』가 독자인 연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해 고전을 재해석한 <그녀가 죽는 방식(Como Ela Morre)>(2017) 등 유럽의 문학적 전통을 환기하는 작품에서 이러한 관심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그중 <기억하여(Apprendre Par Coeur)>(2013)는 10명의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중 하나를 ‘기억하여’ 습득하도록 돕는 1인극이다. 그는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로 잘 알려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를 비롯한 러시아·독일·미국의 소설가와 비평가의 글을 뒤섞는 여정을 통해 시와 기억, 자유에 끝없는 찬가를 보낸다.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완전히 기억해 내면에 저장해 버리는 순간, 그 어떤 강력한 권위나 외부의 조치도 우리가 기억에 담아놓은 문화와 인간성의 조각들을 앗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2017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한 <소프루>는 그 연장선에서, 연극과 연극을 창조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장대한 헌사이다. 작품은 40년 넘게 현역 프롬프터로 살아온 크리스티나 비달(Cristina Vidal)을 폐허가 된 극장의 무대 위로 불러낸다. 크리스티나 비달의 실제 삶에 바탕을 둔 여러 가지 사건이 몰리에르(Moliere)·장 라신(Jean Racine)·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안토니오 파트리치오(Antonio Patricio)의 희곡 플롯이나 포르투갈 연극사와 뒤섞이는 가운데 허구와 실재, 연극과 현실은 경계를 허물고 서로 스며든다. 그리하여 작품은 그녀가 연극에 직접 출연하도록 설득되는 장면, 다섯 살 무렵 고모의 손에 이끌려 처음 공연을 본 순간부터 지금껏 일해 온 극장에서의 기억, 오랜 시간 함께 일했던 감독과 얽힌 사건까지,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를 통해, 극장의 그림자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더 나아가, 일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요. 지금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작품은 유럽의 오랜 문화유산에 대한 향수와 헌사인 동시에 예술과 기억을 통해 유럽의 문화적 쇠퇴에 저항하는 정치적 행동이기도 하다. 삶과 예술에 대한 예찬이자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무대를 만들어가는 이들을 위한 오마주다. 크리스티나 비달의 초상을 통해 연극과 예술의 필요성과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포스트 브렉시트라는 새로운 지형 속 과거의 유럽은 허물어지고 무관용·인종차별주의·파시즘 등 여러 구시대적 유령들이 되돌아오고 있는 듯한 오늘날, 위대한 작가들과 그들의 생명력을 다시금 소환해 기리고자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수적이고도 긴급한 행위일지 모른다.
아직 이들의 말이, 연극이라는 예술이 필요한 우리 곁에,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연극이 찾아온다.
“유럽의 고전과 연극적 유산이 녹아 있는 작품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프루>의 핵심은 기억이라는 행위가 곧 저항과 삶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여러 장벽을 넘어, 한국의 관객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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