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하나

국립무용단 <더블빌>
지금의 한국무용
새로운 소재, 색다른 연출, 이전에 없던 움직임으로 한국 창작춤의 가능성을 보여준 두 작품이 막을 내렸다. 각기 다른 의미와 감각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작품들 뒤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또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두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자.
<신선>(위), <몽유도원무>(아래)

국립무용단이 두 편의 신작 <신선>과 <몽유도원무>를 동시에 공연하는 <더블빌>을 4월 21~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선보였다. 두 작품 모두 현대무용가의 안무로, 세계시장 겨냥을 핵심으로 기획됐다. 국립무용단은 윤성주 예술감독 재임 기간(2012.06.~2015.06.)부터 국내외 현대무용 안무가의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으며, 연출가·음악가·디자이너 등 제작진 또한 한국무용에 국한하지 않고 폭넓게 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열린 시각의 기획들은 한국무용의 고유성에 대한 우려를 낳기도 하지만, 동시대적 한국춤 창작에서 경계를 넓힌다는 점이 긍정적이며 관객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핀란드 안무가 테로 사리넨의 <회오리>, 디자이너 정구호가 연출한 <향연> 등은 국립무용단의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이번에 공연된 두 작품도 높은 완성도로 레퍼토리화에 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신선>

1부에 공연된 <신선>은 현세의 걱정을 잊고 춤에 심취한 여덟 신선의 놀음을 춤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안무를 맡은 고블린파티는 <혼구녕> <아이고> <옛날 옛적에> <은장도>에 이어 최근작 <초상달>까지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어왔으며 이 중 몇몇 작품은 해외 시장에서 호평받으며 공연되고 있다. 고블린파티의 한국적 작업은 전통을 바라보는 낯선 시각이 독창적이며, 위트와 풍자, 소품 활용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신선> 역시 ‘술’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우며, 국립무용단원이 이전에 하지 않았던 노래와 대사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세 안무가 지경민·임진호·이경구는 공동 창작이라는 고블린파티의 안무 방식을 고수해 왔으며 춤 외에 직접 음악을 만들고 대본을 쓰는 자급자족 시스템이 안정적인 무용가들이다. 큰 주제보다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해석의 층을 쌓으며 큰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신선> 역시 소품실의 호리병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술과 풍류로 발전시키고, 8명의 무용수를 신선으로 표현하며 유희를 넘어 삶의 위로에 다다르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신선>

<신선>은 객석의 불이 켜진 채 무용수들이 하나둘 등장하며 시작된다. 세 개의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무용수들은 “이것은 맺고 어르고 푸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평소 신선 같은 모습으로 세상의 근심을 덜어내려 애씁니다. 오로지 춤에 몰두하는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 술을 한잔합니다. 우리는 취해 갑니다.”라며 작품의 의도를 전한다. 종종 이경구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고블린파티의 작품 스타일이기는 한데, 춤에 앞서 말로 작품을 설명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는 관객의 견해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이내 술에 취해 가며 춤추고 노는 신선들의 모습이 이어지는데, 현대무용 동작이 어색한 순간도 있지만 취한 몸은 긴장을 벗어나 한국무용의 어르고 푸는 움직임과 맞닿는다. 이들은 권주가를 부르는가 하면 힙합 비트 속에 무리 지어 달리며 빠른 구도 변화를 보여주고, 술잔과 원형 소반(술상)을 이용해 춤을 추거나 북처럼 두드리기도 한다. 이요음 국립무용단원의 짧은 독무가 매력적으로 흘러가면 초록색 조명 아래 흥건히 취해 가는 신선들 사이로 짙은 안개가 채워지고, 다시 권주가가 들리는가 싶더니 술잔을 든 두 남성의 춤이 이어진다. 이때 술잔을 무대 밖으로 던지며 그리는 포물선이 인상적이다. 소반을 징검다리 삼아 위태롭지만 즐거운 중심 잡기를 보여주던 신선들은 이내 고요 속으로 내려앉는다. 이때 장윤나 국립무용단원의 기이한 유연성은 술에 취해 세상을 보는 요지경이다. 막이 내리고 혼자 남겨진 그녀의 유머러스한 엔딩이 고블린파티의 낙관처럼 찍힌다. <신선>은 흥미로운 설정과 춤의 밀도로 변주/발전의 여지를 가진 작품이다. 젊은 디자이너 한현민의 의상도 흑백의 세련된 의상 안에 한국적 신선(새로운 선)을 담아내며 좋은 해석을 보여주었다.
명나라 홍자성(洪自誠)이 지은 어록집 『채근담(菜根譚)』을 보면 “화간반개(花看半開) 주음미취(酒飮微醉) 차중대유가취(此中大有佳趣)”라는 글이 나온다.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고, 술은 약간 취할 만큼 마시면 이 가운데 아름다운 멋이 있다.’라는 뜻이다. 작품 <신선>이 남긴 미완의 인상을 반쯤 핀 꽃으로 본다면(이미 아름다우나) 재공연을 통해 만개할 완성도도 기대해 볼 수 있겠다.

<몽유도원무>

<몽유도원무>는 조선 시대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모티프로, 현실 세계의 험난한 여정을 거쳐 이상 세계인 도원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안무가 차진엽은 그림 속 두 세계의 공존에서 영감을 받았고, 특히 ‘굽이굽이’ 펼쳐진 한국의 산세를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 산세는 아름다운 형상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굴곡진, 고된 삶의 여정이다. <몽유도원무>는 자연을 동경하고 더불어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풍류적 시선을 한국무용수들의 몸에 체득된 자연적 흐름과 현대 기술인 미디어아트를 연결해 풀어냈다. 그림 ‘몽유도원도’ 자체를 재현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서사에 따라 왼쪽에는 현실 세계가, 중간은 무릉도원으로 가는 험난한 길이, 오른쪽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 펼쳐져 있는 그림의 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수묵 위주이되 무릉도원 부분은 색색의 설채(設彩: 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함)로 장식된 점도 <무릉도원무>의 색감 대비로 사용됐다. 1장은 흑백의 수묵화 이미지 속에 일률적으로 움직이는 여행자들의 모습과 무릉도원으로 건너가는 여정, 2장은 선홍·연두·노랑 등의 채색화 안에 서로 다른 존재들의 조화를 그려냈다.

<몽유도원무>

첫 장면은 기술의 침투가 오히려 고전적 아름다움으로 드러났는데, 가로로 낮게 설치된 스크린이 족자가 되어 몸의 그림자로 산수화를 그렸으며, 호리촌트에 비치는 미디어아트(모션 센서로 움직이는 수묵화)도 ‘몽유도원도’의 잔상을 만들었다. 살아 움직이는 회화로 2장의 구체적 형상을 보여준 영상보다 작가적 해석을 보여준 장면이다. 여러 개의 봇짐을 멘 조용진의 모습은 조형적 신체 응용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풀어낸 봇짐을 나눠 메고 떠나는 나그네들의 춤은 차진엽의 세련된 구성과 연출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홀로 무대를 채운 최호종의 독무는 그가 국립무용단의 역대 무용수들에게서 볼 수 없던 개성과 스펙트럼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재목임을 각인시켰다. 큰 원을 그리며 춘 이 장면은 무릉도원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을 상징했다. 2장은 몽유도원의 정경으로 복숭앗빛 의상의 여인들과 연두·노란 의상의 남성 무용수들, 부풀린 스커트를 입은 김미애가 꽃과 새, 나비가 되어 초록 숲을 노닌다. 세로로 드리운 족자에 ‘화조도(花鳥圖)’ 이미지의 영상이 비치고 나면, 무대는 백드롭의 짙은 분홍과 동시에 무용수들을 녹색으로 비추는 조명 연출로 도원의 절정을 그려낸다. 거문고 연주와 함께 꿈속 도원은 긴 잔상을 남기며 끝이 난다. <몽유도원무>는 <원형하는 몸> 등 최근 작업에서 보여준 미디어아트 활용의 능숙함과 깊어진 몸의 사유, 세련된 미장센 등 한층 성숙해진 차진엽의 작가성을 드러냈으며, 초연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투어를 시작해도 좋을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세계시장을 겨냥한 기획 <더블빌>은 ‘지금’ ’한국’ ‘무용’을 키워드로 제작됐다. 붙여 읽으면 ‘지금의 한국무용’이 된다. 여기서 ‘지금’과 ‘무용’에 대한 개념은 많은 작업에서 정리됐으므로 국립무용단과 한국 무용계, 나아가 한국의 무용 관객이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은 ‘한국’일 것이다. 너무나 분명하지만, 너무나 광범위한 해석으로 열려 있는 ‘한국성’은 한국 창작춤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과거의 고답적인 전통에 대한 해석이나 단골 소재를 벗어나 확장된 의식으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더블빌>의 두 작품도 자유로운 관점에서 ‘한국’을 해석했고, 기대 이상의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시도는 국립무용단의 제작 시스템과 우수한 단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더블빌>의 두 작품 <신선>과 <몽유도원무>의 성공적 세계 진출을 기대해 본다.

글. 김예림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동했으며 평론가 등단 후 여러 매체에 춤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현장성 있는 평론가를 지향하며 오늘도 극장으로 향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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