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하나

국립발레단 <고집쟁이 딸>
평범한 이들을 위한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
가장 오래된 전막 발레의 현재를 만날 기회가 눈앞에 다가왔다.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누구나 필요로 하는 ‘사랑 이야기’다. 누군가에겐 뻔해 보일지 모르는 이 주제가 이토록 긴 시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어느 날 안무가 장 도베르발(Jean Dauberval)은 길을 가다가 유리 가게 창문 너머 그림 한 점을 보았다. 시골 헛간에서 엄마에게 혼나는 딸 뒤로 연인이 도망가는 장면. 피에르 앙투안 보두앵(Pierre-Antoine Baudouin)의 <훈계(La reprimande)>(1789)였다. 지푸라기가 가득한 헛간에서 훌쩍이는 소녀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도베르발은 그해 7월 <지푸라기 발레(Le Ballet de la Paille)>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발레 중 가장 오래된 <고집쟁이 딸(La Fille Mal Gardee)>이다.
<고집쟁이 딸>은 유쾌한 코믹 발레이다. 홀어머니 시몬이 딸 리즈를 부잣집의 얼빠진 아들 알랭과 결혼시키려는 와중에 리즈와 그 연인 콜라스가 어떻게든 만나려고 애쓰는 좌충우돌 행보가 매끄럽게 펼쳐진다. 여기에 농민들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들판에서 밀을 추수하고, 일하다가 도시락을 먹고, 뇌우로 추수가 중단되며, 결혼하려면 공증해야 한다. 리즈 역시 주인공이라 해서 닭 모이를 주고, 버터를 만들고, 실을 잣는 일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꽉 막힌 시몬 부인은 일은 하지 않고 비밀 연애나 하는 딸을 혼내고 가두지만 결국 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두 연인의 사랑을 인정한다. 리즈와 알랭의 결혼서약서를 마련해 온 공증인은 “선과 악은 종이 한 장 차이(Il n’est qu’un pas du mal au bien)”라 선언하며 그 자리에서 서약서를 찢어버리고 리즈와 콜라스의 서약서를 새로 작성한다. 바로 원제 <지푸라기 발레>의 부제이다. 진실한 사랑이 돈을 이기고 모두가 즐거워하며 마무리된다.
18세기의 수많은 발레가 사라진 와중에 <고집쟁이 딸>이 살아남은 비결은 무엇일까. 현실적이고도 유쾌한 이야기가 지닌 힘 때문이리라. 회화나 오페라가 그랬던 것처럼 발레 역시 오랫동안 신화 속의 인물과 사건을 다루어왔다. 그런데 <고집쟁이 딸>은 평범한 이를, 그것도 유쾌하게 그려낸다. 발레리나들은 하나같이 고상하고 순수한 처녀들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반항적이고 솔직하고 웃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고집쟁이 딸>에 대한 평가는 양가적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초기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영웅의 이야기에서 평민의 이야기로 초점을 옮긴 것은 분명 의미 있는 변화이지만 세상이 변하는데 목가적인 사랑 타령이나 하냐는 시선도 있다. <고집쟁이 딸>은 철없는 작품에 불과할까.
혁명은 길고 엄혹했다. 혁명기에 춤은 민중을 단결시킨 주요 활동이었으며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혁명 정신을 강조하는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모든 춤이 혁명적일 필요는 없다. 극장은 거리 위의 공포와 현실의 굶주림으로부터 잠시나마 한숨 돌릴 위안이 됐기 때문이다. 훗날 소비에트 사회에서 <백조의 호수>가 사랑받은 것처럼 말이다.
<고집쟁이 딸>은 이야기의 힘을 믿은 이들이 만들었다. 안무가 도베르발은 연기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드미-카락테르(demi-caractere: 귀족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유쾌한 춤과 연기를 맡는 등급)로 수석무용수에 오른 인물이다. 특히 노래나 대사 없이 춤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한다고 믿었던 발레 이론가 장-조르주 노베르(Jean Georges Noverre)의 이론에 감명받은 그는 권위적인 파리 오페라계를 떠나 보르도에 정착했다. <고집쟁이 딸>은 속박에서 벗어난 그가 솔직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마음껏 실험한 결과였다.
한편 대본을 쓴 극작가 부부 샤를 파바르와 마리 파바르는 대중성 있는 소재, 대중음악에 바탕을 둔 귀에 꽂히는 멜로디, 해피엔딩을 활용해 작품에 희극성과 통속성을 더했다. 특히 오페라 가수였던 마리 파바르는 코믹 오페라에서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대신 나막신과 리넨 드레스에 팔을 걷어붙인 의상으로 농민을 표현하며 무대의상을 개혁했다. 그녀의 현실적이고 파격적인 의상은 <고집쟁이 딸>에서도 흔적을 볼 수 있다.
도베르발과 파바르 부부는 평범한 관객을 위해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만들었다. 이들이 그려낸 평민들은 혁명의 진짜 주인공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삶이 고달파도 굽히지 않고 하루하루 나아가는 이들은 진실하고 강건하다. 평민의 시선에서 말하며 주인공들이 결국 사랑을 찾고 모두가 즐거워지는 이야기엔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자 했던 프랑스혁명의 염원이 담겨 있다. 그러니 사랑 이야기가 마냥 철없고 헛되다고는 할 수 없다.

1789년 초연된 <지푸라기 발레>는 1791년 런던 공연 때 <고집쟁이 딸>이라는 제목이 붙었고, 러시아에선 <헛된 경고>라는 제목으로 인기를 끌었다. 살바토레 비가노(Salvatore Vigano), 샤를 디드로(Charles-Louis Didelot), 마리우스 프티파(Victor Marius Alphonse Petipa)/레프 이바노프(Lev Ivanov), 레오니드 라브롭스키(Leonid Lavrovsky),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Bronislava Nijinska) 등 유명 안무가들이 대본을 바탕으로 재안무했다. 초연 땐 프랑스의 대중가요 50여 곡을 섞어 사용했으며, 1828년 장-피에르 오메르(Jean-Pierre Aumer)의 파리 공연을 위해 루이 페르디낭 에롤(Louis Joseph Ferdinand Herold)이 작곡하고, 1864년 폴 탈리오니(Paul Taglioni)의 베를린 공연을 위해 페터 루트비히 헤르텔(Peter Ludwig Hertel)이 작곡했다. 이후의 안무가들은 두 사람의 음악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2003년 10월 10일 국립발레단이 초연했다. 서정자 중앙대학교 교수가 국내 최초로 <고집쟁이 딸>을 소개했고, 그때 콜라스 역할을 맡았던 김긍수 단장은 ‘발레가 이렇게 재미날 수 있구나’ 생각하며 발레단 단장 취임 후 ‘쿠바 버전’을 소개한 것이다. 이는 쿠바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인 알리샤 알론소(Alicia Alonso)와 남편 페르난도 알론소(Fernando Alonso)가 개정한 것을 재안무한 버전이었다. 슬랩스틱 코미디라 할 정도로 리즈와 시몬의 티격태격하는 대목이 일품이다.
이번에 국립발레단이 공연할 <고집쟁이 딸>은 1960년 영국 로열발레단의 안무가 프레더릭 애슈턴(Frederick Ashton)이 만든 것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버전이다. 애슈턴은 이전 버전들을 꼼꼼히 연구하고 종합해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어냈다. 그는 작곡가 존 랜치버리(John Lanchbery)와 긴밀히 작업해 그때까지 주로 사용되던 헤르텔 음악 대신 에롤 음악을 대거 발굴, 편곡해 사용했다. 도베르발의 원작에는 남녀의 파드되가 없었지만, 애슈턴은 음악학자 이보르 게스트(Ivor Guest)의 도움으로 1837년에 파니 엘슬러(Fanny Elssler)가 사용했으나 파리 오페라극장의 구석에 처박혀 있던 악보를 찾아내 남녀 주인공의 그랑파드되를 안무했다. (오늘날엔 ‘파니 엘슬러 파드되’라 한다.) 또한 러시아 공연 책자 속에서 닭장, 오월제 리본 기둥, 탬버린을 치다가 잠든 엄마의 열쇠를 훔치는 리즈를 묘사한 삽화를 보고 안무에 활용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애슈턴 버전에선 섬세하고 정교한 춤과 생생하게 펼쳐지는 연기가 밀착된다.
애슈턴 버전에서 가장 사랑받는 춤은 시몬의 나막신 춤이다. 시몬은 주로 남자 무용수가 연기하며 희극성을 강조하는 캐릭터다. (초연에선 ‘라고트(Ragotte)’라는 이름이었는데 땅딸막한 망아지를 의미했다.) 리즈와 콜라스를 발견한 시몬이 두 연인을 갈라놓으며 씩씩대지만 리즈가 나막신을 내밀자 망설이다가 신고는 신나게 춤춘다. 이 장면을 위해 애슈턴은 헤르텔 음악 속 프랑스 대중가요의 라이트모티프를 활용해 작곡하고 영국의 민속 나막신 춤 공연을 참관하며 안무했다. 이처럼 애슈턴은 프랑스 이야기에 지극히 영국적인 풍광과 유머를 버무리며 ‘가난한 사람들의 <전원 교향곡>’을 만들었다.
사랑의 징표인 리본에 주목하면 <고집쟁이 딸>을 더욱 재미나게 즐길 수 있다. 리본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엮는 도구이자 섬세한 조형미와 기하학적 대형을 확장하는 재료다. 리즈와 콜라스가 처음 만나 추는 리본춤(pas de ruban)에선 긴 리본으로 정교하게 서로를 엮고 감고 묶고 실뜨기를 하고 마부와 말이 되며 두근두근하고 변화무쌍한 감정을 표현한다. 수확 축제에서 마을 사람들이 리본 기둥을 엮고 푸는 장면, 그리고 리즈와 콜라스의 파드되에서 여덟 무용수가 리본을 들고 함께 춤추는 장면은 두 사람의 사랑을 온 마을이 인정한다는 노골적인 표지가 된다. 이러니 시몬인들 고집쟁이 딸을 말릴 수 있겠는가.

글. 정옥희 무용연구가이자 비평가로서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이 춤의 운명은』과 『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가 있다.
사진. 영국로열발레단 <고집쟁이 딸> ⓒROH. Tristram Kenton, db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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