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셀럽

주목할 만한 크리에이터
이야기로 세상의 균열과
갈등을 봉합하는 이민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 든 글쓰기.
국가와 세대의 갈등을 어루만진 『파친코』로 이야기의 힘을 증명한 이민진 소설가다.
이민진 소설가 ⓒ연합뉴스

캐릭터와 사랑에 빠진 소설가

1968년생, 한국 나이로 올해 55세. 자신을 ‘아줌마’라 부르길 즐기는 이민진 소설가가 매 순간 진심으로 점철된 삶을 살게 된 데에는 선천적인 간 질환이 미친 영향이 크다. 일찍이 간암 발병 가능성을 경고받은 이민진 소설가는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의 한 로펌에서 2년 차 기업변호사로 활약하던 어느 날, 이대로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직장을 잃는 두려움을 앞서자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대학교 작문 수업에서 픽션과 논픽션 분야의 상을 휩쓴 그에게 글쓰기는 여생을 바쳐도 좋은 유일한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퇴사 후 각종 글쓰기 세미나와 작가 수업을 드나들며 이민진은 『행복의 축(Axis of Happiness)』과 『파친코』의 모티프가 된 『조국(Motherland)』 등의 단편소설을 써냈다. 그리고 2007년, 자전적 색채가 짙은 자신의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을 출간(국내 2008년 출간)한다. 뉴욕 퀸스에 정착한 한인 가족을 중심으로 세대와 계급, 문화 간 분열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며 ‘미국 독립서적협회 우수서적’으로 채택된 이 작품으로 이민진 소설가는 미국 문단과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쉬운 문체와 탁월한 묘사력, 이외에도 훗날 두드러지게 되는 이민진 소설가만의 스타일이 이미 이때부터 명징하게 포착되는 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치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에 대한 고집이다. 백화점 모자 가게에서 일하며 비즈니스 스쿨을 다니는 주인공 케이시 한을 탄생시키기 위해 그가 실제로 하버드 MBA 수업을 청강했고, 뉴욕의 유명 디자인 스쿨에서 모자 만드는 강좌를 수강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탄탄한 고증으로 현실 감각을 일깨우는 작가가 있고, 탁월한 상상력으로 현실로부터 유리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작가가 있다면 이민진 소설가는 명백히 전자다.
평범한 인물에 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할애하는 그의 박애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민진 소설가가 창조해 낸 인물들의 사연 앞에서는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모든 판단이 흐려지기 일쑤다. 이러한 방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짓는 특성 때문에 이민진 소설가는 ‘대하소설(Saga) 작가’로 인식되기도 한다.

드라마 <파친코> 스틸컷 ⓒApple TV+

뜨거운 통찰력을 담은 세계관

이민진의 위대한 역작 『파친코』가 탄생한 것은 데뷔작을 발표한 후로부터 10년이 지난 2017년(국내 2018년 출간)년이다. 두 권을 합쳐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는 초고를 통째로 뒤엎은 사건을 제하고도 꼬박 10년이 걸린 지난한 과정 끝에 탄생했다. 금융계 종사자인 남편의 도쿄 발령으로 2008년부터 일본에 머물며, 대학교 때 알게 된 ‘자이니치(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폄하하는 말)’의 존재에 골몰했다. 그는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일본인 동급생의 멸시와 따돌림 속에 고통을 받다가 끝내 자살을 택한 재일교포 소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깊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1910년부터 1989년까지, 4대에 걸친 재일교포 가족사를 조명한 방대한 대서사시가 한 명의 개인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관심과 사랑에서 탄생했다는 얘기다. 그렇게 완성된 『파친코』는 지극히 한국적 소재를 앞세웠음에도 보편성을 인정받으며 전 세계 27개 국어로 번역됐고,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미국 대통령의 2019년 추천 도서,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와 <BBC>가 선정한 ‘올해의 책’으로 꼽히며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소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존재하지만 이민진 소설가의 말에 따르면 『파친코』는 고통보다 강인함에 초점을 둔다. ‘파친코’라는 제목 역시 일본에서 도박이라 천대받던 파친코 사업을 점령하며 기어이 일본에 뿌리내린 재일 한국인의 끈기와 생명력을 상징한다. 한국어를 거의 못 하고, 싱클레어 루이스(Sinclair Lewis)와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톨스토이(Leo Tolstoy)의 긴 소설을 즐겨 읽으며 미국 문화 속에 깊게 잠겨 성장했지만, 누군가에겐 ‘전형적인 한국인’으로 치부되는 그 꾸준한 불협화음 속에서 분투해 온 이민진 소설가는 전작을 지배한 시니컬한 뉘앙스를 버리고, 열정적인 영혼이 되어 등장했다. 한과 흥, 상반되는 정서를 모두 긍정하며 살아가는 『파친코』 속 인물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와중에도 웃고, 또다시 사랑하며 우직하게 대를 이어간 것처럼 말이다. 작년, 이민진 소설가가 자신의 트위터에 “어깨만 으쓱하는 일, 냉소적 태도, 두려움에 굴복해 침묵을 택하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하며 어느 순간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대해 날 선 비판 의식을 견지하게 된 데에는 『파친코』를 집필하며 얻은 깨달음이 미친 영향이 절대 적지 않으리라 본다.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가치관도 이민진 소설가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기독교를 모태신앙으로 가졌으며 매일 아침, 성경 읽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민진 소설가는 2019년 하버드대학교 강연에서 “더 많은 일본인이 『파친코』를 읽었으면 좋겠네요.”라는 어느 학생의 말에 선을 그었다. “『파친코』를 통해 일본인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없습니다. 역사에 대해 정직하기만 하다면 우린 누구와도 기꺼이 화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요.”

드라마 <파친코> 스틸컷 ⓒApple TV+

『파친코』 이후의 <파친코>

탄탄한 원작에 힘입어 손쉽게 작품성을 인정받은 드라마 <파친코>는 시리즈 종영 후에도 여전히 애플TV플러스 인기 차트에 올라 있다. 2018년, 소설의 드라마화가 확정된 후 책임 프로듀서 역할을 맡게 된 이민진 소설가는 드라마의 독자성을 인정하며 이후 제작 과정에서 손을 뗐다. 스토리텔링에 강한 두 아시아계 감독 코고나다(Kogonada)와 저스틴 전(Justin Chon), 각본가이자 총괄 제작자인 수 휴(Soo Hugh)를 필두로 한 드라마 제작진은 원작을 중심으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면밀히 연구하고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원작자의 의도를 왜곡 없이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철저히 서사적으로 전개되는 소설과 달리 과거의 선자(김민하/전유나)와 현대를 살아가는 그의 손자 솔로몬(진하)의 삶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연출 방식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다. 드라마는 시작부터 1915년 부산 영도와 1989년 뉴욕을 번갈아 비추며 세대 간의 연결을 강조한다. “꼭 살아가 대를 잇고 손을 이을 기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탄생하는 선자와 성공한 은행가가 되어 ‘빅 딜’을 성사시키기 위해 오사카로 귀환한 솔로몬. 이후 선자가 결혼하고, 남편 백이삭(노상환)과 함께 오사카에 정착하며 두 세대의 시간적 간극은 점점 줄어든다. 이러한 연출은 윗세대 없이는 아랫세대가 존재할 수 없고, 윗세대의 판단과 경험은 아랫세대의 나이테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법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세대뿐 아니라 국가도 연결된다. 일본인이지만 누구 못지않은 역경을 견디며 살아온 에츠코와 이를 보듬어준 모자수, 사랑하는 하나의 마지막을 지킨 솔로몬 등 해방 이전의 윗세대와 달리 일본인과도 진실한 감정을 나누며 교류하게 된 재일교포 2세대와 3세대의 모습을 보며 우리 역시 일본에 대한 본능적 반감이 사그라드는 것을 경험한다. 결국 소설과 마찬가지로 드라마도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란 역사를 개인이 살면서 겪게 될 위기와 고통으로 감히 치환해 본다면 우리는 아무리 힘든 고통 속에서도 결국 타인과 끈끈하게 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삶의 풍파를 견디게 하는 것은 갈등과 맹목적인 혐오가 아닌, 사랑과 용서라고 말이다.
뻔쩍뻔쩍한 파친코 오락실에서 출연진이 신명 나게 막춤을 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바로 미국 록밴드 그래스 루츠(The Grass Roots)의 ‘Let’s live for today’다. 아픈 몸을 이끌며 현재를 더욱더 강하게 붙들게 된 이민진 소설가의 소명 의식과 이제는 작품만큼 유명해진 소설의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가 이렇게 영상으로 완벽하게 구현된다.
실제 재일교포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가슴을 뜨뜻하게 데우며 끝난 마지막 에피소드가 공개되자마자 애플TV플러스는 <파친코> 시즌2 제작 확정 소식을 공표했다. 시즌2에서는 자신의 정체성 문제에 천착하는 선자의 첫째 아들 노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가운데 배역의 캐스팅을 놓고도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드라마 <파친코> 스틸컷 ⓒApple TV+

드라마의 성공과 관계없이 이민진 소설가는 현재 한국인의 교육열을 다룬 차기작 『아메리칸 학원(American Hakwon)』 집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뉴요커(The New Yorker)』와 진행한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오가며 수많은 한국계 학생과 학부모를 인터뷰한 끝에 현재 초고의 절반 이상을 완성한 상태라고 한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과 『파친코』에 이어 이민진 소설가의 ‘한국 3부작(Korean Trilogy)’을 완결 짓게 될 새 소설은 지식과 학위, 그것의 기대수익인 사회적 지위와 성공을 위해 맹목적인 삶을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 세대의 숨겨진 욕망을 들출 예정이다. 드라마의 재미와는 별개로 이민진 소설가의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는 즐거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번에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그릇된 방향으로 속도를 내기 일쑤인 우리들의 삶에 또 한 번 고마운 제동을 걸어줄 그녀의 차기작을 빨리 만나고 싶다.

글. 류가영 『엘르』 코리아 피처 에디터. 문학과 미디어, 사회에 대한 글을 즐겨 쓰고 화보와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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