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일곱

<완창판소리>
재밌는 ‘수궁가’, 더 재밌게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더하고 거기다 진정 소리를 즐기는 마음까지 있는 무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어느덧 40년 소리 인생으로 완숙함을 갖춘 왕기석의 ‘수궁가’는 얼마나 놀라운 재미를 전해 줄까.

운명을 바꾼 국립창극단의 방문

왕기석 명창은 1963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6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 14세에 상경하고부터 인쇄공이며 채소 장사, 풀빵 장사 등 온갖 일을 했다. 그런 그의 인생을 변화시킨 한 장면이 있었으니 바로 열여덟 살에 국립창극단에서 남해성(1935~2020) 명창을 만난 것이다. 왕기석 명창은 앞서 소리의 길을 걷고 있던 셋째 형 왕기창 명창을 만나기 위해 국립창극단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남해성 명창에게 시쳇말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당시 왕기석 명창에게 판소리란 그 위의 두 형인 왕기창·왕기철 명창 덕분에 익숙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매우 고된 것이기도 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두 형님이 얼마나 어렵게 소리 학습을 하는지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판소리가 자신에게 ‘운명’처럼 다가왔고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됐다고 했다.
왕기석은 국립창극단의 연수 단원으로 3년을 보내고 1983년부터 정단원이 됐다. 당시 최연소 정단원이었다. 그런 만큼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고 늘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단원이 된 지 3년 만인 1986년 그는 아시안게임문화예술축전 작품으로 제작된 <용마골 장사>의 주인공으로 발탁됐고, 이후 30여 년간 2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국립창극단과 더불어 소리의 길을 걸었다. 또한 2005년에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장원을 거머쥐며 명실공히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를 논할 때 ‘국립창극단’을 빠뜨릴 수 없는 이유다.
2013년 새로운 변화를 위해 국립창극단을 나온 후 그는, 대중 속에 그의 이름 석 자를 더욱 명확하게 각인시킬 만한 활동을 이어갔다. 2013년 전주 MBC 판소리명창서바이벌 <광대전 2>에 참여해 우승하는가 하면 201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고, 같은 해 KBS국악대상에서 판소리상 및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2017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음악 부문(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왕기석 명창

최고의 스승들을 만난 행운

왕기석 명창의 소리 근본은 남해성 명창이다. 그는 1984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전수장학생이 되면서 기존에 배운 소리를 복습하며 남해성에게 더욱 체계적으로 ‘수궁가’를 사사했다. 당시에는 어느 대목을 배웠는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스승에게 사인을 받아 문화재관리국에 일지를 제출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배운 소리를 확실히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남해성의 ‘수궁가’는 미산 박초월(1917~1983)의 소리를 잇고 있지만, 성음의 특징은 다소 다르다. 미산이 약간의 탁성을 동반한 수리성과 애원성을 짙게 가지고 있다면 남해성은 선천적으로 청아한 목을 타고났다는 평을 받았을 만큼 미성의 맑은 소리를 가졌다. 그러면서도 두 소리꾼 모두 상청이 뛰어났다. 그런 만큼 미산제 ‘수궁가’는 상청의 매력을 뽐내는 면모가 강해 남성이 소리하기에 꽤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을 이해한 스승은 남해성은 왕기석에게 고음으로 소리해야 하는 대목의 경우 하청으로 내려서 하라고 지도해 주었다. 제자가 가지고 있는 힘 있고 단단한 소릿결을 지키면서도 미산제 ‘수궁가’를 가르쳐주려 한 지혜로운 스승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왕기석이 국립창극단에 재직하던 1980년대 당시 국립극장장 허규(재임 기간: 1981.08.~1989.01.)는 전통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국립창극단에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수준 높은 창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정권진·박봉술·정광수·성우향·오정숙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창들을 국립창극단의 소리 선생으로 모셔 단원들을 훈련했다. 왕기석은 이 시기를 가리켜 “소리꾼의 생애 가운데 가장 큰 행복을 누리던 때”로 꼽았다. ‘만약 이 선생님들을 국립창극단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찾아다니며 배울 수 있었을까?’ ‘경제적 여유도 없었는데 가능하긴 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며 그야말로 엄청난 혜택을 본 행운아였다고 했다. 자애로 제자를 가르친 남해성의 소리를 뿌리로 삼아 당대 최고 명창들의 소리를 흡수하며 성심껏 노력한 그가 뛰어난 소리꾼으로 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수궁가’의 매력

판소리 ‘수궁가’는 병이 든 용왕이 토끼 간이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라에게 토끼를 꾀어 용궁에 데려오게 하나, 토끼가 꾀를 내어 용왕을 속이고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는 이야기다. 전승되는 다섯 판소리 가운데 유일하게 우화의 형태를 가진 작품으로 소리로 구현하기에 결코 쉽지가 않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펼쳐지는 광활한 이야기 공간과 다양한 수중생물과 육지생물의 등장, 그리고 왕과 신하의 장중한 대화와 화려한 토끼의 언변 등 판소리 ‘수궁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이에 소리 또한 때론 무겁고 때론 아기자기하며, 때론 진지하고 때론 해학적이다. 울리고 웃기는 판소리의 기본 속성이 응당 그러하지만 ‘수궁가’의 경우, 별주부의 지극한 충성과 더불어 권력을 향한 세계의 비판과 풍자 또한 깊이 담고 있어 결코 가벼이 울리고 웃길 수 없다. 기실 무척이나 어려운 소리 세계인 것이다.
왕기석 명창 역시 처음 ‘수궁가’를 배울 때 큰 재미를 못 느꼈다고 한다.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만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수궁가’로 개인 발표를 한 것이 이번 완창을 포함하면 벌써 23번째다.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수궁가’의 의인화와 우화의 면모를 깊이 이해하게 됐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진중한 ‘수궁가’의 매력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어려운 한자어의 나열로 유명한 ‘약성가’ 대목은 실제 병의 치료를 고려할 때 잘 짜인 사설임이 분명하고, 별주부가 토끼를 찾아 자신의 생에 처음으로 육지로 나오는 ‘고고천변’ 대목은 새로운 세상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별주부를 생각하며 들으면 그 맛이 더욱 깊다. 또한 ‘수궁가’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은 용왕과 토끼의 논변이 긴박하게 이루어지면서 말로써 끝내 용왕을 설득하는 토끼의 기지가 화려하게 빛나는 백미 중 백미다. 사설의 해학과 촘촘함, 그리고 기가 막힌 토끼의 감언이설에 과연 속아 넘어가지 않을 이 누가 있겠는가.
‘소리’는 즐거워야 하고 진정한 ‘판’은 대중과의 소통에서 나온다고 믿는 왕기석 명창. 40년 소리의 완숙함과 판을 좌지우지하는 능청스러운 발림으로 ‘수궁가’의 재미와 매력을 한껏 선사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박사학위 논문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2017)를 비롯해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사진. 노승환(roh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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