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언어

한국춤의 가슴과 등
얼굴 없는 춤이 말 걸어올 때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은 매일 아침을 ‘국립기본’으로 시작한다. 발레에 바가노바 혹은 체케티 메소드가 있다면, 한국춤에는 ‘기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무용을 주창한 송범 선생이 다듬은 국립기본은 전통춤의 아성을 간직하는 동시에, 판이 아니라 극장 무대에 서야 하는 무용수들에게 꼭 맞는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굿거리장단으로 시작되는 기본은 무용수에게 규율이자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을 쌓기 위한 기반이 돼왔다. 그리하여 한국춤의 몸짓에 깃든 이야기를 되새겨 보고자 국립기본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팔다리부터 손과 발, 허리, 어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호흡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짚어본다.
ⓒ전강인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한국춤이 다만 한복을 입고, 전통적인 무대에서 국악기 반주에 맞춰 추는 것만은 아닐지언정 그 춤사위를 떠올리면 이내 전통 복식이 연상되곤 한다. 삼국시대에서 출발해 근현대까지 점차 정형화된 한복 말이다. 여성은 가슴을 덮는 짧은 저고리와 발끝을 충분히 덮는 어깨허리치마, 남성의 경우 단추저고리와 바지에 갖춘 배자 혹은 쾌자 차림이 이미 한국춤의 모양새를 좌우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자리매김한 것이 사실이다.
어린 학생들의 한국춤 교습 현장에서는 이런 말을 자주 엿들을 수 있다. “(상체)뒤집어진다!” 선생님의 이런 지적은 한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통 레퍼토리만 아니라 다양한 움직임을 시도하기 위해 오늘날 직업 무용수들은 풀치마를 두르거나 동작을 수행하기에 편한 옷차림을 하지만, 학생들의 경우에는 레오타드와 풀치마 차림만 아니라 연습용 한복을 반드시 착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서구식 연습복인 레오타드가 몸의 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한편, 같은 춤사위일지라도 한복을 입었을 때 풍기는 느낌과 동작의 모양새는 현저히 다르다. 한국춤에서 ‘뒤집어진’ 상체란 한복을 입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짧은 저고리의 앞쪽이 들뜨면서 동정의 깃이 뒤쪽으로 넘어가 모양이 흐트러진, 즉 호흡을 놓치고 상체 움직임이 과하게 신전됐을 때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반듯한 호흡을 바탕으로 가슴과 등의 근육에서 유려하게 펼쳐지는 상체 움직임.
단전에서부터 뻗어나간 호흡은 무용수의 손끝에 도달해 춤의 선을 만들어낸다.

몸의 중심을 향해 호흡하면서 갈비뼈는 단단하게 모으고, 배꼽 혹은 아랫배 깊은 곳의 근육까지 살짝 위쪽으로 당겨준 상태. 한국춤에서 가슴과 등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장현수 훈련장은 호흡으로부터 그 과정을 설명한다. 온몸의 호흡과 힘을 바르게 쓰지 않고 춤사위가 널브러지면 ‘뒤집어진’ 동작이 된다. 가슴과 등의 근육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호흡을 모아 몸통을 반듯하게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단전으로부터 뻗어나간 모든 근육이 사고(思考)하는 것처럼 호흡할 때,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가슴과 등이 춤의 리듬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국춤은 주로 동작이 만들어내는 모양에서 연상되는 이름을 붙이고 표현을 규정해 왔기 때문에 횡격막 위쪽의 움직임, 그중에서 가슴과 등의 특정 춤사위를 설명하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팔과 손의 동작을 설명하는 사위가 꽤 많은 것에 견주어 의아함이 들기도 한다. 춤에 천지인(天地人)과 음양오행 사상을 부여했던 선조들은 춤추는 사람의 몸통을 천지인 중에서도 ‘인(人, 사람)’에 결부해 언제나 중심을 잡아주는, 춤의 주체로 인식해 왔다. 그러니 등과 가슴으로 대표되는 상체는 사실 팔과 다리의 춤을 단단히 뒷받침하는 나무의 몸통과 같은 셈이다.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가슴과 등이 춤의 리듬 위에서 움직일 때, 얼굴 없는 춤이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정재(呈才)를 비롯한 전통춤에서 무용수의 등과 가슴은 특별한 동작을 행하지 않는다. 의상의 매무새가 틀어지지 않도록 몸통은 언제나 반듯한 형태로 유지해야 하며, 움직임의 리듬을 만드는 것은 몸통에서 뻗어나간 머리와 목, 어깨, 그리고 팔과 다리의 몫이다. 서양의 궁중춤인 발레 역시 비슷하다. 고전발레에서 무용수의 몸통은 단단하게 직조된 코르셋 의상에 갇혀 쉽게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춤이나 발레의 역사에도 새로운 창작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생겨났다. 코르셋을 던져버리고 튜닉과 슬립을 선택한 현대무용(Modern Dance), 그리고 치마저고리가 아닌 개별 움직임에 어울리는 의상을 선택한 한국창작무용의 등장과 함께 무용수의 몸통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1973년 취임해 30년간 국립무용단을 이끈 송범 선생은 오랜 기간 다각도의 노력을 통해 한국춤의 무대화를 성공시켰다. 이를 위해 프로시니엄 극장 구조에 걸맞은 장막 구성의 무용극이 시도되는 한편, 발레의 아라베스크(Arabesque) 같은 대표적인 동작을 한국춤에 접목하기도 했다. 전통에서 비롯한 춤사위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 무대에 걸맞게 크고 드라마틱하며 감정 표현에 용이한 동시대적 춤사위를 개발한 것이다. 전보다 풍성해진 표현은 바로 가슴과 등의 움직임에서 비롯했다. 어떤 장단에도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하던 몸통을 흔듦으로써 얼굴과 표정 위주로 이루어지던 표현을 대폭 확장한 것이다.

프로시니엄 극장 무대에 걸맞게 한국춤의 움직임 또한 드라마틱하게 변화했다.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유지하던 무용수의 몸통을 흔듦으로써 표현을 대폭 확장한 것이다.

발레뤼스를 대표하는 미하일 포킨(Michel Fokine)이 안무한 5분여 길이의 현대발레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는 독특하게도 무용수의 뒷모습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춤은 30초가 지나고 나서야 얼굴을 보여주는데, 그 고요하면서 긴장이 넘치는 시간 동안 관객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무용수의 등과 날갯짓하는 포르 드 브라(Port de bras, 팔동작)뿐이다. 그러나 이내 느끼게 된다. 무용수의 등근육이 말을 건넨다는 것을. 얼굴과 표정 없이 움직임만으로도 무한정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지난 4월 국립무용단 <더블빌>에서 공연된 <몽유도원무>(안무 차진엽)의 도입 장면은 단단한 호흡으로부터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통 움직임의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했다. 탈의한 무용수들의 상체 움직임은 마치 정교하게 디자인된 그래픽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이었다. 물성이 비물성으로 전환되고, 또한 비물성이 도리어 물성의 본질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오늘날 한국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창작과 과감한 실험은 전통에 가려져 있던 무용수의 몸과 움직임의 표현을 한결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이어준다. 온몸 구석구석 살아 숨 쉬며 움직이는 순간을 마주해 보길 바란다. 오직 춤이 선사하는 예술적 경험의 절정을 경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문. 국립무용단 훈련장 장현수
무용. 국립무용단 송설·송지영
사진. 전강인
글. 김태희 춤으로 시작해 전통예술·연극·시각예술까지 범위를 넓혀가며 예술을 글과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무용이론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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