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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욱 음악감독
포용하되 절제할 줄 아는 현명함
지난 5월 <헤어질 결심>이 칸 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을 때 국내외 평단은 영화의 삽입곡인 정훈희의 ‘안개’,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내내 언급했다. 국내 개봉 후에도 두 곡을 향한 대중적 관심이 지대했다. 이 묘한 동서양 음악가의 컬래버레이션이 박찬욱 영화의 상징인 어딘가 뒤틀려 있는 사랑의 양태를 완결해 낸 주요인으로 평가된 것이다.
조영욱 음악감독 ⓒ최성열

기본적으로 <헤어질 결심>은 멜로드라마다. 멜로드라마란 그리스어로 노래란 뜻의 ‘멜로(melos)’와 극이란 뜻의 ‘드라마(drama)’가 합쳐진바, 음악으로 표현하는 감정적 이야기란 의미다. 이는 <헤어질 결심>의 정체성 대부분이 영화 속의 음악에 깃들어 있다는 뜻이면서, <헤어질 결심>의 성공이 다분히 영화 속 음악에서 나온 것과 진배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건 박찬욱 감독과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헤어질 결심>까지 8편의 작품을 함께해 온 조영욱 음악감독의 탁월한 성취였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헤어질 결심>의 핵심이었던 말러의 ‘아다지에토’와 정훈희의 ‘안개’를 어떻게, 어디에 쓸 것인지엔 조영욱 음악감독의 마법 같은 프로듀싱이 필요했다. 삽입곡뿐 아니라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의 파도치는 감정을 적절히 조율해 줄 연주곡의 디렉팅 역시 필수였다. 그러니 <헤어질 결심>뿐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음악의 큰 축을 조율해 온 그를 만나고 싶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주 헤이리의 작업실에서 그의 창작론을 직접 청음할 수 있었다. 여기에 그가 직접 내려준 커피를 마시는 행운까지 함께였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CJ ENM

구스타프 말러의 ‘아다지에토’

구스타프 말러의 ‘아다지에토’를 <헤어질 결심>에서 사용하는 일엔 여러 고민이 뒤따랐다. 워낙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며 특히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가 만든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그 쓰임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다. 그래서 애초에 박찬욱 감독은 등장인물이 직접 듣는 방식으로만 한 번 정도 쓰자고 했지만, 조영욱 음악감독은 외려 ‘아다지에토’의 더 적극적인 사용을 권했다. 그는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었기에 우리가 다른 작품들을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라며 당시의 선견지명을 회상했다. 그리고 결국 해준이 서래와의 사랑에 실패하며 ‘붕괴’하던 주요 장면을 포함해 <헤어질 결심>엔 ‘아다지에토’가 3번 흐르게 됐다.
“음악 취향이 서구적이란 말은 해외에서 작업하면서도 자주 듣는다. 옛날부터 듣고 자라온 음악이 서양 클래식이고 팝 음악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라고 설명한 조영욱 음악감독의 음악적 뿌리는 그가 데뷔작 <접속>으로 한국 영화음악계의 판도를 바꿨던 1997년부터 찾아볼 수 있다. 무려 80만 장 이상의 OST 앨범을 판매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접속>에선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나 세라 본의 ‘A Lover’s concerto’가 흐르며 영화의 세기말 로맨스를 완벽히 주조해 냈다. 이는 단순히 인기나 흥행 면에서의 성공이 아니었다. 이전 한국 영화계에선 적극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던 해외 기성곡 삽입이 중요히 여겨지게 됐고, 이는 영화음악 작업이 단순히 작곡·작사의 영역이 아니라 프로듀싱과 디렉팅의 범주에 있음을 증명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두 곡뿐 아니라 바흐의 ‘사랑의 송가’나 톰 웨이츠의 ‘Yesterday is Here’ 등 클래식·재즈·퓨전재즈·로큰롤을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포섭됐다. 어릴 적부터 서구권 음악과 친밀했던 조영욱 음악감독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자신의 취향만을 고수하지 않는 포용력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조영욱 음악감독ⓒ최성열(왼쪽), 영화 <장가네 목장> 녹음 현장(오른쪽)

‘안개’와 음악적 포용성

하지만 조영욱 음악감독의 진면목은 뿌리만을 고집하지 않는 포용성에서 온다. 정훈희의 ‘안개’가 그 증명이다. 애초 <헤어질 결심>의 시작점이었던 만큼 ‘안개’를 얼마나 강렬하게 사용할 것인지가 <헤어질 결심> 음악 작업의 주요 문제였다. 조영욱 음악감독과 박찬욱 감독이 기획해 낸 것은 정훈희와 송창식의 듀엣이었다. 두 거목의 협업을 위해 부산과 미사리의 라이브카페로 그들을 직접 찾아 부탁을 건넸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첫 국내 시사회 후에 송창식, 정훈희의 목소리에 넋이 빠졌다는 연락을 가장 많이 받았다”란 조영욱 음악감독의 소회는 그런 각고의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였다.
그러니까 조영욱 음악감독의 영화음악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취향만을 고수하지 않는 유동적인 포용력이다. “‘안개’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꼭 한국적인 것에 갇히는 건 아니다. <기생충>이 이탈리아 음악을 적절히 썼지만 이탈리아 영화는 아니듯이 말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개인의 취향뿐 아니라 국적, 장르에서도 영화음악의 사용을 절대 특정 범위에 국한하지 않는다. 대신 <헤어질 결심>의 ‘안개’나 <박쥐>에서 사용한 트로트처럼 영화의 서사와 분위기에 적합한 음악을 융통성 있게 택하거나 수용한다. 이를테면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에서는 인물들의 감정을 증폭하고 후반부에선 폭발시키기 위해 바로크 음악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켰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에서는 이미 충만한 서래와 해준의 감정을 유려하게 보완, 조력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연주법을 사용하지 않고 우드블록이나 캐스터네츠 같은 간소한 타악기를 주로 사용했다. 감정적인 현악기의 사용도 줄이고 웅장한 느낌의 목관·금관 악기도 단독으로만 간단하게 이용했다. 이런 악기들의 주법 역시 현대음악의 방식을 차용하면서 최대한 다양한 변주를 허락했다.
때로는 아예 음악이나 연주가 아닌 소리만으로 영화음악을 구성하기도 한다. 예컨대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조영욱 음악감독은 음악의 사용을 포기했다. 해준이 모래사장 밑의 서래를 애타게 찾으며 가장 큰 감정의 격동을 겪는 장면인데 오히려 음악이 주는 감정의 추가를 최대한 배제한 것이다. 대신 그의 선택은 파도 소리였다. 서해의 격렬한 조수간만 차가 만든 파도 소리로 해준과 서래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즉 조영욱 음악감독의 강점은 영화음악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사용할 수 있음에도 상황에 따라 그것을 절제하기도 하는 현명함에 있다.

<접속> 스틸컷 ⓒ명필름
<헌트> 스틸컷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음악은 독립적 예술

“영화의 시나리오나 소재, 주제에 구애하지 않고 정해진 것들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조영욱 음악감독의 가치관은 음악적 범위의 포용력뿐 아니라 영화음악의 독창성에도 있다. 그는 영화 서사나 플롯의 진행에 따라서 정석적인 음악을 사용하는 편은 아니다. 요컨대 영화음악을 어떤 영화적 요소의 하위 부분이 아니라 독립적인 예술로 여긴단 뜻이다. 일례로 <헤어질 결심>의 음악을 앨프리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비교하는 시각에 대해 그는 곧바로 주저의 의견을 내비쳤다. “<현기증>의 버나드 허먼 음악감독은 영화의 줄거리와 인물 감정에 완전히 맞춘 음악을 구성한 뒤에 조금씩 변주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헤어질 결심>에서 난 어떻게 하면 더 새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음악을 쓸 수 있을지를 주로 고민했다.”란 그의 말엔 영화음악의 정체성을 늘 새로이 탐구하고 갈구하는 창작자의 욕심이 서려 있었다. 즉 그의 영화음악은 영화의 표면에 편히 기대는 부수적 요소가 아닌 영화의 핵심을 치열하게 꿰뚫는 쪽에 가깝다. “아마 ‘안개’ 말고 또 다른 옛 한국 가요를 쓰자고 제안받았다면 거절했을 거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과거에 함몰되며 애상에 빠지는 영화가 아니라서 딱히 어울리지 않았을 거다.”란 통찰은 왜 그가 25년 넘는 시간 동안 한결같이 건재한 음악감독인지를 단번에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니 <접속>부터 올해의 대작 <헌트> <헤어질 결심> 그리고 최근에 추석 안방극장을 달궜던 윤종빈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더불어 곧 작업에 들어갈 박찬욱 감독의 HBO 시리즈 <동조자>까지 작업물의 일부를 나열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조영욱 음악감독의 비결은 영화음악을 영화에 가장 어울리게 만들되, 한편으론 그런 어울림을 영화로부터 마냥 편안하게 얻으려 하지 않는 치열한 태도에 있었다. 이는 서구의 고전음악에서부터 영화에 어울리는 한국적 색채의 음악, 넷플릭스 시리즈에 적합한 트렌디한 영화음악까지 모두 아우르는 그의 작업이 한결같이 유효한 이유기도 했다. 그렇게 조영욱 음악감독과의 대화는 창작에 있어 이러한 포용과 변화의 태도, 뚜렷한 가치관의 관철이 비단 영화음악뿐 아니라 창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분명한 영감이 될 것이란 믿음으로 끝맺어졌다.

글. 이우빈 영화·영상 주간지 『씨네21』의 객원기자로 영화제 취재, 영화인 인터뷰, 영화 리뷰 작성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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