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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합창단 <위대한 합창 시리즈Ⅲ: 바흐 B단조 미사>
칸토르 바흐의 위대한 유산
바로크 시대 뛰어난 작곡가로 이름을 남긴 바흐가 유일하게 창작 동기를 밝히지 않은 작품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창작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시공간을 초월하는 위대한 울림을 전한다는 것. 이제 그 울림을 만나볼 시간이다.

국립합창단이 ‘위대한 합창 시리즈’의 세 번째 순서로 ‘B단조 미사’를 준비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를 대표하는 이 작품은 연주자의 입장에서 준비하는 것도, 청자의 입장에서 감상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음악이다. 그래서 어쩌면 ‘B단조 미사’는 여러 측면에서 바흐가 남긴 가장 어려운 음악이기도 하다. 도입부에서 제시되는 B단조 화성은 충분히 극적이고, 이 짧고 극적인 순간을 지나며 우리는 끝날 것 같지 않은 ‘키리에’ 악장의 무한 반복되는 푸가 주제를 듣는다. 그리고 서서히 이 작품 내부로 침잠하게 된다. 마치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회화에서 만나는, 그 무겁고, 깊고, 어두운 흑색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물론 ‘B단조 미사’에 등장하는 모든 음악이 이렇게 무겁지만은 않다. 예컨대, ‘키리에’ 악장 이후에 등장하는 ‘크리스테’ 악장은 바람에 날려갈 듯한 두 명의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이중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선하고도 투명한 이중창은 이 음악 자체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못한다.

지휘 얼 리버스

칸토르 바흐

‘B단조 미사’는 작곡의 동기가 밝혀져 있지 않은, 다시 말하면 왜 창작했는지 알지 못하는, 바흐가 남긴 유일한 음악 중 하나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작곡의 동기를 모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싶으나, 바흐가 활동하던 당대의 시각에서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작곡가의 행동이 아닐 수 없다. ‘B단조 미사’를 쓸 당시 바흐는 독일 라이프치히에 소재하는 성토마스(St. Thomas) 학교와 교회의 음악감독(칸토르)으로 고용돼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된 임무는 이 루터교 교회의 예배에 필요한 음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바흐는 이 일은 1723년, 그러니까 그가 38세 되던 해부터 사망하는 1750년까지 이어갔다.
그런데 칸토르 바흐의 임무가 예배음악만을 제공해야 하는 것에 머물지는 않았다. 그는 성토마스 학교의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라이프치히시에서 행해지는 공식 행사를 위한 음악을 작곡해야 했고,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행사에서 요구되는 작품도 제공해야 했다. 작곡가 바흐는 자신의 일터가 쉴 틈 없이 요구하는 고된 업무에 쉴 틈 없이 응답하며 살아갔다. 이러한 환경에서 바흐는 왜 굳이 그의 일터가 요구하지도 않은, 필요하지도 않은 가톨릭 예배음악인 미사를 작곡했는지 알기 어렵다. 더구나 이 작품은 바흐 생전에 전곡이 연주된 기록이 없다. 고용주가 요구하고, 고용인이 작품을 제공하는 창작 시스템에서 일하던 작곡가가 어찌 보면 쓸모없어 보이는, 더구나 생전 연주될 가능성이 희박한, 나아가 보상조차 없는 작품을 기나긴 시간을 공들여 깊이에 깊이를 더해 창작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립합창단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B단조 미사’는 한순간에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작곡의 출발점은 ‘1733 미사’라 불리는 음악이다. 1733년 여름, 바흐는 친필 서신과 함께 아름답게 필사된 ‘1733 미사’를 드레스덴 궁정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에게 헌정한다. 이 작품에는 ‘키리에’와 ‘글로리아’ 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시점인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흐는 ‘1733 미사’를 확장해 통상문 미사를 완성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748년에서 1749년경, 즉 그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데이’ 등의 악장을 첨가해 ‘B단조 미사’ 전곡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후 첨가된 악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 모두가 어떤 특정 순간에 작곡된 음악이 아니다. 예를 들면 ‘상투스’ 악장의 경우 1725년, 즉 ‘1733 미사’가 작곡되기 최소 8년 전에 만들어졌고, 바흐는 ‘B단조 미사’에서 이를 재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B단조 미사’에는 20여 년 세월 동안 작곡가 바흐가 연마한 대부분의 작곡 기술이 녹아 있는, 음악가로서의 사고가 어디까지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어쩌면 지극히 순수한 작곡가의 음악적 영감과 창작열에 의해 이루어졌을 수도 있음을 방증하는 매우 특별한 작품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흐가 이러한 작품을 당대 자신이 만나던 청중이 아니라 미래의 어떤 청중, 국립합창단을 통해 만나는 우리와 같은 청중을 위해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펼치다 보면, 이 음악은 더더욱 각별해진다. 이 각별함을 과연 얼 리버스(Earl Rivers)와 국립합창단은 어떻게 전달할지 너무나 기대된다.

협연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
소프라노 서예리·카운터테너 정민호·테너 홍민섭·바리톤 김승동(왼쪽부터)

유연한 단체의 위대한 울림

국립합창단은 참 유연한 단체다. 오랜 시간, 여러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부단히 스스로를 다듬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고음악 연주와 현대 연주 모두에 능통한 지휘자 얼 리버스 역시 매우 유연한 음악을 선보여 왔다. 그래서 이 둘의 만남이 더 기다려진다. 이들이 보여주는 유연함은 ‘B단조 미사’에 담긴 그 다양한 음악 양식을 때로는 선명하고도 투명하게, 그리고 때로는 한없이 무겁게 보여줄 것이다. 이들과 함께하는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은 국내 고음악 연주 문화의 중요한 한 축을 든든하게 지켜내고 있는 귀한 단체다. ‘B단조 미사’의 각별함을 이들만큼 잘 알고 있는 단체도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독창자로 무대에 서는 소프라노 서예리를 위시해 카운터테너 정민호, 테너 홍민섭, 그리고 바리톤 김승동 역시 청중을 이 작품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데 부족함이 없는 연주가들이다. 국내외를 오가며 연주 활동을 펼치는 이들이 들려주는 맑고 청아한, 또는 묵직한 울림은 바흐의 ‘B단조 미사’ 곳곳에 스며들면서 이 작품을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어주리라고 믿는다.
‘B단조 미사’를 ‘위대한 합창 시리즈’의 일부로 기획한 국립합창단의 결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때다. 국립합창단은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본 윌리엄스의 ‘바다 교향곡’을 이미 공연한 바 있다. 모두 위대한 합창이 포함돼 있는 음악이다. 물론 위대한 합창곡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앞으로도 더 많이 작곡될 것이다. 그러나 ‘B단조 미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위대하다. 단순히 이 작품 안에 담긴 깊이 있는 표현과 탄탄한 구조, 바로크의 모든 음악 양식을 아우르는 놀라운 작곡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 살았던 바흐라는 작곡가가 우리에게 그의 유산을 남겨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유산의 울림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 때문에 이 작품은 충분히 위대하다. 바흐는 2022년, 한국의 청중이 ‘B단조 미사’를 이러한 방식으로 만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함에도 그렇다.

글. 이가영 성신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18세기 독일의 음악문화를 연구한다. 한국·미국·독일 등지에서 관련 논문을 출판했고 그 시대 음악문화가 우리에게도 유의미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진제공. 국립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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