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스밍

칼럼니스트 한동윤의 플레이리스트
창조적 에너지에 불을 붙이다
‘영감(靈感)’은 ‘예술 작품을 창작하기 직전의 창조적인 열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영감은 ‘무엇’에 의해 영향받아 부지불식간에 생겨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에 팝·록·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넣기로 유명하다.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음악에서 글쓰기를 배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렇듯 영감은 장르가 다른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며 작가들의 창조적 에너지에 불을 붙인다.

예술은 홀로 잉태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이든, 창작에는 지식과 경험이라는 촉매제가 필요하다. 기막힌 상상력도 황무지에서는 나올 수 없는 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경험을 쌓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기존하는 예술이 새로운 예술의 원천이 되는 경우도 꽤 있다. 영화·음악·문학·미술 등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계통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공통부분이 적어 보일지언정 많은 분야가 서로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음악에서 착상이 시작된 문학작품도 여럿 된다. 노래가 품은 다양한 소재와 주제, 곡에 깃든 정서와 분위기가 작가에게 아이디어를 주곤 한다. 소설과 시 등 문학에 영감을 제공한 음악을 살펴본다.

악뮤 ‘물 만난 물고기’

남매 듀오 악뮤(AKMU)는 이찬혁이 제대한 2019년 세 번째 정규 앨범 「항해」를 발표한다. 음반이 출시된 이튿날에는 이찬혁의 첫 소설 『물 만난 물고기』가 출간됐다. 「항해」에는 책 제목과 같은 노래가 수록돼 있다. 책의 목차도 ‘항해’ ‘달’ ‘고래’ 등 앨범의 수록곡 제목과 상당수 동일하다. 노래를 만들면서 떠오른 생각을 소설 형식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 집필하게 됐다고 한다. 음반과 책의 표지 디자인도 서로 닮았다.
어떤 곡이 주된 모티프가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책의 제목으로는 ‘물 만난 물고기’가 가장 마음에 든 듯하다. 포크록 형식의 ‘물 만난 물고기’는 음악적으로 상당히 기운차다. 뜻이 없는 음절로 이룬 코러스도 귀에 잘 들어온다. 하지만 마냥 신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사로는 음악가로서의 열망을 표한다. 이를 확인하는 순간, 활발한 기운은 치열함으로 느껴진다.
소속사가 작성한 3집 소개 글을 보면, 음반 제목에 ‘떠나다’라는 키워드를 담았다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소설 『물 만난 물고기』의 주인공도 ‘예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여행을 떠난다. 이 여정에는 아티스트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고, 정신적 성장이 존재한다. 이찬혁은 본인이 음악가로서 평소에 하던 생각을 소설 주인공에게 투영했다.

비틀스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

무라카미 하루키((村上 春樹, Murakami Haruki)는 작품에 팝·록·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넣기로 유명하다. 대학생 시절 음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재즈 바를 운영한 이력만으로도 그가 음악을 많이 좋아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은 음악에서 글쓰기를 배웠다고 밝혔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음악은 불가분의 관계다.
1987년 발간된 장편 소설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은 비틀스(The Beatles)가 1965년에 낸 노래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서 제목을 빌렸다.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노래 제목은 ‘노르웨이산 나무로 만든 가구’를 뜻한다. 하지만 일본에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가 발매됐을 때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오역됐다. 이 모호한 해석이 마음에 들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제목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2분이 조금 넘는 짧은 길이의 노래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다. 화자는 어떤 여인을 만나 그녀의 집에 가게 된다. 늦은 시간까지 와인을 마시며 즐겁게 대화를 나눈 화자는 당연히 그녀와 잠자리를 가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화자는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녀는 집에 없었다. 화가 난 화자는 노르웨이산 가구에 불을 붙인다.
노래는 인도의 전통악기 시타르를 사용해 독특한 느낌을 풍겼다. 이 노래가 나온 뒤로 영국 록 밴드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Paint It Black’, 미국 가수 스콧 매켄지(Scott McKenzie)의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Flowers in Your Hair)’ 등 시타르를 쓴 곡이 급증했다. 시타르를 들인 최초의 노래는 비틀스의 노래보다 몇 달 먼저 발매된 영국 록 밴드 킹크스(The Kinks)의 ‘See My Friends’였다.

검정치마 ‘Everything’

2018년에 출간된 배수연 시인의 시집 『조이와의 키스』는 ‘여름의 집’이 첫머리에서 독자를 맞는다. 배수연은 검정치마의 ‘Everything’에서 영감을 얻어서 이 시를 쓰게 됐다고 한다. 노래에 쓰인 ‘여름’이라는 단어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 듯하다.
2016년 출시된 ‘Everything’은 나른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기타·드럼·보컬이 모두 여유롭다. 자극이나 과장의 요소가 어디에도 없으니 듣는 이들은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간주부터는 조금 힘이 붙지만, 이때도 급작스럽거나 심하지 않아서 편안함이 유지된다. 이 은은함 덕분에 반복되는 “You are my everything.” 가사가 금세 머릿속에 박힌다. 추억과 다짐이 공존하는 노랫말도 매력적이다. 1절에서는 비가 내리는 날에 집에서 함께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2절에서는 무조건 사랑하겠다고 얘기한다. 앞으로 오래도록 사랑하자는 뜻일 수도 있고,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이의 처절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넌 내 모든 거야. 내 여름이고, 내 꿈이야.” 화자에게는 여름이 거대하고 각별하다. 전자든 후자의 상황이든 여름이라는 비유는 강렬했다.

월즈 엔드 걸프렌드 ‘Birthday Resistance 誕生日抵抗日’

음악인 자체가 영감이 된 사례도 있다. 2009년 출간된 김연수 소설가의 단편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동명의 단편소설이 그렇다. 해당 작품 제목은 일본 뮤지션 마에다 가쓰히코(前田勝彦, Maeda Katsuhiko)의 1인 밴드 월즈 엔드 걸프렌드(World’s End Girlfriend)에 착안했다.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어감이 좋아서 쓰게 됐다고 한다.
월드 엔즈 걸프렌드의 음악은 무척 까다롭다. 이 밴드의 음악적 근간이 복잡한 구성, 사운드의 질감, 추상성에 집중하는 전자음악의 한 갈래 아이디엠(IDM, intelligent dance music)과 대체로 긴 러닝타임, 어두운 분위기, 난해한 구조 등이 특징인 포스트록(post-rock)인 까닭이다. 하지만 김연수는 이 만만찮음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2009년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의 인터뷰에서 월즈 엔드 걸프렌드를 접한 뒤 포스트록에 빠졌다고 밝혔다. 2012년에는 포스트록의 성격을 옅게 드러내던 듀오 푸른 새벽과 아홉 개의 단편을 실은 협업 앨범 「Blue Christmas」를 내기도 했다.
해당 인터뷰에서 김연수는 2007년 앨범 「Hurtbreak Wonderland」에 수록된 ‘Birthday Resistance 誕生日抵抗日’를 살짝 소개한다. 이 곡은 색소폰, 건반악기, 현악기가 온화하게 연주되지만, 전자음이 조금씩 추가되면서 사나운 드럼 프로그래밍을 내보인다. 후반에 가서는 탁한 노이즈를 가하다가 다시 차분하게 마무리된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생일 저항의 날’인데, 생일이라는 단어가 갖는 밝은 이미지와 저항의 일반적인 태도를 소리로 잘 나타냈다.

애니멀스 ‘The House of the Rising Sun’

1996년 출간된 박성원 소설가의 단편집 『이상(異常) 이상(李箱) 이상(理想)』에 실린 「해 뜨는 집」은 제목부터 친근하다. 팝송을 즐겨 들었던 이라면 바로 영국 록 밴드 애니멀스(The Animals)의 대표곡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떠올릴 것이다. 「해 뜨는 집」은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주인공이 지인의 소개로 ‘해 뜨는 집’이라는 정신병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담는다.
미국 민요인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의 내용은 매우 우울하다. 화자는 뉴올리언스에 있는 ‘일출’이라는 집에서 많은 이가 인생을 망쳤다면서 자신도 그중 하나라고 얘기한다. 기타와 오르간 소리, 한이 서린 티가 확실하게 나는 보컬이 끈끈하게 어우러져서 우중충함을 빚어낸다.
애니멀스는 ‘The House of the Rising Sun’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다. 이로써 애니멀스는 영국 밴드들의 대대적인 미국 진출을 일컫는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선두 중 하나가 됐다. 이후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 돌리 파튼(Dolly Parton), 뮤즈(Muse) 등 많은 뮤지션이 리메이크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상국이 ‘해 뜨는 집’으로 내기도 했다.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은 1970년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지만, 어두운 내용 때문에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이 순간에도 많은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영감은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올 수도 있지만, 자주 듣던 음악이나 익숙한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창조적 에너지에 불이 붙는 그 순간까지 부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길.

글. 한동윤 대중음악평론가. 세태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예술가를 향한 애정이 깃든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힙합은 어떻게 힙하게 됐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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