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고전여행

판소리 열두바탕을 찾아서
말초적 웃음을 위한 서사
판소리의 인기가 절정이던 19세기에 혜성같이 등장했지만 곧 사라져 버린 작품이 있다. 바로 ‘강릉매화타령’이다. 송만재의 ‘관우희’, 이학규의 『낙하생고』, 조재삼의 『송남잡지』 등 여러 문헌에서 이 작품을 판소리 열두 마당 중 하나로 기록하고 있으나, 창으로는 전해지지 않아 실제로 어떻게 불렸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다 1993년 사설정착본 『매화가라』와 2002년 한글필사본 『골생원전』이 발견되면서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강릉매화타령’은 강릉에서 이름난 기생인 ‘매화’와 몰락한 양반인 ‘골생원’이 중심이 된 이야기다. 강릉 사또의 책방 골생원은 기생 매화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온통 매화 생각으로 허송세월하다 과거에 낙방하고 만다. 사또는 그런 골생원을 골탕 먹일 요량으로 매화가 죽었다고 꾸미고 백성들을 입단속시킨다. 그리고 슬퍼하는 골생원에게 귀신 행세를 하는 매화를 보내, 알몸으로 자신을 따라오라고 꼬드긴다. 골생원은 발가벗고 매화를 따라나선다. 이후 결국 진실이 탄로 나 골생원은 사람들이 다 모인 앞에서 크게 망신을 당한다.

춘향과 몽룡 이야기의 코미디 버전

우리 고전 서사 중 흔한 것이 기생과 양반의 사랑 이야기라지만, 양반 남성이 지방 기생과 사랑에 빠졌다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이별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춘향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속내를 살펴보면 이 둘은 ‘장르’가 다르다. 선남선녀들이 등장해서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한 편의 로맨스 드라마가 ‘춘향가’라면 그것을 교묘하게 비틀어 패러디한 시트콤이 ‘강릉매화타령’ 같다.
시트콤은 어리숙하고 모자란 인물들이 나와 가벼운 웃음을 주는 코미디극이다. ‘강릉매화타령’의 남자주인공 골생원은 ‘춘향가’의 이도령에 비해 너무나 모자란 인물이다. 이도령은 풍채가 좋고 기상이 활달하며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선남’이다. 그러나 골생원은 양반이긴 하나 몰락한 처지로 집안을 일으킬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여색에 빠져 놀기만 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골생원전』에서는 유부남이기도 하다!)
그는 갓 끝을 땅에 끌고 다닐 만큼 키가 작고, ‘곱사등이·곰배팔이·외짝볼기·안짱다리·토산불이’다. 기괴한 외양을 가진 그의 이름은 ‘불견’으로, 성과 합하면 ‘골불견’이 된다. ‘보기에 볼썽사납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그의 추한 외모와 연관되지만 사실은 그가 ‘색골(色骨)’이라서 볼썽사납다는 뜻까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이 이름은 골생원이 매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암시한다. 그는 오직 매화의 ‘육체’만을 탐할 뿐이다. 그는 매화가 죽은 줄 알고 화공을 불러들이는데, 매화의 초상을 그릴 때 엉덩이·다리·성기를 잘 그려달라고 당부하는 모습은 정녕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두터운 신뢰를 기반으로 신분 차이를 극복한 사랑을 이루어내는 몽룡과 춘향과는 전혀 다른 서사를 만들어낸다.
골생원과 매화의 이별 대목 역시 겉으로 봐서는 ‘춘향가’와 비슷하다. 그러나 말 위에 오른 남성과 그를 붙잡는 여성이 눈물 바람으로 헤어지는 이 애틋한 장면에서, 골생원은 매화가 다른 남성과 육체관계를 맺을까 봐 염려한다. 말에 올라 길을 떠나며 골생원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외짝볼기’라서 낙마할 것 같아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두 남녀가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이별의 상황은 역설적으로 더욱 우스워질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됐을까? 몽룡은 이별의 아픔을 동력 삼아 장원급제하고 금의환향하지만 골생원은 매화 생각에만 빠져 공부를 그르치고 만다. 심지어는 과거 시험장에서 매화에 대한 연정시를 답안으로 제출하고 나오는 기행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험장을 빠져나온 골생원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인다. 시험에 낙방하면 다시 강릉으로 돌아가 매화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자란 골생원을 향한 웃음이 어딘가 찜찜한 이유

이렇게 남자주인공인 골생원이 모자라고 철없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그가 강릉 사또의 장난에 홀딱 속아 넘어가 망신을 당한다 해도 당대 판소리 청중은 양심의 가책을 덜고 마음껏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골생원이 매화의 가짜 무덤을 발견한 이후 이어지는 사또의 장난은 두 종의 이본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골생원전』에서는 사또가 부종으로 보기 흉측한 여종을 매화라고 속여 골생원에게 보내는데, 그녀는 밤새 골생원을 희롱한다. 매화의 아름다운 육체에 집착하던 골생원이 추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이 폭소를 자아낸다.
한편 『매화가라』에서는 사또가 매화를 귀신으로 속여 보내 골생원과 밤을 보내게 한다. 매화는 골생원의 혼만이 자신과 함께 갈 수 있으며, 그러려면 인간의 의복을 벗어야 한다고 말한다. 매화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먹고 자신도 귀신이 되었다고 착각한 골생원은 알몸인 채로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다니며 노닌다. 만천하에 자신의 ‘외짝볼기’와 ‘토산불알’을 다 드러낸 채 말이다. 강릉 백성들은 아무리 골생원이 우스워도 그의 앞에서는 시원하게 웃을 수 없다. 이 일을 발설하거나 폭로할 시 엄벌에 처한다는 사또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웃음을 억지로 참는 백성들의 모습 역시 희극성을 극대화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 화소는 마치 1990년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른바 ‘몰래카메라’라고 불리던 장치와 비슷하다. 그것은 한 연예인을 대상으로 모두가 공모해 엉뚱한 상황을 연출한 뒤, 그의 반응을 관찰하며 웃음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을 따돌려 속여서 억지로 빚어내는 웃음이 가진 폭력성을 이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강릉매화타령’을 보고 마냥 속 시원하게 웃을 수만은 없다면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일 것이다.

몰락 양반의 권위 상실에 대한 상징적 이야기

‘강릉매화타령’의 전반부에서 비록 골생원의 외양은 비속할지라도 그것은 의복에 가려져 있었고, 그 성정은 방탕할지라도 그것은 오직 매화와의 내밀한 관계에서만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옷을 벗어던진 이후, 그의 추한 외모를 가려줄 수 있는 것은 더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방탕한 성관념 역시 만천하에 공개돼 버렸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시선’이 힘, 즉 권력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상기시킨다. 라틴어에서 ‘시각(visus)’과 ‘힘(vis)’을 의미하는 단어는 ‘나는 본다(video)’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누군가 “어디서 눈을 그렇게 떠!” 또는 “눈 깔아!”라고 호통치며 화를 낸다면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를 응시하는 것은 능동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응시의 주체인 ‘보는 자’는 응시의 대상이 되는 ‘보이는 자’에 대해 권력적 우위를 점한다.
매화를 따라나선 골생원은 자신도 귀신이 됐다고 믿게 돼, 스스로 ‘보이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가 됐다고 착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결코 자신을 볼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로, 골생원은 철저하게 응시의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러한 시선의 비대칭성은 곧 힘의 비대칭성을 암시한다. 신분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응시의 대상이 돼버린 골생원은 그나마 양반으로서 가지고 있던 일말의 권위마저 완전히 상실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귀신 장난’ 화소는 권력을 잃어버린 몰락 양반의 처참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이야기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버리기에, 이 상황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이나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다. ‘강릉매화타령’을 감동이나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말초적 자극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더는 ‘몰래카메라류’의 예능 프로그램이 환영받지 못하듯, ‘강릉매화타령’이 오래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그림. 윤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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