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다섯

유영애의 동편제 ‘흥보가’
2022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11월 공연 취소 안내
2022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11월 - 유영애의 동편제 ‘흥보가’ 공연이 출연자의 코로나19 확진으로 인해 취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예매하신 티켓은 전액 환불 조치되며, 각 예매처를 통해 순차적으로 취소 및 환불 처리될 예정입니다.
(※ 결제 수단에 따라 최대 5~7일 소요 예정 / ※ 문의 02-2280-4114)
묵직하고 힘 있는 소리
낙랑공주가 돼야겠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공부는 일곱 번의 성대결절 끝에 결실을 얻었다. 어렵게 연마한 창자 특유의 하성과 힘 있는 소리는 동편제 흥보가 속 캐릭터의 다채로운 이면을 보여줄 것이다.
유영애 명창

낙랑공주가 되고 싶던 소녀

전라남도 장흥 출신의 소리꾼 유영애의 올해 나이는 일흔넷이다. 그녀가 소리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어린 시절 장흥극장(1987년 폐업)에서 본 여성국극단의 공연이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공연은 그녀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옷자락을 휘날리며 건드러지게 춤을 추는 남자 주인공은 여자였다고 믿기 힘들 만큼 멋있었다. 가녀리면서도 아름다운 낙랑공주는 집에 와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소녀는 어머니의 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가재도구를 북채로 삼아 자명고를 찢던 낙랑공주의 모습을 흉내 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 나도 낙랑공주가 돼야겠다.”
하지만 부모님은 소리 배우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어린 유영애는 고집을 부렸고, 급기야 가출하기에 이른다. 집을 나가 광주에서 오후 5시 40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서울의 외삼촌 집에 머물며 시위를 했지만 이내 아버지에게 붙들려 장흥으로 내려왔다. 열한 살 때의 일이다. 이후 장흥의 김상용 명창이 운영하는 국악원에 가서 마루 밑에 숨어 도둑 공부를 했다. 부모는 여전히 그가 소리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고, 열두 살 무렵부터 김상용 명창의 수하에서 소리 학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따져보면 그녀가 소리의 길을 걸은 지도 벌써 60여 년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명창의 길은 쉽지 않다. 유영애는 그녀의 나이 열아홉 살 때 스승을 잃었다. 김상용 명창이 타계한 것이다. ‘심청가’를 채 다 배우지 못한 때였다. 하지만 당시 장흥의 채 선생(선생의 본명은 기억이 나지 않음)이 그녀를 부산으로 데려가 계속 소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부산에서 머물며 소리 공부를 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이후 유영애는 개인적 인연으로 친분이 있던 조상현 명창을 찾아 서울로 향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넷 무렵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쁜 일정으로 유영애에게 소리를 가르쳐줄 수 없었고, 대신 한농선 명창을 소개해 주었다. 이후 유영애는 한농선 명창에게 ‘흥보가’를 배웠다. 꼼꼼하고 정확한 한농선 명창은 어려운 스승이었다. 원하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연습을 시켰다. 어느 때는 몇 달에 걸쳐 고작 몇 대목만 배울 뿐이었다. 그렇게 ‘흥보가’를 다 배우는 데 5년이 넘게 걸렸다. 유영애 명창은 꼼꼼한 스승 밑에서 자신 역시 엄격하게 소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흥보가’를 배우는 와중에 김상용 명창에게 못다 배운 ‘심청가’를 배우고자 성우향 명창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심청가’ ‘춘향가’를 학습했다. 이후 1986년 무렵에 조상현 명창에게 소리를 배울 기회를 얻어, 강산제 ‘심청가’를 거듭 배웠다. 그리고 1988년 남원 춘향제 전국판소리경연대회 명창부 판소리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마침내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중·하성의 묵직함

유영애 명창의 소리 특징은 명확하다. 그것은 여성 명창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묵직한 저음과 힘찬 발성이다. 특히 중·하성의 소리에서 탁월함을 보이는데, 이러한 그녀의 소리 특징은 조상현 명창을 만나면서 생긴 것이다. 유영애는 조상현 명창이 구사하는 상·중·하성의 자유로운 소리가 언제나 놀라웠다. 존경을 넘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엇보다 판소리의 이면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최상성은 물론 최하성까지도 낼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의 목소리로 흥보·놀보·이몽룡·심봉사·변학도 등의 남성 캐릭터를 표현할 때, 굵직한 남성의 소리를 진정으로 내지 못하면 그 인물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유영애는 낮고 굵은 하성의 소리를 내고자 늘 목을 눌러 소리를 했고, 올리는 소리보다 내리는 소리에 더 매달렸다. 올려 부르는 소리도 내려서 불러보고, 상성을 내다 하성으로 뚝 떨어지는 소리, 반대로 하성에서 상성으로 곧게 올리는 소리 연습에도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일곱 번의 성대결절을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 소리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이미 가지고 있는 성음으로도 충분히 소리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렇게 하성에 매달렸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명창은 말했다.
“중·하성으로 장면을 표현하면 고요하고 잔잔한 소리의 흐름을 만들 수 있어요. 하성의 소리는 깊고 깊은 바다에서 잠수하는 듯한 희열을 주죠. 하성에서 상성으로 뻗어나갈 때의 짜릿함은 말로 할 수가 없고요.”
하지만 일곱 번째 성대결절이 왔을 때는 ‘소리를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에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소리를 쉬었는데, 참 신기하게도 거친 듯하면서도 애달픈, 자연스럽고도 멋스러운 낮은 음색의 ‘구성진’ 소리가 얻어졌다.
이번 유영애가 들려줄 ‘흥보가’는 한농선에게 사사한 것으로 대마디 대장단의 간명하고 힘이 있는 동편제 소리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나 유영애가 연마한 성음, 즉 여성 창자로선 보기 드문 묵직한 색채의 성음으로 들려준다니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유영애 명창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녀가 소리도 소리지만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인물의 다변화, 장면의 이면 표현에 얼마나 고민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중·하성의 소리에 그토록 매달린 것도 결국 다양한 인물을 실제와 같이 묘사하고 싶은 강렬한 바람이 아니었겠는가.

인간의 선함을 생각하게하는 소리

『흥보전』은 가난한 흥보를 통해 조선 후기 농토를 잃고 일용직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백성의 삶을 보여주면서도, 흥보의 ‘선함’을 통해 얻은 기적 같은 행운과 형제간의 갈등 회복을 말하는 이야기다. 흥보는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형을 끝내 끌어안는데, 요즘 우리네 현실에서 보면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유영애 명창은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에서 흥보가 두 번째 박을 탈 때 형을 생각하는 모습이 언제나 감동적이라고 한다. 그렇게 형과 형수에게 구박을 받았는데도 좋은 것이 나오니 형에게 가져다주고 싶다는 마음 씀씀이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정세태로 생각한다면 흥보의 모습이 언제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다만 그와 같은 ‘선함’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한다.
타인과 갈등이 빚어지면 한번 물러서 주고, 밑지는 줄 알면서도 때론 양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져주는 것이 바보이고, 양보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나만의 ‘선함’으로 세상에 조금이라도 내어주며 살다 보면 혹시 알랴. 나도 모를 보은표 박씨가 어떤 형태로든 내게 올지. 점점 각박해지는 현실 세태에서 여전히 ‘흥보가’가 재미 이상의 무엇을 우리에게 주는 부분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내가 베푼 ‘선함’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2017)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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