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고전여행

판소리 열두바탕을 찾아서
‘나다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일요일 저녁만 되면 앓게 된다는 병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월요병’. 월요일 출근을 앞두고 느끼는 답답함과 불안한 증세를 유머러스하게 드러낸 표현이다. 그런데 이 월요병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짜 나’를 직장에 보내놓고 ‘진짜 나’는 끝나지 않는 주말을 즐기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더는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몸을 실을 일도, 상사의 잔소리를 참고 견딜 일도 없지 않을까. ‘가짜 나’라는 존재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때가 바로 주말 저녁이라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대인의 실없는 상상이지만, 사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진짜 나’와 ‘가짜 나’의 공존을 상상해 왔다. 명말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털을 뽑아 자신과 닮은 수많은 분신을 만들어내고, 조선 후기 『전우치전』이나 『홍길동전』의 주인공들도 도술을 활용해 만든 분신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문제는 이 사례처럼 나의 분신들이 나에게 꼭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이 거짓된 존재들이 ‘진짜 나’에게 그 무엇보다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쥐 변신 설화’가 대표적이다. 사람의 손톱을 주워 먹은 쥐가 그 사람으로 둔갑하고서는 당당히 진짜 행세를 하는 이야기다. 나와 가장 가깝다는 가족들도 누가 진짜인지 몰라본다. 심지어 아내가 가짜와 동침하고선 쥐새끼를 우글우글 낳게 된다는 각편까지 있을 정도다.
만약 가짜가 진짜를 골탕 먹이려고 단단히 작정한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항복이 쓴 한문소설 『유연전』에는 주인공 유유·유연 형제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친척들이 결탁해 ‘가짜 유유’를 내세운다. 그러다 가짜 유유가 도망치자 유연에게 형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워 유연은 억울하게 옥사하고, 그 후 ‘진짜 유유’가 나타나 사건의 전말을 밝힌다. 이 소설은 1589년(선조 22)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것으로, 불현듯 나타난 가짜가 진짜 내 삶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잘 전달한다.

새 사람으로 거듭난 옹졸한 부자 이야기

이러한 ‘진가쟁주(眞假爭主)’ 이야기의 백미가 바로 ‘옹고집 타령’이다. 송만재의 『관우희』 제17수에 옹고집 타령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통해 초기의 서사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옹 생원이 가짜 허수아비와 싸웠다는(雍生員鬪一芻偶), 맹랑한 이야기 맹랑촌에 퍼졌네(孟浪談傳孟浪村), 부처님 영험 실린 부적 아니었다면(丹?若非金佛力), 진짜 가짜를 그 누가 알아냈으리(疑眞疑假竟誰分).”라고 언급되어 있다.
‘옹고집 타령’은 19세기 이후로 창의 전승이 끊겨 지금은 사설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글로 기록된 『옹고집전』의 이본은 현재까지 약 20종이 발견되었다. 각 편에 조금씩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줄거리는 어느 날 ‘가짜 옹고집’이 나타나 자신이 진짜라고 우기는 바람에 진옹(眞雍)과 가옹(假雍)이 한바탕 대결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옹고집은 마을의 큰 부자이지만 마음까지는 넉넉하지 못한 인물이다. 좌수 또 생원 신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가계가 불확실하게 서술되어 있기도 해서 부를 기반으로 신분 상승을 한 부민(富民)을 형상화한 인물로 추측된다. 옹고집은 부모에게 큰 재산을 물려받고서도 부모가 병들자 내다 버릴 생각을 하는 불효막심한 자이며,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에게 큰 창피를 주어 쫓아내는 인정머리 없는 자이다. 그를 훈계하기 위해 한 도승이 짚단에 혼백을 불어넣어 가옹을 만들어내는데, 가족들마저 그 가옹과 진옹을 구별하지 못하는 바람에 관청에 소를 제기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진짜 옹고집은 처참하게 패소하고 만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옹고집은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오만방자함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간의 행실을 뉘우쳐 새사람이 된다. 껍데기만 사람의 탈을 쓴 진옹이 ‘진짜 인간다운 옹고집’으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바로 ‘옹고집 타령’인 것이다.

가옹과 진옹이 벌이는 한 판의 ‘기억 경쟁’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진옹과 가옹을 구별하는 핵심에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가옹 때문에 옹고집의 주변인들도 모두 덩달아 야단이 난다. 아내·딸·며느리·형방·원님·친구 등 숱한 사람이 누가 진옹인지 가리기 위해 머리를 맞댄다. 옹고집에게는 주민등록증도, 얼굴 인식 기능을 갖춘 휴대전화도 없다. 유전자 검사와 같은 현대 과학기술을 활용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진짜를 가려낼 것인가?
먼저 옹고집의 아내는 언젠가 남편의 도포 자락에 불똥이 떨어져서 구멍이 난 일을 떠올리며 두 옹고집의 도포 자락을 들춰보고, 며느리는 시아버지 두상에 난 백발의 위치를 확인해 본다. 그러나 외모나 행색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가옹이 도술을 부려 백발을 붙여버리거나 도포에 똑같은 자국을 내기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은 누가 더 옹고집의 삶을 잘 ‘기억’하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때 가옹은 ‘진짜 옹고집’이라야만 알 수 있는 사적인 기억들을 낱낱이 과시하듯 펼쳐 보인다. 며느리가 시집올 때 가져온 놋그릇이 결딴나 벽장에 넣어둔 일, 이웃집 최 서방과 돈거래를 했던 일, 아내에게 어떤 말로 사랑 고백을 하고 혼인까지 하게 되었는지 등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관청에 가서는 곡식과 닭, 병풍이나 비단·모시·명주, 심지어 신발까지 자신의 세간을 한 치 오류도 없이 고한다. 진짜보다 더 완벽하게 옹고집의 삶을 ‘기억’한 가옹이 승소한다.
여기서 우리는 신체의 특징이나 행색이 아니라 바로 ‘기억’이, 나를 나로 또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보는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나다움, 또는 인간다움의 기준은 단순한 신체의 분열이나 복제를 넘어선 정신적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은 기억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망각의 동물이기도 하다. 결국 진옹은 가옹이 과시하듯 꺼내 놓는 ‘기억’들 앞에서 자신이 졌음을 씁쓸하게 인정한다.

현대에도 계속되는 ‘가옹’과 ‘진옹’의 대결

이처럼 진가쟁주 구도를 통해 ‘인간다움’을 고민하는 방식은 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가 대표적이다. 광해군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광대인 하선이 왕의 대역으로 나서는데, 허균의 감독 아래 광해군의 말투나 걸음걸이, 행색을 익혀 완벽한 ‘가짜 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를 담는다. 문제는 가짜 왕인 하선이 진짜 광해보다 더 ‘왕다운’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냉정하고 난폭한 진짜 왕과는 달리 따뜻하고 인간미가 느껴지는 가짜 왕, 그리고 그가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큰절을 올리는 신하들의 모습은 ‘왕다움’, 나아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한편 영화 <아일랜드>(2005), <블레이드 러너>(2017), <서복>(2021) 등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복제인간’의 삶을 그려내는 동서양의 영화에서도 또한 진가쟁주의 구도가 포착된다. 다만 이 영화들은 짚으로 만든 가옹 대신 ‘가짜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로봇’을 등장시켜 결국 인간 됨, 또는 인간성이란 무엇으로부터 증명되는지 고민하고 있다. ‘나다움’과 ‘인간다움’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옹고집 타령’은 단순히 잊혀가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그림. 김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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