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일곱

국립창극단 <귀토>
소박하지만 옹골찬 무대
무대는 앞으로 쏟아질 것처럼 경사져 있다. 와글와글 소란해진다 싶더니 국립창극단 배우들이 등장한다. “저 언덕 너머에서 공연하러 왔소이다.” 이쪽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투로 말을 잇는다. “아프냐? 고단하냐? 사는 게 그냥저냥이냐? 소리 한 자락 풀어내면 가슴이 뻥~ 뚫리더라.” 네모난 놀이판이 뚝딱 차려진다. “수궁가 하려다 살짝 바꿨습니다. 귀토!”

국립창극단이 지난해 6월 초연한 <귀토>는 사는 게 그냥저냥인 사람들 앞에 이렇게 나타났다. 제목은 ‘거북과 토끼’를 아우르는 귀토(龜兎)이자 ‘살던 땅으로 돌아온다’는 뜻의 귀토(歸土). 창극도 초연이 대중과 평단의 기대에 못 미치면 산송장이 되는 법인데, <귀토>는 오는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으로 돌아온다. 1년 만의 생환은 이 작품이 어떤 호응을 얻었는지 말해 준다. 귀토(歸兎)라 부르고 월계관을 씌워도 좋으리라.

토끼의 팔란(八難)

이 창극은 국립창극단 흥행작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고선웅·한승석 콤비가 합작했다. 판소리 수궁가를 현대적으로 비틀었는데 부제가 ‘토끼의 팔란(八難)’이다. 토끼가 육지에서 겪는 여덟 가지 고난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극본과 연출을 맡은 고선웅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토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수궁가를 뜯어고쳤다. 집을 헐고 다시 지은 것과 같다. 소리(공동작창 유수정·한승석)도 주요 곡조만 살리면서 새롭게 만들었다.
<귀토>는 토끼가 용궁을 탈출해 육지로 돌아온 수궁가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토끼의 아버지, 즉 토부(兎父)는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만 독수리에게 당한다. “고진감래가 아니고 흥진비래구나~”를 유언처럼 남긴다. 토끼의 어머니, 즉 토모(兎母)는 사냥총에 세상을 하직한다. 험하구나 산중살이여, 가련하구나 토끼 팔자여. 부모를 잃은 상실과 통곡, 세상에 대한 환멸 속에 토자(兎子, 토끼의 아들)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 미지의 세계가 바로 수궁이다. 토자와 함께 수궁으로 들어간 토녀(兎女)는 원작에 없던 새로운 캐릭터다. 그런데 맙소사, 뭍이나 물이나 거기서 거기다. 수중 생활도 고달프기는 매한가지. 토자는 수궁에서 또다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한다. <귀토>는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고 고난을 견디며 한층 성숙해져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의 가치

골격이 영웅 서사를 닮았다. <귀토>가 끌어낸 공감의 밑바탕에는 시의성이 있었다. 이 창극은 경제 불황과 정치 불안, 코로나 사태 등으로 몸도 마음도 지친 사람들을 끌어안고 위로했다. 아울러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주었다. 살아 돌아온 당신과 나는 창극 <귀토>를 보러 남산 언덕길을 힘차게 올라갈 참이다. 우리 모두가 진짜 영웅이다.
초연 무대를 떠올려 본다. 뒤집혀 발버둥질하며 “자라 살려!”를 외치다 잠드는 자라, 암자라에게 집적거리는 남생이를 꿈처럼 겹쳐 보여주는 장면은 익살스럽다. 괴질로 죽어가는 용왕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속도감이 돋보인다.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슬쩍 밀어 넣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라” “절대 의심하지 마라” 충고하는 장면에서 객석은 웃음바다가 된다. 주꾸미는 자라의 계획이 실패해 차라리 용왕이 죽기를 바란다.

세련된 창극의 탄생

창극은 본디 연극성이 강하다. 말 한 마디, 노래 한 자락으로 시공간을 넘나든다. 배우들은 마음껏 놀 수 있다. 상좌를 정하는 장면, 토자와 토녀가 난생처음 바다라는 것을 보고 갈매기와 대화하는 대목, 이들이 수궁에 도착하는 장면 등은 어제 본 것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간결하고 기능적이면서도 미학적인 무대디자인(이태섭)도 매력적이다. 동시대와 함께 숨 쉬는 세련된 창극의 탄생이다.
<귀토>는 판소리를 몰라도 가슴이 뻥 뚫리는 밝은 창극이다. 훅 슬퍼지고 훅 즐거워진다. 자라, 주꾸미, 전기뱀장어 등 동물들의 몸짓도 각양각색 재미있다. “어서 배를 갈라라!” 명령할 때 토끼는 어떻게 위기를 모면할까. ‘제철 생선’과 ‘여독’이라는 말이 이렇게 절묘할 줄이야. 재치 넘치는 대사, 통통 튀는 언어유희가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한 흥겹고 풍성한 음악과 맞아떨어진다. 토끼가 삼재팔란에 우울증까지 더해 창(唱)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거듭 들어도 질리지 않으리라.
1막에서 “범 내려온다~” 대목은 짧아도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2막에는 호랑이춤이 등장했다. 마당극 형식에 빠른 장면 전환, 익살과 풍자. 창극은 상상하며 놀기 좋은 장르다. 전기뱀장어가 “안을 수도 없고 안 안을 수도 없는 전기뱀장어의 곤란함이여~” 하고 토로하는 대목에서 여지없이 폭소가 터졌다. 아무리 고달파도 희망의 끄나풀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도 좋았다. 관객이 몸을 들썩이게 하는 작품이다. “얼씨구” “잘한다” 같은 추임새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운차고 신명 난 기세

<귀토>는 참신했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관객은 토끼가 겪는 팔란에 깊이 감정이입 하면서도, 때로는 인물과 사건에 거리를 두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사는 재치가 넘쳤고 연출은 간결하고 담백했다. 고선웅은 군중 장면도 잘 뽑아냈다. 한승석은 ‘템포의 마술사’였다. 진양조로만 부르다 자진모리로 바꾼 ‘범피중류’를 포함해 다양한 장단을 활용하며 템포에 변화를 주었다. 파도치는 풍광을 소리꾼들의 구음과 소리로 표현한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주인공 토자와 자라를 연기한 국립창극단의 대표 스타 김준수와 유태평양도 박수를 받았다. 소리꾼 38명이 기운차고 신명 난 기세를 전했다. 국악기로 편성된 15인조의 라이브 연주도 극의 분위기에 환상을 더했다. 안무가 지경민은 명무 공옥진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각양각색 동물들을 단순하면서도 특징적인 안무로 표현했다.

“잘 살아남으시게”

이 창극의 결론은 소박하지만 옹골차다. “잘 살아남으시게”다. 토끼는 성숙해져 집으로 돌아오고 무대에는 넉넉한 웃음 같은 달항아리가 떠올랐다. <귀토> 창작진은 동시대 관객을 창극으로 어떻게 만날지 고민했고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지만 흥미롭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귀토>는 말 그대로 잘 살아남았다. 이번 재공연은 대본과 음악을 손질해 더 시원한 풍자와 웃음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썩 물렀거라 폭염이여. <귀토>에는 가을을 예고하는 청량감이 있다. 언덕 너머에서 토끼가 온다. 국립창극단의 복덩이가 온다.

글. 박돈규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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