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다섯

2022-2023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_국제교류
시적 세계의 목격
국립극장 2022-2023 시즌 공연 중 국제 교류를 통해 국내에 선보이는 해외 작품 네 편을 소개한다. 먼저 세계 최정상급 공연을 스크린으로 즐기는 시간, NTOK Live+의 뉴 시즌이 시작된다. 9월 한 달간 선보이는 세 편의 작품은 연극의 장대한 역사 속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이 남긴 불후의 명작이다. 이어서 내년 5월에는 ‘무대 위의 시인’이라 불리는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Dimitris Papaioannou)의 작품 <잉크(INK)>가 달오름 무대에 오른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연출로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은 디미트리스의 독보적인 상상력과 초현실적 미학이 어우러지는 시적 세계를 두 눈으로 목격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마침내 빛나는 왕관을 쓴 키트 해링턴 NT Live <헨리 5세>

NT Live <헨리 5세> ⓒHelen Murray

NT Live로 공개되는 <헨리 5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남긴 10편의 역사극 가운데 영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1413년 26세의 나이로 왕위에 등극한 헨리 5세는 9년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을 기록하고 35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이토록 빨리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젊은 왕을 지극히 사랑한다. 아버지 헨리 4세 때부터 이어지던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중에 즉위한 헨리 5세는 이 기나긴 피의 나날을 종식하고 영국에 승리를 안겨준 왕이기 때문이다. 즉위한 지 2년 만인 1415년, 프랑스로 쳐들어가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의 왕 샤를 6세(Charles VI)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 저 유명한 아쟁쿠르(Azincourt) 전투다. 우리가 세종대왕을 그저 ‘왕’이라 부르지 않고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처럼, 영국인들에게 헨리 5세 역시 단순히 ‘King’ 이 아니라 ‘The King’이라 추앙받는 이유다.
셰익스피어는 1599년 헨리 5세를 무대로 불러낸다. 영국의 통합과 번영을 이끌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세에서 셰익스피어는 헨리 5세를 비범하고 용감하며 지혜롭고 관대한 인물로 소환해 냈다. 하지만 ‘전쟁의 신’인 헨리 5세의 이면은 아버지 헨리 4세의 신임을 받지 못해 버려진 장자였으며 친구들을 살해하면서까지 왕위를 지켰던 잔인한 왕이자, 전쟁으로 초토화된 프랑스 국민에게는 폭군의 상징으로 점철된다. <헨리 5세>는 탕자에서 왕이 되는 청년의 지독한 성장통의 기록과도 같다.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은 그동안 수많은 영화와 연극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에 의해 수없이 변주되었다. 셰익스피어의 현신이라 불렸던 로런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부터 케네스 브래나(Kenneth Branagh), 최근 영화의 주인공 티모테 샬라메(Timothee Chalamet)까지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HBO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의 키트 해링턴(Kit Harington)이 칼을 뽑아 들었다. 우수에 젖은 글루미한 매력을 풍기는 해링턴은 실제로 스튜어트 왕가 찰스 2세(Charles II)의 후손. 프랑스와 아쟁쿠르 전투를 앞두고 헨리 5세가 군인들 앞에서 연설하는 4막 3장의 ‘성 크리스핀 데이의 연설(St. Crispin’s Day Speech)’은 해링턴의 입을 통해 더욱 비장하게, 그리고 더욱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이다. “적은 우리, 적지만 행복한 우리, 우리는 형제들이다!(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한국 관객과도 친숙한 연극 <레드>, NT Live <코리올라누스>, 뮤지컬 <어쌔신> 등 혁신적이면서도 탄탄한 작품의 산실인 런던 ‘돈마 웨어하우스(Donmar Warehouse)’가 제작한 작품으로, 셰익스피어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데 탁월한 맥스 웹스터(Max Webster)가 연출로 참여한다.

금기되었던 무대를 연다 Pathe Live <타르튀프>

Pathe Live <타르튀프> ⓒJan Versweyveld

문제작 <타르튀프>도 금기의 문을 열고 드디어 한국 관객과 만난다. 웃음으로 관습의 허위와 이성의 무게를 깨트린 희극의 표상,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caise)가 제작하고 Pathe Live(파테 라이브)를 통해 선보이는 이번 공연은 고전을 혁신적으로 재해석하는 이보 반 호프(Ivo van Hove)가 연출을 맡아 더욱 기대를 모은다.
1664년 5월, 베르사유 궁전의 축성을 기념하는 ‘열락의 섬 축제’ 현장. 몰리에르(Moliere)의 <타르튀프>가 최초로 무대에 올랐다. 성직자들은 17세기 당시 부패한 종교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이 연극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연극 애호가이자 몰리에르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던 루이 14세(Louis XIV)도 그들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이 작품은 이후 5년에 걸친 부단한 투쟁과 수차례의 수정을 거듭하면서 1669년 마침내 공연과 출판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연극사에서 이처럼 수난을 당한 작품이 또 있을까.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극작가이자 배우인 몰리에르의 문제작 <타르튀프>는 프랑스에서는 가장 유명한 연극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위선적인 주인공이자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타르튀프’는 ‘위선자’라는 뜻의 일반명사로 사용될 정도다.
코메디 프랑세즈는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 기념작 <타르튀프>의 연출에 이보 반 호프를 지명했다. 몇 차례의 NT Live와 <로마 비극> 등 내한 공연을 통해 그의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도 낯익다.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ITA) 예술감독으로 유럽 연극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출가로 손꼽히는 이보 반 호프는 현대 연극 흐름에서 하나의 현상처럼 자리매김한다. 올해 1월 코메디 프랑세즈의 <타르튀프> 무대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유다.
이번 <타르튀프>는 1664년에 단 한 번 무대에 오른 초연 버전을 역사가 조르주 포레스티에(Georges Forestier)가 복원해 낸 것이라니,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 위선자 타르튀프가 부르주아 오르공 가족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아내, 그리고 재산까지 빼앗는 과정에서 당시 종교의 경직성과 이중성, 그리고 허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웃음을 두려워한 중세 기독교 사상 속에서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포착해 내어 희극을 그리스비극에 버금가는 위치에 올려놓은 몰리에르의 문제작을 만나볼 시간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우리 집 ITA Live <입센의 집>

ITA Live <입센의 집> ⓒJan Versweyveld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ITA)은 연출가 사이먼 스톤(Simon Stone)과 손잡고 입센의 여러 희곡을 섞어 새롭게 탄생시킨 <입센의 집>을 선보인다. 예술감독 이보 반 호프가 이끄는 ITA는 ‘유럽 컨템퍼러리의 최전선’이라는 명성대로 매번 화제를 몰고 오는 만큼 ITA Live로 소개되는 <입센의 집>도 놓칠 수 없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이전에는 연극의 주제로 삼지 않았던 다양한 사회적 의미에 시선을 돌려 현대적 사실주의 연극을 개척해 나간 작가다. 입센이 없었더라면 현대 연극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작가와 연출가, 그리고 배우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현대 연극사의 이정표와도 같은 입센의 다양한 작품 속 인물은 연출가의 상상력에 의해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사는 대가족의 서사로 재탄생한다.
2017년 초연된 이 작품은 사이먼 스톤과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ITA)의 세 번째 협업 결과다. 스톤은 고전을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로 완벽하게 재해석해 내는 연출가다. 우리는 지난 NT Live 시즌에서 상영한 <예르마(Yerma)>를 통해 스톤의 장기를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의 과감하고 흡입력 있는 연출이 예르마의 진폭 넓은 감정을 완벽하게 전달한 빌리 파이퍼의 연기력으로 완성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스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입센의 작품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작품을 구성했다. 입센을 잘 아는 관객이라면 『인형의 집』 『헤다 가블러』 『유령』 『건축가 솔네스』 『민중의 적』 등 그의 주요 희곡들을 연상하며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입센의 집> 속의 방들은 트라우마와 대립의 장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 기억이 가득한 공간이기도 해요. 입센의 작품들은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스며 있어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들이죠. <입센의 집>은 결국 어떻게 우리가 계속해서 삶을 지속해 나갈지, 어떻게 우리가 다시 보통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무대 위의 시인,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잉크>

<잉크>ⓒJulian Mommert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을 거대한 호수로 만들고 한 소년이 대형 종이배를 타고 입장하는 아름다운 개막식 연출로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2020년 작 <잉크>가 한국 관객에게 소개된다. 2017년 <위대한 조련사(The Great Tamer)>로 내한해 깊은 인상을 남긴 그의 무대를 기다려온 팬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파파이오아누의 압축미와 간결미가 돋보이는 연출 속에 흐르는 그리스 신화의 정서는 독보적인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1964년 그리스 아테네 태생인 파파이오아누는 모든 무대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연출가·안무가·배우·무대디자이너·의상디자이너·조명디자이너로 활동한다. 그 바탕에는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화가와 만화가로서 일찍이 실력을 인정받은 남다른 이력이 있다. 1986년 에다포스 댄스 시어터(Edafos Dance Thatre)를 창설한 그는 17년간 피지컬 시어터, 실험적인 무용 공연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리스 공연예술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무대 위의 시인’이라 불리며 전 세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잉크>는 지난 팬데믹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작품이다.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와 슈카 호른(?uka Horn)은 2020년 초 아테네 오나시스 스테기(Onassis Stegi)에서 초연 무대를 올리려 했지만 모든 것이 록다운(lockdown)되었다. 작품은 그해 9월로 미루어졌지만 그동안 작품은 한층 더 성숙했다. 무대 위 판타지한 세계 속에서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만남과 충돌은 야만적인 의존성을 보여주고, 비주얼아트와 뒤섞이는 몸의 움직임은 시적인 리듬의 미장센을 창조해 낸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쏟아붓는 물줄기는 사운드와 움직임을 이끌어내며 감각을 자극한다. “질문을 던질 뿐 답은 주지 않는다. 최소한의 도구로, 최대의 시적 감성을 자아낸다.”라는 디미트리스의 말처럼, 관객은 상상력과 초현실적 미학이 어우러지는 시적 세계를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될 것이다.

글. 최여정 무대를 사랑하고, 보고, 쓴다. 저서로는 『이럴 때, 연극』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가 있으며, 좋은 공연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유튜브 ‘문발살롱’을 진행한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