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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다움’을 정의하는 작가, 이수지
이수지 작가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Hans Christian Andersen Award) 수상을 두고 그림책 애호가들은 “내 생애 이런 역사적 순간을 함께하다니 이수지 작가와 동시대에 산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편 그림책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이 왜 그토록 중요하고, 이수지 작가가 어떤 이유로 세계적 거장들 곁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는지 소개해 보려 한다.
이수지 작가 ⓒ비룡소
2022년 3월 21일, 이탈리아 볼로냐도서전의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기자회견에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그림작가 부문 수상자로 한국의 이수지가 호명된다. 3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축전을 통해 그림책이 형식적 실험을 계속하는 예술 장르라는 사실, 어른과 어린이 모두를 향해 사랑과 희망을 말하는 매체라는 사실을 꼼꼼히 짚어준다. 그림책을 문화예술 장르로 조명한 적 없던 많은 매체에서 수상의 의미를 해석하고 전한다. 서점가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수지 작가의 최신작 『여름이 온다』가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등극하고, 『파도야 놀자』『이수지의 그림책』『선』『강이』 등 과거 책들까지 모두 역주행하며 베스트셀러 순위에 든다. 세계 어린이책의 날인 4월 2일, 이수지 작가 요청으로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KBBY)가 주관하는 ‘작가와의 만남’ 줌 토크가 열린다. 세계 그림책 시장에 우리 작가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써온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의 희생과 노력도 함께 조명받는다.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이수지 작가 수상 장면 유튜브 라이브 생중계 ⓒ비룡소

아동문학의 노벨상

1956년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가 제정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은 아동문학 발전에 공헌한 글, 그림 작가를 2년마다 선정해 시상한다. 전 세계 회원국 80여 국가에서 자국 대표를 1명씩 선정해 1차 본심에 올리면 다국적 심사위원 10명이 1년의 심사 과정을 거쳐 최종 수상자를 결정한다. 노벨문학상이나 볼로냐 라가치 상처럼 책 한 권에 수여하는 것이 아니고, 작가가 일생에 걸쳐 해낸 작업을 모두 검토하는 데다 국가 대항전 성격도 띠기 때문에 추천과 심사 과정이 길고 엄정하다. 올해 10명의 심사위원에 유일하게 아시아인으로 포함된 이지원 연구자가 밝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의 심사 기준은 아래와 같았다.

1.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글과 그림일 것.
2. 어린이를 참여시키고 어린이의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을 북돋울 것. 어린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할 것. 거짓된 ‘어린이스러움’을 표출하지 않을 것. 교훈 말고 공감을 추구할 것.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열린 작품일 것.
3. 독자를 사로잡고 독자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 있을 것. 다양한 예술적 표현이 담길 것.
4. 부자연스러운 문화 요소를 사용하지 않을 것. 작가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세계를 조망할 것.
5. 일생 동안 지속적으로 작품을 새롭게 혁신하고 발전시켜 온 작가일 것.
6. 앞으로의 창작 활동을 통해 그림책에 공헌할 여지가 있는 작가일 것.


이토록 까다로운 심사를 뚫고 수상자로 이름을 올린 역대 작가의 면면을 보면 상의 무게가 한껏 다가온다. 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 요르크 뮐러(Jorg Muller), 토미 웅게러(Tomi Ungerer),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 퀜틴 블레이크(Quentin Blake)…. 그림책 발전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가들이다. 50년 뒤, 100년 뒤에 그림책 역사를 쓴다 해도 언제나 언급될 작가들. 그러니까 이수지 작가는 한국 그림책 역사뿐 아니라 세계 그림책 역사 한복판에서 장르를 혁신하는 중이다.

  • 『여름이 온다』표지 ⓒ비룡소
  • 『물이 되는 꿈』표지 ⓒ청어람미디어

감정과 기분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그림책

오랫동안 한국의 검색 포털사이트에서 이수지 작가 이름을 검색하면 ‘동화 작가’라는 직업명이 따라왔다. 그간 그림책 작가를 ‘그림동화 작가’ 혹은 ‘아동문학가’라고 호명하는 일이 잦았다. 한국 포털사이트가 이용하는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 직업 분류에 ‘그림책 작가’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책 장르의 사회적 제도적 인식 향상을 위해 2016년 작가, 연구자, 출판인, 활동가가 모여 그림책협회를 만들고 꾸준히 개선을 요구한 것이 ‘그림책과 그림책 작가를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것이었다. 이수지 작가의 안데르센 상 수상에 힘입어 비로소 2022년 4월 21일 ‘그림책 작가’ 직업이 공식 등재되었다.
이수지 작가의 성취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동화와 그림책은 엄연히 다른 장르다. 동화는 문학의 한 분류로 타깃 독자를 연령으로 구분한다. 아동문학이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문학이기에 글이 중요한 표현 도구이며, 그림이 없어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반면 그림책은 회화, 만화, 영화와 이웃한 시각예술로 그림이 주된 표현 도구이다. 글보다는 그림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실제로 이수지 작가의 작품 다수가 글 없는 그림책이다. 어린이를 1차 독자로 상정하지만, 문자 언어 시스템 뜰채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이 세계의 신비, 애매모호함, 불가사의, 판타지를 보여주기에 연령과 상관없이 고유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일례로 이수지 작가의 『여름이 온다』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의 3악장을 시각화한 책이다. 여름날 서로에게 물풍선을 던지며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몸짓과 표정, 비발디를 연주하는 실내악단 연주자들의 격렬한 움직임,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가 만들어내는 다이내믹한 정경의 변화를 화폭 안에 담았다. 이수지 작가의 드로잉은 간결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감각은 더없이 정확하고 풍성해서 곧장 독자에게 전달된다. 작가가 이런 목표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아이의 옆모습에서 뺨이 살짝만 부풀어 올라도 둥그스름한 선에서 표정이 전해지잖아요. 굳이 그 아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 선을 그려낼 수 있으면 감정도 담아낼 수 있다고 믿어요.”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인터뷰 중

클래식 연주에서는 악장이 바뀔 때, 객석에 앉은 청중이 자세를 고쳐 앉는다. 새로운 악장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대감의 표현이다. 이 감각을 종이책으로 구현하기 위해 이수지 작가는 책을 세 챕터로 나누고 지류부터 드로잉 도구, 표현 기법, 시각적 모티프를 바꾸었다. 『여름이 온다』에서 아이들이 쏘아 올린 물줄기, 폭죽처럼 터지는 웃음, 쏟아지는 소나기 드로잉을 눈으로 훑다 보면 신기하게도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 시선에 리듬감이 부여된다. 148쪽 분량의 무대(지면) 위에서 독자는 눈으로 청각적 경험을 한다.
『물이 되는 꿈』은 루시드폴의 음악을 5미터짜리 아코디언 북으로 옮긴 작품이다. 책은 사각형의 펼침면 단위로 페이지가 분절되고 처음과 끝의 개념이 명확하다. 반면 물의 속성은 그렇지 않다. 유연하게 이어지며 흐른다. 이런 물성을 종이책으로 옮겨내기 위해 이수지 작가는 병풍식으로 모든 페이지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5미터 지면의 맨 왼쪽 끝과 맨 오른쪽 끝에 어떤 어린이를 한 명 그려 넣었다. (직접 확인하는 독자의 기쁨을 뺏지 않기 위해 이렇게만 말해 둔다.) ‘물이 되는 꿈, 꽃이 되는 꿈, 씨가 되는 꿈, 풀이 되는 꿈, 강이 되는 꿈, 빛이 되는 꿈…’으로 이어지는 루시드폴의 가사와 푸른빛 물감으로 그려진 물의 이미지가 순한 서정시로만 읽히지 않도록 현실의 시간 감각과 환상의 시간 감각을 절묘하게 중첩했다.

  • 『여름이 온다』내지 ⓒ비룡소
  • 『물이 되는 꿈』내지 ⓒ청어람미디어

그림과 책으로 현실과 환상을 직조하는 이수지

누군가 나에게 이수지 작가가 왜 뛰어난 작가냐고 묻는다면 “가장 그림책다운 작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글과 그림이 상호작용한 내용을 펼침면 위에 구성하고 일련의 페이지를 엮어 작품을 완성한다는 측면에서 그림책은 만화, 그래픽 노블과 다른 점이 없다. 하지만 나머지 두 장르에는 없고, 그림책에는 있는 고유한 미덕이 있다. 바로 ‘책이라는 사물이 갖는 물성’이다.
소설, 시, 수필, 만화 등 책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여타의 예술 장르는 읽기 환경을 바꾸어도 작품에 내재한 고유한 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만화책’에서 ‘만화’와 ‘책’을 분리해도 만화가 가진 고유한 빛은 남는다. 소설책도 그렇다. ‘소설책’에서 ‘소설’과 ‘책’을 분리해도 소설이 가진 고유한 빛은 남는다. 그림책은 그렇지 않다. 그림책에 내재한 고유한 매력은 책의 물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판형, 지류, 제본 방식, 후가공 등 제책 요소가 모두 작가의 창작 재료로 쓰이는 유일무이한 예술 장르가 그림책이다. 이 지점에서 이수지 작가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이수지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경계 3부작’-『거울 속으로』『파도야 놀자』『그림자 놀이』-은 동일한 판형에 책이 열리는 방향만 다른 글 없는 그림책이다. 이 작업에서는 펼침면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제본 선이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 닫혀 있던 표지를 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움직이고, 페이지를 넘겨 다음 펼침면을 대면하는 행위로써 서사가 촉발된다. 종이책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연출이다. 멕시코의 개념미술가이자 북아트 이론가 울리세스 카리온(Ulises Carrion)은 에세이 『책을 만드는 새로운 예술』에서 이렇게 썼다.

“일반적인 견해와 반대로 저자는 책을 쓰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텍스트를 쓴다. 책 창작은 기호들의 평행한 순차를 창조함으로써 이상적인 시공간의 순차를 실현하는 작업이다. 이 새로운 예술을 읽기 위해서는 책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요소들과 그들의 기능을 이해해야 한다.”

이수지의 그림책은 잘 그린 그림과 훌륭한 문장이 있다고 뚝딱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문학과 미술의 중간지대에서 연약하게 피어나 독립 장르로서 영토를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전히 많은 오해를 견뎌야 하는 그림책이 어떤 미학적 문법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가져야 하는지 선명하게 가리킨다. 그래서 그림책 애호가들이 이렇게 감격하는 것이다. “이수지 작가와 동시대에 산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해”라고.

글. 최혜진 미술 에세이스트, 그림책 평론가.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우리 각자의 미술관』『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등의 책을 쓰고, 『album[s] 그림책 : 글, 이미지, 물성으로 지은 세계』『세네갈의 눈』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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