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선율

마음의 선율 국립국악관현악단 피리 수석 강주희와의 대화
한 폭의 수묵화를 닮은
‘감정의 집’
5월의 ‘마음의 선율’은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함께한 지 20년 차에 접어든 피리 수석 강주희와 함께한다. 그가 소개하는 음악은 물줄기가 하나둘 모여들어 하나의 거대한 강을 이루는 듯한 최지혜의 ‘감정의 집’이다. 곡 안에서 돋보였던 피리·태평소의 활약부터 연주가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까지, 폭넓게 이어진 대화를 소개한다.

최지혜 작곡가의 ‘감정의 집’은 “한국의 크고 작은 강을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집으로 상상하며 작곡한 작품”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연주하신 곡이기도 한데요.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감정의 집’은 작곡가가 임진강에서 놀라운 자연현상을 보고 영감을 받은 이후, ‘강’이라는 주제를 잡아 크고 작은 강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 곡입니다. 제가 느끼는 최지혜 작곡가의 강점은 정말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에요. 이와 더불어 듣는 사람들이 여러 감정 변화를 느끼게끔 만들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곡이어서 그런지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도 초연 이후에 꽤 많이 연주됐었습니다. 단원 입장에서도, 지휘자 입장에서도 욕심나는 곡이고 그만큼 대중성 있는 곡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사람들도 좋아하는 곡을 제 입장에서 풀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이 곡을 소개하게 됐습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두 번째 상주 작곡가셨죠. 작곡 과정이나 리허설 때는 어땠나요?

워낙 국악을 오래 하셨고, 또 저희의 속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뭘 특별히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배경을 잘 아는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굉장히 자연스러웠어요.

작품 제목 중 ‘감정의 집’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연주하시며 어떤 감정을 느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이 곡을 연주하며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1악장에선 곡이 웅장하게 시작한 뒤에 서정적이고 유려한 선율이 흐르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 가락이 관현악으로 점점 쌓여갑니다. 처음에 피리에서 시작된 주제 선율이 다른 악기들로 이어지며 하나둘 더해질 땐 ‘우리 모두가 하나예요’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게 풍성하게 확장되는 과정이 매력적이었죠.

그러다 2악장에선 악기의 조합이 계속 바뀌면서 같은 프레이즈가 반복됩니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요. 처음엔 작은 강줄기로 시작한 흐름이 큰 강줄기로 이어지고, 이게 쌓여가는 과정이 저에겐 수묵화를 그려나가는 과정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2악장에선 감동적인 부분도 꽤 많았고, 마음도 편안해졌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정적일 수 있는데 그런 서사적 흐름을 최지혜 작곡가가 참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1악장에선 피리와 태평소의 역할이 눈에 띄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우선 태평소 부분을 말씀드리자면, 태평소는 곡 전체에서 많이 나오진 않아요. 1악장에서 딱 아홉 마디 동안 나오고, 곡 전체 마지막 엔딩을 장식하는 부분에 나오는데 특히 전 1악장에서 태평소가 ‘신 스틸러’처럼 강렬하게 등장했다가 사라지게끔 하려 했어요. 그리고 처음 곡을 접했을 때 음표에 충실하되 조금 자유롭게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주안점을 두며 연주했습니다.

태평소 솔로 아홉 마디

또 이 곡이 메나리토리에 의한 곡이라 전통 어법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 있는데, 아무래도 전통음악에서는 피리가 이끄는 역할을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1악장에서 피리가 처음 가락을 들려줄 때도 ‘우리가 이런 음악을 시작할 거다’라는 큰 틀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곡 전체적으로 메나리토리 어법에 맞는 가락과 즉흥적인 느낌을 잘 살리려 했고, 어떤 부분에선 ‘음악의 표정’을 보여줘야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럴 때 정말 긴장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3악장의 경우 악보대로만 연주하면 너무 정직해서 느낌이 잘 안 살죠. 그래서 농현의 강도와 빈도를 좀 높이고, 메나리토리의 맛을 낼 수 있는 가락들도 조금 더했어요. 어떤 음들은 또박또박 연주하기보다는 좀 버리고 흐르듯이 연주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고요. 그런 부분을 조금씩 알게 되며 연주가 점점 깊어지더라고요. 특히 태평소는 솔로 악기고, 피리도 드러나야 하는 부분이 크지만 감춰져야 하는 부분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피리가 드러나야 할 때, 어떤 의도를 갖고 어떻게 드러날지를 고민하는 편이에요.

피리 파트보 3악장 246~254마디

‘표정’을 잘 보여줘야 하는 부분은 어딜까요?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요(웃음),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끌고 가야 하는 부분이었어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조용히 시작되지만, 같은 음을 반복하는 와중에 표정 변화를 만들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영역이 확 넓어지는 듯한 인상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연주할 때도 이 부분이 지난 뒤에야 좀 안도하기도 했었습니다.

피리와 태평소 부분 외에도, 곡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는 어떤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았나요?

말씀드린 것처럼 수묵화를 상상하게 했던 2악장의 초반부예요. 선이 하나둘 합쳐지고 음향이 더해지니까 먹이 진해지고, 두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도 아주 강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여백을 주는 거죠. ‘우리 진짜 하나야’라는 걸 알려주면서, 특유의 아름답고 진하고 감성을 울리는 선율도 들려줘요. 그렇게 여유롭게 음악을 쌓아가는 이 부분에서 작곡가의 강점이 다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긴장감을 갖고 표정 있게 연주해야 하는 1악장 총보

또 이 곡은 연주자에게 여지를 많이 열어주는 편이에요. 애초에 작곡가가 가락을 그렇게 짜셨고, 가락에서 국악기 특유의 시김새로 맛을 내며 연주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연주할 때도 좀 더 재밌게 할 수 있었고 들으시는 분들도 그만큼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반적으로 국악적인 전통 어법을 기반으로 했다는 느낌이 확실하더라고요.

2018년 월간 『미르』와 인터뷰하면서 창작음악의 매력은 ‘해석’에 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관현악곡 안에서도 그런 매력을 찾으셨군요.

물론 약속된 선율 안에서 움직이는 곡들도 있죠. ‘감정의 집’에서도 굉장히 타이트하게 연주하면서 악보대로 지켜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아까 제가 표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표현한 부분은 정말 철저하게 움직여야 하는 부분이 맞아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말씀드린 3악장의 피리 파트 경우는 연주자가 그 맛을 잘 살려야 하죠. 그런 여러 측면이 이 곡에 다 고루 들어 있었어요.

올해가 국립국악관현악단 입단 20주년입니다. 그간 여러 작품을 연주해 오셨을 텐데 그중 특히 마음이 동하는 음악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어떤 곡은 연주가 끝난 뒤에도 며칠간 제가 그 선율을 허밍하듯 흥얼거릴 때가 있어요. 몸이 기억하는 음악이 있는데, 그런 곡이 제일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율이 아름다운 곡만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선율이 주는 본능적 효과가 있는 것 같고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장르를 연주하고 다양한 느낌을 다 좋아하기 때문에 굳이 장르를 가리진 않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선율적인 매력과 추상적 구조 등 여러 측면이 조화를 이루는 곡이 좋죠.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일하면서 정말 좋다고 자부하는 건 매우 다양한 장르를 소화한다는 점이에요. 저희가 시도하는 여러 방향 중에서 이건 아니다, 저건 어떻다 등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렇게 해보면서 저희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전통음악이라는 장르 안에서 세분화된 장르가 생성되는 거잖아요. 어떤 것들이 더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건지, 전통음악에 어떻게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저희가 그런 구조를 만드는 것 같아요. 또 저는 오래 살아남는 음악이 좋은 음악이라고도 생각하는데, 백대웅 작곡가의 ‘남도아리랑’이 딱 그런 곡이지 않을까 싶어요. 시간이 많이 흘러도 ‘그 곡은 정말 좋았다’라고 생각되는 것이 명곡이지 않을까요.

언급해 주신 곡들과 더불어 또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장석진 작곡가의 ‘목멱산’도 선율이 주는 감동이 커요. 중간에 친숙한 새타령 선율도 나오고요. 또 김성국 작곡가와 정일련 작곡가의 음악도 참 좋아하는데, 특히 구조적으로 짜임새가 좋다는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김택수 작곡가도 다음에는 또 어떤 곡을 쓰실지 궁금합니다.

‘국악관현악’에 대한 생각을 자유롭게 들려주세요.

굉장히 다양한 음악 방향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만큼 숙제도 고민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요즘 작곡자들이 생각하는 기획 의도에 비해 국악기는 고전적 음향을 지니고 있어요. 막연히 다들 개량해야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말 개량돼야 할까, 아니면 악기 본연의 울림을 잘 살릴 수 있는 곡을 써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게 돼요. 물론 악기에 대해 더 깊게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요. 또 현대음악적으로 가는 경향도 없잖아 있는 것 같은데 이 중심을 저울질하는 게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건 작곡자의 몫인 거고, 그걸 연주로 잘 소화해서 완성도 높게 실현하는 건 지휘자와 악단의 몫인 거죠. 각자의 과제가 있을 텐데, 그런 부분들을 앞으로 꾸준히 함께 조율해 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모더레이터. 신예슬 음악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동시대 음악에 관한 의문으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음악학을 공부했고, 『음악의 사물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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