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하나

국립창극단 <춘향>
봄의 향기, 바람에 날리고
어지럽게 핀 봄꽃들이 마음마저 어지럽히는 시절. 그 꽃향기 담은 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건드리는 계절. 바야흐로, 상춘(賞春)의 계절, 봄이다. 이 봄에는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국립극장에서 <춘향>과 함께 봄의 향기(春香)에 한껏 취해도 좋을 듯하다.

당대 서양 여성보다 주체적이었던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雁隨海 蝶隨花 蟹隨穴)
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고전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서양의 고전이라면, 우리의 고전은 단연 『춘향전』일 것이다. 조선 시대에 가장 사랑받았던 작품 중 하나로 『춘향전』을 꼽을 수 있다. 100종이 넘는 이본은 그 인기를 증명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이처럼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젊은 남녀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라는 사실은 가장 앞에 놓여야 할 것이다. 두 청춘남녀의 만남에서부터 이별, 그리고 재회까지 『춘향전』은 이 통속적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한다. 춘향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에 성공한다는 면에서, 서양의 신데렐라 신드롬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춘향에게서는 한결 주체적인 여성상을 엿볼 수 있다.
남원 부사의 아들 몽룡이 광한루에서 그네 뛰는 춘향을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그는 춘향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몽룡에게 춘향은 노류장화(路柳墻花) 월매의 딸이었을 뿐이다.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길가에 핀 버들이나 담 아래 핀 꽃처럼 춘향 또한 기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몽룡이 방자를 시켜 춘향을 부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때 춘향이 몽룡의 청을 거절하며 방자에게 전하라는 말이다. “안수해 접수화 해수혈(雁隨海 蝶隨花 蟹隨穴).” 풀면, ‘기러기는 바다를 따르고, 나비는 꽃을 따르고, 게는 굴을 따른다’라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주체적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여성상이라는 해석에 한 표를 던진다. 그렇다면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는 장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남원에 부임하자마자 만사 제쳐두고 기생점고(妓生點考)에만 몰두하는 변학도는 춘향부터 찾는다.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알 것이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며, 춘향은 이렇게 말한다. “충불사이군(忠不事二君)이요 열불경이부절(烈不更二夫節)을 본받고자 하옵는데, 연차 분부 이러하니 생불여사(生不如死)이옵고 열불경이부(烈不更二夫)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 (……) 충효열녀 상하 있소? 자세히 듣조시오! 기생으로 말합시다.”(『열녀춘향수절가』) 이 대목은 흔히 열녀 춘향의 의기로 읽힌다. 그러나 앞서 부사 자제의 청을 거절한 맥락에서 보면, 이는 몽룡에 대한 수절을 지키려는 한 여인의 수절기인 동시에 계급적 차별에 항거하는 기층민의 저항기로 읽힐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춘향은 서구의 여인보다 주체적 여성이라 볼 수 있을 듯하다.

넓어진 이야기, 깊어진 감정

이번 공연은 2020년 선보인 창극을 새롭게 다시 쓴 공연이다. 전체 방향은 이전 공연의 방향성을 그대로 따른다. 여기서는 초연 당시 김명곤 연출의 말을 가져와도 좋을 듯하다.
“그간 국립창극단은 ‘창(唱)’보다는 ‘극(劇)’에 방점을 뒀던 것 같아요. 이번에는 ‘창’이 중심인 작품을 선보이고자 했고, 전통 판소리를 기본기로 갖춘 창극단의 역량과 음악적 깊이를 잘 살려내려 했어요.”(국립극장 『미르』, 2020년 5월호 인터뷰에서)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는 “창극은 어디까지나 창이 위주가 되어야 한다”라며, “전통적인 맛을 살리고자 할 때는 무엇보다도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 소리의 맛을 살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초연 후 2년 만에 재연을 결정하고, 중극장 규모의 달오름극장에서 대극장인 해오름극장으로 무대를 옮겨오는 과정에서도 ‘소리에 집중’한다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음악감독 김성국 역시 ‘소리’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작업했다.
“판소리 감상에서 주요한 요소로 꼽히는 ‘선율’과 ‘장단’에 집중하기로 했다.(…) 창을 끌고 가는 소리의 힘을 살리되, 악기는 장단과 음색의 질감을 섞여서 효과를 준다.(…) 우리 음악의 고유한 특징을 청각적으로 경험하도록 돕는 것”(국립극장 『미르』, 2020년 5월호 인터뷰에서)

극장을 옮기면서 무대의 가로 길이가 2배 더 길어졌다. 깊이도 깊어졌다. 넓어진 무대만큼 내용과 출연진까지 보강되었다. 특히 지난 초연에서 시간상 부르지 못했던 춘향가의 일부 소리 대목을 추가해 더욱 풍성하게 판소리를 들려준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몽룡이 단옷날 나가기 전 글을 읽는 부분이나 몽룡이 춘향을 두고 한양으로 떠나기 전 탄식하는 부분, 몽룡이 한양에서 남원으로 돌아올 때 농부가 부분 등의 노래가 강화돼 춘향과 몽룡의 만남 그리고 재회가 한층 더 애틋하게 다가올 것이다. 판소리 사설에 담겨 있는 극적 요소를 청각적·시각적으로 부각하기도 한다. 합창으로 부르는 ‘신연맞이’로 2부의 서막을 웅장하게 여는 것. 이는 춘향의 슬픔과 변학도의 기쁨을 극적으로 대조해 보여준다. 물론 들을 거리만큼이나 볼거리 역시 더욱 풍성해졌다. 2020년 초연 당시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았던 유수정의 말이다.
“초연 때도 안무를 참 잘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풍성하고 아주 전문적인 어떤 몸짓과 소리가 어우러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국립무용단에 협조를 구했어요.” 김명곤 연출이 말을 보탰다. “이번에는 국립무용단에서 여성 무용수 6명, 남자 무용수 1명을 보충해서 무용 장면을 멋있게 보완했습니다.” 이들이 합류하면서 춘향이 그네 뛰는 광한루 단오놀이 장면에 장관이 보강되었다는 전언이다.
총 15미터의 대형 그네, 50여 개의 청사초롱, 2미터 높이의 (몽룡)나귀 등 화려한 미장센 역시 빼놓을 수 없겠다. 거기다 국립창극단 전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무대이니만큼 풍성하고 다채로운 무대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관객들이 가장 궁금한 지점은 춘향과 몽룡일 듯하다. 이번 공연에는 2020년 초연에 출연했던 이소연·김우정(춘향), 김준수(몽룡)에 더해 신입 단원인 김수인(몽룡)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두 명씩(이소연·김준수, 김우정·김수인)이 짝을 이뤄 두 색의 <춘향>을 선보일 예정이다. 두 페어의 색깔을 비교해 달라는 주문에 작창을 맡은 유수정과 김명곤 연출가는 답변을 저어했다.
“이소연 씨나 김준수 씨 같은 경우에는 지금 무르익은 상태예요. 소리하는 사람들도 소리를 며칠 하면 목이 쉬거든요. 그런데 두 사람은 말 그대로 타고났어요. 물론 김우정·김수인 단원도 타고난 소리꾼이에요. 특히 이번에 처음 몽룡 역을 맡은 김수인은 시김새에 강해요. 시김새는 판소리의 필수로, 우리 국악의 독특한 맛을 내는 선율인데 악보에 표기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전으로 가르치는데, 그것 못 받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김수인은 그걸 너무 잘 받아요. 한 번에.”
김우정은 2020년 2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돼 <춘향>으로 데뷔한 후 그 실력을 인정받아 국립창극단의 정단원으로 입단한 신예로 꼽힌다. 김수인은 최근 국립창극단 <리어>에서 아픔을 간직한 탐욕적 인물인 에드먼드 역할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5년생 동갑내기 20대 커플의 무대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갈음하면 이소연·김준수 커플이든 김우정·김수인 커플이든 그 향은 다르겠지만, 어느 춘몽을 만나더라도 취할 듯하다. 다시 반복하지만 상춘의 계절, 이 봄에는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국립극장에서 봄의 향기에 한껏 취해도 좋을 듯하다.

글. 김일송 공연칼럼니스트. (책공장)이안재를 운영하며 희곡집, 아카이빙북 등 공연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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