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하나

국립창극단 <리어>
본질적 질문 뒤에 오는 물음
창극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이제 지루하리만큼 오래된 질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롯이 우리 소리의 힘을 보여주는 무대이자 끊임없는 실험의 발판이 돼주는 신선함을 제공하기도 한다. 창극 <리어>는 어쩌면 그 본질적 질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일지도 모른다.

“히뜩! 히뜩! 목 잘린 바위들 황토 피를 뿌리며 산 아래로 굴러 내리네! 히뜩! 히뜩! 누우런 저 이빨 부풀어오른 저 강물 으르렁 강둑을 넘어오네!”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성문이 닫혀버렸다. 미쳐버린 왕 ‘리어’(김준수)가 질척이는 물로 가득한 무대 위를 날뛴다. 허공에 주먹질하며 구르고,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이를 간다. 이 폭풍우의 풍경 속에서 셰익스피어 연극 무대 위의 ‘리어’였다면 홀로 누더기 같은 옷과 백발을 쥐어뜯으며 저주의 독백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창극 <리어>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리어의 속마음을 풀어 끄집어내는 이는 리어 자신이 아니라 코러스다. 무대 위 소리꾼들의 합창이다. “이 밤, 하늘도 땅도 그사이 모든 것도, 한 마리 거대한 짐승이 되어 으르렁대며 물어뜯으며, 서로 뒤엉켜 발버둥치는 야수들의 밤. 비바람 속에서 누가 울부짖는가?” 딸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권력과 영토를 넘겨준 뒤 버림받은 과거의 영웅. 그가 느끼고 있을 온몸을 찢는 고통이 비바람에 푹 젖은 돌덩이처럼 둔중히 관객의 마음을 짓눌러 온다. 더하고 뭉쳐져 더 무겁고 날카로워진 우리 소리의 힘이다.
각본을 쓴 극작가 배삼식은 창극 <리어>에 대해 말하는 인터뷰에서 “연극의 원초적 형태는 본디 음악극이었다. 결국 원하는 것은 말이 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 너머의 것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다. 3월 22~3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창극 <리어>는 그 “말 너머의 것”을 담는 창극의 실험, 오롯이 우리 소리가 질러낼 수 있는 힘의 크기를 압축해 보여준다.

오래고도 새로운 질문 ‘창극이란 무엇인가’

창극은 여전히 스스로를 향해 ‘창극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한껏 존재론적인 이 질문이 가능한 것은 우리 창극이 지금도 변신과 실험을 거듭하며 만들어져가는 과정에 있어서다. 창극 <리어>는 이 오래고 새로운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립창극단의 작품 목록은 우리 소리의 그릇을 키워 새로운 것을 담아낸 실험으로 가득하지만, <리어>는 그 목록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남다르다.
내용에 있어 <리어>는 배삼식 작가의 글로 『노자(老子)』의 ‘물’을 관통해 셰익스피어 비극을 담는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재해석한 <메디아>와 <트로이의 여인들>부터 오페라를 가져온 <오르페오전>이나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까지 무대에 올린 국립창극단이지만, 셰익스피어 비극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형식은 무척 연극적이되, 그리스비극을 닮은 역할의 코러스가 중심을 잡는다. 관객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데 탁월한 한승석의 작창이 정재일이 만든 음악을 타고 장르의 경계를 깨뜨리며 흘러넘친다. 그리스비극의 코러스 형식을 차용한 우리 소리 합창은 이전에 배삼식의 글과 정재일의 음악이 만났던 <트로이의 여인들>(연출 옹켕센)에서도 ‘찰떡궁합’ 위력을 입증했었다. 이태섭 무대감독이 폭 14미터, 깊이 9.6미터의 무대 세트에 점점 채워가는 20톤의 물은 비극의 깊이를 키우는 장치이자 소리의 힘을 증폭하는 울림통 같다.
무엇보다 이 무대가 반가운 것은 취임 초부터 “우리 소리의 뿌리를 더 단단하게 하겠다”던 유수정 음악감독의 초심이 여전히 살아 숨 쉰다는 점이다. 창극을 사랑하는 이들은 3시간에 달하는 공연 시간 내내 우리 창극단 최고 소리꾼들의 소리를 독창·중창·합창으로 계속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연출·안무를 맡은 정영두는 언뜻 이질적인 이 모든 요소를 솜씨 좋은 직조공처럼 씨줄 날줄로 엮어 끌고 나간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배삼식은 “노자 철학의 중심 이미지인 물을 가져온 것은 인의예지로 대변되는 유가 철학을 한 번쯤 뒤집어 반성해 보자는 것이지 세계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관조적 초연함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 직접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는 글로스터의 서자 에드먼드의 대사일 것이다. “천지(天地)는 불인(不仁)이라. 참으로 옳도다! 천지는 어질지 않고 인의(仁義)는 사람의 본성이 아니니, 충(忠)도 효(孝)도 죄다 말라빠진 개뼈다귀 같은 소리다!”
이 대사에 인용된 『도덕경』 5장은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제사 때 만들어 쓰고 버리는 풀강아지처럼 여기며, 성인(聖人)도 어질지 않아 역시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리어>의 우주 역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사람조차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대로 지옥이다.
창극 <리어>는 이 지옥도 속 인물들을 도덕적 잣대로 재고 ‘판결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를 택한다. 형과 아버지 사이를 갈라놓고, 리어의 두 딸을 모두 유혹해 차지하는 서자 에드먼드의 욕망, 아비를 버린 두 딸의 막내 코딜리어에 대한 질투와 권력욕, 두 눈을 뽑힌 뒤에야 진실을 이해하는 글로스터의 어리석음에 대해 모두 그러하다. 생각과 행위의 선악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듯 보인다.
여기엔 뜻밖의 효과도 있다. 아무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 차가운 세상에서 코러스는 강하게 몰아붙일 때뿐 아니라 서글프게 다독일 때 또 다른 효용을 보여준다. 두 딸에게 배신당하고 성밖으로 뛰쳐나간 리어를 위로하는 합창 “아무도 보지 못하네, 아무도 대답이 없네, 비바람속에서 리어, 너 혼자 깜박이네” 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스토리텔링의 악조건, 세밀한 연기의 결락 극복은 ‘과제’

그러나 ‘판단하기’ 대신 ‘보여주기’로 한 창극 <리어>의 선택은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창극은 무엇이냐’라는 본질적 질문 뒤에 오는 물음들과 맞닿아 있다. 더는 말로 형용 불가능한 극한의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우리 소리이고, 소리꾼 배우들은 바로 그 소리로 인물을 표현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창극은 무대 위 연극의 외형을 가졌지만, 표현 수단으로서 우리 소리는 말로 하는 대사보다는 몸을 악기 삼아 감각과 감정의 형태를 그려야 하는 ‘형체 없는 무용’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판단하기’ 대신 ‘보여주기’는 야심만만한 예술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뒤에 이어 창극에 이미 주어져 있는 스토리텔링의 악조건, 세밀한 연기의 결락된 사슬 같은 약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하게 한다. 극과 인물에 대한 예습이 없는 관객이라면, ‘캐릭터 빌드업’ 단계에서 잠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리어>는 이제 초연이다. 우리 창극에는 코로나에도 아랑곳없이 객석을 꽉 채우고 마침내 커튼콜에 기립박수를 보내준 든든한 관객들이 있다. 공연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매력을 뿜어내는 소리꾼들은 가장 큰 자산이다. <리어> 김준수의 노인 분장이 낯설었던 것은 극 초반 잠시뿐, 이 창극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소리가 가진 깊은 힘에 한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2막에서 아버지 ‘글로스터’ 유태평양과 비운의 아들 ‘에드거’ 이광복은 폭발적이었다. 객석의 폭발적 반응이 그걸 입증한다.
우리 창극의 도전과 실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리어>는 ‘창극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라 불러 마땅한 무대였다.

글.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종교·미술·공연·영화 등을 담당했다. 짧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여도 여전히 굵은 이야기의 힘을 믿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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