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장르를 초월한 예술
경계를 넘어 사유하다
각기 다른 특성을 충돌시키고, 서로의 영역을 넘나드는 예술계 트렌드가 확장되고 있다.
새로운 의미와 관점을 제시하는 예술계 탈영역 작품이 시사하는 건 무엇일까.

지난여름, <긴긴밤>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공연됐다. 무대에는 네 사람이 있었다. 소리꾼과 배우, 고수와 연주자다. 이들은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코뿔소와 펭귄의 이야기를 인간의 움직이는 몸과 음악으로 들려준다. 아홉 개의 곡은 자진모리와 세마치장단, 아프리카 리듬을 넘나들며 연주된다. 이 공연의 장르는 무엇일까? ‘일단은’ 판소리다. 그러나 무대에서 소리꾼은 ‘판소리’로, 배우는 ‘연극’으로 소개한다.
분야별 예술이 모여 각자의 특징을 확장하는 새로운 예술이 늘고 있다. 매체 간 협업이 가장 활발한 곳은 서사의 영역이다. 이야기를 기초로 하는 영화와 연극, 뮤지컬과 창극 곁에는 문학이 있다. 탄탄한 이야기에 더해진 매체별 특성이 문학의 세계관을 넓힌다.
특히 공연예술에서 ‘동시대성’이 중요해지면서, 한국 현대문학은 무대와 가장 가까운 동반자가 됐다. 판소리 <긴긴밤>, 연극 <일의 기쁨과 슬픔>,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각각 루리, 장류진,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배우가 인물을 재현하는 연기의 물성은 소설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박상영 작가 특유의 쫄깃한 문장이 배우의 발화를 통해 더욱 경쾌해졌고,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까운 장류진 작가의 세계는 생활감을 짙게 담아낸 배우들의 면면으로 공감을 얻었다. <긴긴밤> 역시 동물의 여정을 구체적인 몸의 움직임으로 그려낸 덕에 소설의 감동을 더욱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원작을 바탕으로 하되, 새로운 시선을 더한 작품도 있다. 뮤지컬 <유진과 유진>은 사건 중심으로 구성된 이금이 작가의 동명 소설을 캐릭터의 ‘심리와 치유’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판소리 <긴긴밤> 포스터

국립창극단도 지난 10년간 그리스비극에서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파블로 네루다의 시, 경극과 웹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사와 함께했다. 오는 11월에 재공연되는 창극 <패왕별희>는 동명의 경극이 원작이다. 경극은 양식화된 동작과 과장된 스타일링으로 시각적 만족도가 높은 예술이다. 반면 창극은 소리라는 청각적 요소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달한다. 전쟁의 비극과 애절한 사랑이 창극의 소리를 만나 감정적으로 풍성해졌고, 경극의 화려함이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 내며 호평받았다.

국립창극단 <패왕별희>

매체의 교차가 하나의 흐름이라면, 다른 흐름은 개인으로부터 비롯된다. 정구호 연출가의 한국무용이 대표적이다. 패션디자이너의 모던한 시선은 한국무용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오브제를 최소화한 무대와 춤 선을 강조하는 의상, 상징적인 조명과 극적인 음악으로 한국무용이 지닌 절제와 여백의 미에 주목했다. 2013년 <단>을 시작으로 ‘정구호표 한국무용’은 <묵향>과 <향연>, <일무>와 <산조>로 이어지며 전통이 곧 현재임을 증명해 냈다. 한국적 소재를 차용한 창작 뮤지컬은 소리꾼들을 찾았다. <서편제>와 <아리랑> <곤 투모로우>에 이자람·이소연·이승희·김준수가 참여했다. <서편제>의 송화처럼 소리꾼을 연기하며 예술가와의 일체감을 담아내기도 했으나, <아리랑>의 옥비와 <곤 투모로우>의 고종은 소리꾼들의 시김새로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했다.

국립무용단 <묵향>
국립무용단 <산조>

연극과 무용의 긴밀한 결합도 있었다. 발레리나 김주원은 2020년에 배우 박해수·윤나무와 <사군자-생의 계절>을 함께했다. 사군자를 모티프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인연을 배우의 독백과 발레리나의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재영 안무가는 연극 <태양>에서 움직임으로 인물의 특징과 서사를 전달한 후, 태양이라는 근원적 생명력에 집중한 무용 작품을 선보였다. 경계를 허무는 예술가가 꾸준히 등장하며, 예술은 시대에 맞춘 새로운 질문과 답을 끊임없이 찾아가고 있다.

매체별 경계가 흐려지며 극장이라는 공간에도 다른 관점이 필요해졌다. 관객의 몰입과 체험에 주목한 이머시브 시어터가 공연예술계의 트렌드로 자리한 영향도 컸다. 최근 또 다른 극장으로 주목받는 공간은 미술관이다. 지난해 리움미술관은 <구름산책자> 전시와 연계한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 「사모나」 연작을 발간했다. 관람객은 펠트를 벽돌처럼 쌓아 올린 전시 작품 ‘고요의 틈’에서 단편소설을 읽으며 작품의 일부가 됐다. 연극 그룹 양손프로젝트의 「석상공원」 낭독 공연도 전시 공간과 관람객 사이를 누비며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각종 SNS를 휩쓸었던, 거대한 원탁을 짊어진 지푸라기 인형 역시 허물어진 예술의 경계를 확인한 작품이었다. 해당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작은 방주>의 ‘원탁’이다. 작가는 익숙한 재료에 기계의 움직임을 더해 인간의 욕망과 상실의 모순을 담아냈다. 이후 해당 전시를 전통예술가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4편의 공연이 소개됐다. 미술과 문학, 연극과 무용의 서로 다른 특성이 충돌하며 예술가와 관객은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

장르 초월 자체가 주제가 된 축제도 있다. 국립극장이 2010년부터 진행해 온 <여우락 페스티벌>은 장르와 국적, 세대의 경계를 허물며 전통예술계를 살찌우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올해도 새로운 판소리가, 아프리카와 한국의 만남이, 피아노와 대금의 협연이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은 ‘싱크 넥스트’로 동시대 예술가들을 위한 협업 자리를 펼친다. 2023시즌에서는 연극과 무용을 넘어 스트리트댄스 크루 프라우드먼과 수화 아티스트 지후트리 등 더 넓은 영역의 창작진이 참여했다. 서울변방연극제 역시 ‘경계에서의 만남과 수용’을 가치 삼아 1999년 시작된 축제다. 예술가들이 예민하게 포착한 사회적 맥락을 극장의 안과 밖에서 펼쳐내고,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며 사유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야말로 예술은 어디에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긴긴밤>은 어떤 예술로 분류할 것인가. 답은 “각자의 재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드릴 겁니다”라는 고수의 멘트에 있었다. 판소리든 연극이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주제의 전달이다. 창작자의 의도가 수용자에게로 이어졌다면, 표현 양식과 분류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때때로 서로 다른 해석이 펼쳐져도 괜찮다. 사유를 위한 좋은 질문은 제시되었고, 관객은 그 안에서 각자의 답을 찾아 삶에 적용할 것이다. 경계를 뛰어넘는 유연함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 비단 예술에만 해당하는 문장은 아닐 것이다. 모두의 자유와 용기를 위하여.

글. 장경진 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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