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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기획공연 <합★체>
함께라 더 반짝이는 무대
배우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풍부한 표정과 손짓으로 체의 속마음을 연기하던 수어 배우와
그를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바라보는 지니의 목소리가
마치 삼단 변신 로봇처럼 합체돼 더 강하고, 깊고, 크게 와닿는다.

공연 자체만으로 좋은 극도 있지만 어떤 극은 그 공연을 둘러싼 모든 것이 완벽해서 그것마저 그대로 머릿속에 박제될 때가 있다. 가령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한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시작 전에 시계탑과 잔디밭, 음악 분수 등이 있는 광장을 거닐면 마치 1지구 거리를 걷는 기분이 들곤 했다. 공연이 끝나고 만신창이가 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리. 저 하늘이 지금 얼마나 새파란지, 풀냄새가 얼마나 숨 막히게 진한지~” 노래가 자동 재생되면서 1지구를 도망쳐 나오는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던 기억까지가 이 공연에 포함된다.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 이어 첫 소설『합★체』로 만든 음악극 <합★체>가 지난해 9월 국립극장에서 성공적으로 초연을 올렸다. 이 공연 역시 내겐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각인돼 있다.
공연 첫날, 나는 가운데 열 중앙에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었다.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고, ‘배리어프리’를 내세우고 있는데 자칫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까 걱정이 앞섰다. 나는 내 주변을 포함해 왼쪽 열과 오른쪽 열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멀리 떨어져 앉은 여럿이 한꺼번에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하나도 시끄럽지 않았다.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손짓과 표정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단체 관람을 온 청각장애인들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손끝과 표정에서 들뜨고 기쁜 마음, 행복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멋있었다. 아름다웠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평소에 이런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비로소 나는 긴장을 풀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극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도처에서 평화롭게 울려 퍼지던 진공상태의 소란에 극을 보기도 전에 코끝이 찡했는데, 공연 시작과 함께 등장한 디제이 지니의 존재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어떤 무대장치들이 있는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고, 수어 통역 배우가 뮤지컬 배우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이며 배역을 소개해 주는 것도 좋았다. 무대 양쪽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는 한글 자막으로 된 뮤지컬 대본이 대사·지문·음악 등 자세히 구분돼 흐르고 있었다.
<합★체>는 장애인, 비장애인 나누지 않고 모두가 기꺼이 즐길 수 있는 공연이었다. 시각장애가 없어도 원작을 모르는 상태로 온 관객이라면, 무대 설명을 들으며 전체 분위기를 이해하게 된다. 또 청각장애가 없어도 자막으로 제공되는 대사나 가사를 함께 보면, 놓치는 부분 하나 없이 모든 소리가 귀에 쏙쏙 박힌다. 여기에 수어 통역 배우들의 활약으로 극은 완벽하고 완전해진다. <합★체>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내게는 셋이 하나로 합체된 배우가 움직이는 무대가 된다. 오체를 떠올리면 체 역을 맡은 배우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풍부한 표정과 손짓으로 체의 속마음을 연기하던 수어 배우와 그를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바라보는 지니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체돼 기억되는 식이다. 그래서 <합★체>는 장면 하나하나가 마치 삼단 변신 로봇이 합체한 것처럼 더 강하고 깊고 크게 와닿는다. 슬픔도 기쁨도 웃음도 감동도 세 배의 강도로 다가와 마음 깊이 자리 잡는다. 원작을 스무 번도 넘게 읽은 내가 봐도 이런 배려는 전혀 지루하거나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극을 더 풍부하게,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비장의 무기로 작용한다.
커튼콜에서 관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쏟아낼 때 나는 말 그대로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봤다. 기쁨과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뜬 마음이 별처럼 쏟아져 내릴 때 힘차게 하나가 되어 반짝거리던 손들. 은빛 파도처럼 고요하고 은은하게 오래도록 반짝이던 그 소리가 내겐 <합★체> 공연에 포함된다. 나는 첫날 공연을 보자마자 이미 재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올가을, 음악극 <합★체>가 돌아온다.

고이 모셔둔 프로그램북을 펼쳐 손으로 가만히 쓸어본다. 낯설지만 단단한 점자의 감촉이 여전하다. 엄청난 비용과 정성이 들어가는 이 작업을 국립극장에서는(이니까!) 해냈고, 관객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이 마음은 관객에게 ‘무장애’의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에 함께하자고 청하는 마음으로 여겨졌다. 제작진의 이런 노력은 곳곳에서 세심하게 빛났다. 출연 배우 각자가 음성으로 자신의 생김새 등을 소개하는 영상도 유용했고,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음성해설가와 함께 무대를 직접 둘러보며 소품, 의상 등을 만져보는 ‘터치 투어’도 운영했다. 프로그램북 첫 장엔 박지리 작가『합★체』의 서문이 인용되어 있다.

“오래전, 한 난쟁이 아버지가 하늘로 작은 공을 쏘아 올렸다. 그 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잇는 이 문장은 19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부품화된 사회적 약자의 실패한 혁명을 지금 이 시대로 가져온 것이다. 책자에서는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난쟁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며 원작을 기반해 극본화한 거라 밝히고 있다. 합★체』의 ‘난쟁이’는 박지리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지금 우리의 현실을 표현하는 상징과 비유의 단어가 된다. 「칼날」에서 신애가 “우리는 모두 난쟁이야.”라고 외친 것과 마찬가지다. 원작의 난쟁이는 오합, 오체의 저신장 장애인 아버지면서 그 고단하고 불편한 현실 때문에 키가 컸으면 하는 열망으로 가득한 오합과 오체다. 동시에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작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계도사는 “세상 만물이 다 같으면 그건 공장에서 찍어낸 복제품”이라면서 “긴 놈이 있으면 짧은 놈이 있고, 점 난 놈이 있으면 안 난 놈이 있고 그것이 우주의 순리”라고 말한다.
다양성과 고유함이라는 우주의 순리를 거스르고 편견과 선입관으로 경계를 짓고 벽을 만드는 우리들에게 박지리 작가는 ‘좋은 공의 조건’을 통해 새로운 혁명을 제안한다.
“벽에 부딪혀도 거기서 더 힘을 얻어 다시 힘차게 튀어 오를 수 있는 힘인 탄력도”는 혼자 만들어낼 수 없다. 합과 체가 33일의 수련 이후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듯이 함께하려는 마음이 하나둘 모이고 쌓여야 혁명을 이룰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난쟁이라고 부르면 난쟁이”로 낙인찍히는 세상에서는 더 그러하다. 지난 초연을 통해 ‘배리어프리’에 새로 눈뜨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혁명적 발상으로 『합★체』를 멋지게 무대에 올려준 김지원 연출가와 정준 작가에게 박지리 작가의 마음을 더해 미리 감사 인사를 전한다. 더불어 이번 재공연에서는 작곡가 고수영과 안무가 서병구, 무대디자이너 여신동이 새롭게 합류해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여러 개의 슬라이딩 계단이 극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되며 집·교실·운동장·계룡산 등의 다양한 공간으로 변하고, 무대 앞에 넓은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한층 역동적인 안무를 보여줄 것이다. 거기다 친숙한 팝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활용한다고 하니, 극적 재미와 몰입이 배가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미 완벽한 공연에 관객의 뜨거운 마음까지 합체해 다시 무대에 오르는 <합★체>를 보러 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함께하려는 마음을 반짝이는 박수 소리에 담아.

글. 김태희 사계절출판사 총괄팀장. 1997년부터 지금까지 책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박지리 작가의 첫 책 『합★체』를 비롯해 『다윈 영의 악의 기원』까지 모든 책을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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