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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우리 시대의 오페라
19세기 베르디는 급진적이었고, 대담했다. 발표 당시 작품은 파격이었고,
현대에 와선 ‘지금, 여기’를 담는 그릇이 됐다.
길 잃은 여인의 강렬한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음악을 담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다.

1853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베르디는 친구 체사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베네치아 ‘라 페니체 오페라 극장’을 위해서 <동백꽃 아가씨>를 오페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네. 이것은 아마도 <라 트라비아타>라고 불릴 걸세. 우리 시대를 주제로 한 작품일세. 다른 작곡가라면 의상이며, 무대며, 수천 가지 바보 같은 일로 망설였을 텐데, 나는 아주 즐겁게 작업하고 있네.”

이 편지는 <라 트라비아타>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표현을 담고 있다. 그 핵심은 바로 <라 트라비아타>가 ‘우리 시대를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오페라는 ‘지금, 여기’를 담는 그릇이 아니었다. 오페라는 오랫동안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소재로 삼거나, 과거를 배경으로 했다. <라 트라비아타>처럼 매춘부가 주인공이 돼 그의 가혹한 운명을 그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센세이션일 수밖에 없었다. 베르디는 급진적이었고, 대담했다.

2021년 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19세기의 성매매업

베르디는 연극 무대에서 성공한 작품을 오페라로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1848년 소설로, 그리고 1852년에는 연극으로 성공을 거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백꽃 아가씨>가 베르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품 활동으로 정신없이 살던 작곡가의 마음을 무엇이 그렇게 사로잡았단 말인가.
베르디는 뒤마 피스의 <동백꽃 아가씨> 속에서 쾌락과 환락에 물들어 있던 파리 사회와 한 여성의 운명을 마주했다. 비올레타 배역으로 대변되는 성매매업은 당시 파리 사회의 한 부분이었다. 오페라에서 비올레타의 직업은 코르티잔Courtesan이다. ‘궁정의 여성’이라는 뜻의 코르티잔은 상류계급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들은 상류층을 상대했어야 했기에 교양을 갖춰야 했고, 음악은 19세기 중산층과 상류층 여성이 알아야 할 필수 교양 중 하나였다. 코르티잔은 상류층 남성에게 성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대신 상류계급 못지않은 부와 사치를 누렸다. 비올레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집에 하녀를 두고 살았다.

베르디의 ‘지금, 여기’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을 치르며 프랑스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프랑스 사회는 벼락부자가 된 이들로 넘쳐났다. 그 돈은 과거 귀족층의 특권 같았던 코르티잔에게 흘러들었다. 도시의 공장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평생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코르티잔이 되어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이들이 생겨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뒤마 피스의 <동백꽃 아가씨>는 19세기 파리 화류계의 실존 인물 마리 뒤플레시Marie Duplessis, 1824~1847와 뒤마 피스 자신의 불꽃 같았던 사랑을 그린 자전적 작품이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은 베르디가 <라 트라비아타>를 썼을 당시 ‘지금, 여기’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매춘부와 소설가의 강렬했던 사랑

동갑내기였던 이들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젊은이들이었다. 뒤마 피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1844년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사치스러움과 아름다움의 절정에 있었다.” 가난한 시골 홀아비의 딸로 태어나 열두 살 되던 해에 혈혈단신으로 파리로 건너와 코르티잔이 된 뒤플레시는 파리의 화류계를 아름다움으로 휘어잡았다.
뒤플레시는 대담함의 화신이었다. 그녀는 상류층의 상징 같은 오페라극장의 전용 박스석을 시즌마다 구매하곤 했다. 그녀는 매일 밤 오페라극장을 드나들었고, 신작 오페라의 첫 공연도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19세기의 여느 상류계급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늘상 오페라극장 자신의 자리 앞에 동백꽃을 두었다. 한 달에 25일은 하얀 동백꽃을,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꽃을 두었다. 이 5일의 붉은 동백꽃은 그녀가 생리 중임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동백꽃 아가씨’라는 별명은 그렇게 붙었다. 그녀는 동백꽃이었다.
뒤플레시는 뒤마 피스의 사랑 고백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현실 세계를 생각하고 그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진실한 사랑에 그녀의 마음도 움직였고, 이들은 1844년과 1845년 사이 짧고도 강렬한 사랑을 나눴다.
뒤마 피스가 뒤플레시의 죽음을 안 것은 그가 긴 여행에서 돌아온 뒤였다. 뒤플레시는 1847년 스물셋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의 강렬했던 사랑은 소설로, 연극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급진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들의 이야기는 베르디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음악, 죽음 앞에서조차 아름다운

분명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는 비올레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프리마 돈나’의 오페라다. 소프라노 여주인공이 이만큼 돋보이는 오페라도 찾기 힘들다. 덕분에 이 작품은 스타 소프라노의 등용문 같은 작품이었다. 1950년대의 마리아 칼라스, 1990년대의 안젤라 게오르기우, 2000년대의 안나 넵트레코가 비올레타 역으로 스타가 되었다.
<라 트라비아타>만큼 아름다운 음악으로 가득한 오페라도 드물다. 비올레타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듯 1막의 음악은 왈츠로 들썩인다. 비올레타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려는 이들이 밤을 새우고 노는 파티장은 주말의 홍대 거리, 이태원 클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축배의 노래’를 부르며 쾌락과 자유의 삶을 예찬한다.
1막의 화려한 음악이 3막에서 죽음을 앞둔 비올레타의 장면에서 다시 등장할 때, 우리는 그녀의 가련한 운명에 공명할 수밖에 없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플래시백 장면처럼, 이 장면에서 우리는 죽음을 앞둔 그녀가 과거 얼마나 화려했고,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함께 회상하게 된다. 음악이 초대하는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순간, 이미 오페라의 마법은 우리의 온몸을 휘감는다.
비올레타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그토록 아름다웠던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극의 순간, 음악은 처절하게 아름답다. 죽음의 순간조차 아름답기에 우리는 베르디가 그려낸 ‘지금, 여기’를 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지금, 여기’

베르디가 이 오페라를 두고 “우리 시대를 주제로 한 작품”이라 했을 때, 혹자는 그의 말에서 도미에와 쿠르베가 화폭에 그려낸 19세기의 리얼리즘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베르디의 리얼리즘이 포착한 삶은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은 거짓 화려함으로 가득한 유흥의 현장이었다. 누군가는 돈으로 사랑을 사고파는 곳에서 누군가는 진짜 사랑을 하고 있었다.
베르디의 리얼리즘은 우리의 ‘지금, 여기’와도 멀리 있지 않다. 이 운명적 사랑은 이번 <라 트라비아타> 프로덕션의 연출을 맡은 뱅상 부사르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지난해 국립오페라단 시즌에서 <호프만의 이야기> <마농> 등을 뱅상 부사르와 함께했던 지휘자 제바스티안 랑 레싱의 음악도 기대해 봄 직하다.

글. 정이은 음악학자.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임연구원. 한양대학교에서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소 프로젝트 ‘소리와 청취의 정치학’에 참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양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등에서 음악의 역사와 이론을 강의한다.

사진. 황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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