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작창의 세계
작창(作唱), 판소리에 대한 헌정곡
작창이란 행위, 작창가라는 역할이 새롭게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제 와 그 의미와 역할을 돌이켜 보는 것은 작창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작창이란 무엇일까.

새로운 이야기에 소리를 싣는 ‘작창’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행위를 흔히 ‘작곡(作曲)’ 혹은 ‘창작(創作)’이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작곡의 이미지는 작곡가가 오선보에 음표를 새겨 넣는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음악을 만드는 방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음악만큼이나 다양하다. 아마 악보로 시작해 완성되는 음악의 다른 축에는 판소리꾼의 음악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소리꾼들은 자신의 신체에 오랜 기간 축적된 한국 전통음악의 장단과 음계 등 다양한 음악적 질료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 이러한 행위를 ‘작창(作唱)’이라 일컫는다. 오늘날 판소리로 만나는 모든 새로운 이야기는 작창이 필요하며, 작창가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창의 과정은 꽤 복잡하다. 작창가마다 방식이 다른 데다 이렇다 할 순서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작창가는 판소리가 지닌 음악적 문법을 해체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가락을 심화시킨다. 또한 이야기와 인물에 관한 풍부한 해석을 바탕으로 장면에 맞는 장단을 선택하고, 이면에 맞는 소리를 구성한다. 말 자체가 지닌 운율과 말이 소리에 실려 전달되는 방식도 함께 고민한다. 만약 창극 작창가라면 창극 배우들의 특징과 스타일을 잘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작창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양한 음악적 지식과 판소리를 해석하는 자신만의 관점을 집약시킨다.
위에서 언급한 작창의 모든 과정은 실제로 노래를 불러보고 노랫말과 대본을 수정하는 복잡한 신체적 작업을 수반한다. 작창가는 연주가이면서 작곡가인 셈이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탁월한 연주가여야 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전문적인 소리꾼만이 작창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창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창은 판소리와 창극의 어떤 가능성을 여는 것일까.

창 박동진·정권진·조상현·성창순·안향련·정철호, <신작 판소리 열사가>, 서라벌레코드사 SR-0166-1~1,
1979년 녹음 제작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LP), 사진 제공 국악음반박물관(왼쪽), 김명자의 <슈퍼댁 씨름대회 출전기>, 사진 제공 판소리치유센터(오른쪽)

작창의 역사

사실 작창은 판소리가 존재하는 한 끝없이 진행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새로운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말하고 사람과 연결되고자 한다면, 창작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오늘날에는 전통음악을 ‘보호’나 ‘전승’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전승’과 ‘창작’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과거의 소리꾼도 자신만의 독특한 가락으로 새로운 대목을 만들고 다른 유파와 변별되는 음악적 스타일을 확립했다. 모든 소리꾼은 나름의 방식으로 ‘작창’을 해온 셈이다. 물론 당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방식은 기존의 것을 변주하거나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형태였다. 오늘날의 창작과는 결이 다르지만, 당대의 보편적인 창작 형태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판소리의 역사는 창작의 시간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작창은 새로운 사설을 바탕으로 소리를 구성하는 근대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작창의 정의나 범주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작창의 역사를 20세기 초까지 소급해 볼 수도 있다. 마치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음악이나 연극처럼 판소리와 창극도 시대와 호흡해 온 것이다. 초기에는 영웅적 인물을 조명하는 창작 판소리가 많았다. 박동실·박동진·정철호는 이준·이순신·안중근·유관순·윤봉길 등과 같은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바탕으로 판소리를 창작했다. 대개 ‘열사가’라는 제목으로 광복 직후 유행했다.

국립창극단 ‘작창가 프로젝트’ 멘토로 참여한 이자람(왼쪽), 한승석(오른쪽)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시의성 있게 담아낸 저항적 성격의 판소리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대정신을 반영한 임진택의 <똥바다> <소리내력> <오적> <오월광주>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안숙선·윤진철·조통달 같은 걸출한 소리꾼이 창극과 관련된 주요 국공립 단체에서 작창을 맡으며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였다. 2000년대 무렵 판소리계 기성세대를 비판하며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시도했던 ‘또랑광대’의 움직임도 빼놓을 수 없다. 또랑광대는 젊은 소리꾼을 주축으로 판소리의 동시대적 가능성을 모색했던 연대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소재를 판소리로 끌어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태오의 <판소리 스타대전>과 김명자의 <슈퍼댁 씨름대회 출전기> 등이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국립창극단은 당대 최고의 소리꾼들을 작창가 및 음악감독으로 선임해 굵직한 작품을 선보여 왔다. 국내의 고전뿐만 아니라 해외의 고전을 창극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하며 레퍼토리의 다양성을 꾀했다. 최근에는 이자람·한승석이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패왕별희> <나무, 물고기, 달> <리어> 등 여러 작품의 작창가로 나서 화제를 모았다. 특히 웹툰·드라마·영화 등 새로운 미디어의 서사를 창극으로 풀어내는 시도가 늘어나면서 전문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창극을 구현할 수 있는 작창가에 대한 관심과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패왕별희> <리어> <나무, 물고기, 달>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시대의 목소리를 판소리로 번역하다

앞서 간략하게 짚어보았듯 소리꾼은 시대를 기민하게 반영하며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어왔다. 이들이 전통 판소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어온 이유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일 것이다. 유희를 위해,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혹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새로운 판소리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창은 단순히 판소리를 활성화하거나 창극의 레퍼토리를 확장하기 위한 수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작창은 궁극적으로 소리꾼들이 무엇을, 왜 노래하는지, 그들의 음악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시대의 목소리를 판소리로 번역하는 작창이라는 작업을 통해 판소리는 지속해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견고한 판소리를 면밀히 탐구하고 무너뜨린 후 다시 쌓아 올리는 작창은 판소리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으로 시작해 완성된다. 작창은 판소리의 역사를 써온 무수한 소리꾼이 남긴 유산의 가치를 새로이 잇는 작업이므로, 근본적으로 판소리에 대한 헌정곡일 수밖에 없다.
올해 처음 시작하는 국립창극단의 ‘작창가 프로젝트’는 유망한 작창가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마련됐다. 작가와 작창가의 긴밀한 협업 그리고 여러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창극의 또 다른 가능성을 항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창극이 오늘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창극계의 작은 초석을 다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글. 성혜인 비평가. 전통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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