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사라지는 것을 어루만지는 손길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뒤섞여 있다. 사람들은 서로의 상처와 고통을 보듬고 어루만지며 치유하고 나아가길 반복하며 삶을 산다. 결국 사람, 내 옆자리의 누군가가 삶의 원천이 되는 셈이다. 안팎으로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 함께 살아가는 삶의 면면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언제인가 들었던 소설가 김영하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가 사는 집은 들여다보면 참 슬퍼지는 공간이라고. 집이 사람들의 상처를 구석구석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 갖게 된 기억이랄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게 된 그것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지난한 시간을 견뎌낸 훈장이다. 하지만 새롭게 나아가거나 변화를 맞이해야 할 때 과거는, 상처는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과거가 현재를 숨 쉬지 못하게 억누를 때 미래를 위해 새롭게 태어날 필요도 있다. 과거가 완전히 사라지며 새로운 다른 것을 맞이해야 할 시기도 있는 것이다.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정의신 작, 구태환 연출)에 등장하는 영화관 ‘레인보우 씨네마’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레인보우 씨네마’는 오래된 동네 영화관이다. 손님이 거의 오지 않게 된 영화관이 문을 닫게 될 찰나에 연극은 시작된다. 무대에서 압축적으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연극은 이렇듯 변화의 순간에 시작될 때가 많다.

마음이 더는 춤추지 않게 된다면

동네 영화관 ‘레인보우 씨네마’가 문을 닫는 것을 마냥 환영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 모여든 사람들 때문이다.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변두리로 내몰린 삶이란 걸 알 수 있다. 화려하며 인기 많고 성공한 인생은 무대에 없다. 망해 가는 영화관 사장부터 애인에게 버림받은 점원, 동성애자 커플, 치매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딸, 대인기피증에 걸린 직원까지, 영화관은 삶에 지친 이들을 보듬어주었고,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위로를 얻었다. 영화관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모두 가족 같다. 서로의 약점을 받아주고 알뜰히 챙기며 마음과 정서를 나누었다.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해온 것이다. 영화관이 문을 닫으면 이들은 어디로 갈까.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는 시인 워즈워스의 시구를 인용한 제목이다. 사람들은 결국 흩어지게 되지만, 결코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하지 않는다. 희망을 바라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용기 내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갈 뿐이다. 마음이 더는 춤추지 않게 될 때는 얼마나 절망적일까 생각하지만 ‘레인보우 씨네마’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공유하며 나눴던 정서와 우정, 사랑의 시간 때문이다. 그런 순간이 삶을 버티게 해줄 것이다. 영화관이 없어지더라도 언젠가 몇몇이 모여서 ‘그때 그랬지’라며 추억을 공유하고 현재와 과거의 한순간을 연결하며 현재의 삶을 나아가게 할 것이다. 과거가 우리 삶의 버팀목이 될 때가 있다. 영화관은 사라지지만, 영화관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버팀목이 돼줄 것이다.
연극에 특별한 주인공은 없다. 물론 영화관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등장하는 사람 모두가 설득력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을 무대에 자유롭게 펼쳐놓는다.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 그 사연은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소재로 관객을 몰입하게 한다. 그 점이 이 작품의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10대의 젊은 세대부터 노인까지, 세대마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극은 다양한 사건을 무작정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잘 짜인 구성으로 밀고 당기는 호흡을 이어간다. 다음 장면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해지는 구성이다.

변화하며 달라지는 작품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는 여러 차례 재연된 극단 수의 레퍼토리 작품이다. 시의성이 강한 연극은 장르적 특성상 레퍼토리로 살아남기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작품이 레퍼토리화 된다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고민이 담겼다는 뜻이며, 이러한 이유에서 레퍼토리 작품은 매번 새로운 관객을 만날 때마다 작품이 변화하거나 발전하는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또한 작품의 규모도 이 작품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대부분 소극장 위주의 작품이 많은 연극계의 현실에서 중극장 이상의 공간에서 관객과 만나며 차분하게 드라마를 풀어가는 작품 역시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2022년에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우리 곁에 찾아올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는 어떠한 모습일까. 시대가 달라질 때마다 관객의 관심사는 달라지며, 그만큼 작품의 초점도 미묘하게 달라진다.
작품의 초연(2018) 이후 이번 글쓰기를 위해 다시 한번 극을 보았을 때 이미 작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초연과 비교했을 때, 무대 위 배우들은 훨씬 안정적으로 보였으며 서로 간의 호흡도 잘 맞았고, 마지막 장면으로 갈 때까지 여유로우면서도 중심을 놓치지 않았다. 한결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졌다. 퀴어 문제 등 여전히 논쟁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사이 성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포용력이 비교적 넓어진 만큼 민감할 수 있는 소재들이 훨씬 덜 날카롭게 다가왔다. 거기에 인물 개개인이 가졌을 상처의 깊이와 감정의 골까지도 더 아프거나 크게 다가왔다.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의 슬픔과 절망의 깊이가 얼마나 크고 깊을까에 대한 공감 때문일까. 그것은 그사이에 팬데믹을 거치며 고립과 소외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고독과 외로움, 거기에서 생기는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모두가 함께 겪은 팬데믹은 풀기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이 연극은 그러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람, 내 옆의 누군가라 말한다. 그래서 ‘레인보우 씨네마’는 문을 닫았지만, 다른 누군가에 의해 또다시 만들어지고 새로 태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말이다. 친밀한 사람끼리 모일 수 있는 사랑방은 누구에게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이 흐른 만큼 나이가 든 배우를 무대에서 보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을 줄 것이다. 거기에 새로 합류한 배우와의 호흡도 기대된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매력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변화하며 또 다른 모습으로 달라졌을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무대를 기다린다.

글. 엄현희 연극평론가. 평론집 『연극비평과 연극경험』(2020), 『기록, 성장, 연극』(2018)을 펴냈다. 이머시브 공연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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