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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송년판소리> 안숙선의 만정제 ‘춘향가’
이 시대의 명창
탁월한 스승의 소리, 빼어난 데다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세까지 갖춘 제자. 스승이 만들어 제자에게 전한 소리는 삶의 본질을 꿰뚫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2022년의 마지막 날 우리가 마주할 무대는 바로 그 이어짐의 순간을 보여준다.

군계일학의 명창

20세기를 수놓은 뛰어난 명창 가운데 한 사람, 만정(晩汀) 김소희(본명 김순옥, 1917~1995). 판소리 연구가들은 김소희에 대해 “판소리하는 여성 창자를 말할 때 언제나 첫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김소희야말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예인. 군계일학의 명창”이라 평한다. 그녀의 소리는 요즘 말로 하면 “한 번 들어본 이는 있어도 한 번만 들어본 이는 없다”라고 할 정도로 탁월하기 때문이다. 김소희의 소리는 청아하고 미려한 것이 특징이다. 이에 더하여 짙은 애원성까지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절대 넘치지 않고, 우아하고 절제된 창을 선보인다.
타고난 목구성에 송만갑·정정렬·박동실 등 근현대 최고의 명창을 스승으로 둔 김소희는 집요하게 노력하는 소리꾼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만들어낸 소리의 결정이 바로 만정제 ‘춘향가’다. 만정제 ‘춘향가’는 김소희가 그녀의 스승을 비롯해 정권진·김연수 등 당대 빼어난 소리꾼의 소리 가운데 각 대목에 맞는 부분을 취사선택해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해 만든 것이다. 따라서 특정 유파의 색채가 아닌, 그 경계를 뛰어넘는 독자성을 보여준다. 신은주에 따르면 김소희는 소리의 끝을 서편소리 특징처럼 길게 끌며 부르기도 하지만, 동편제와 같이 짧고 강하게 끊기도 하는 등 부드러움과 힘참을 동시에 지녔다. 그녀의 ‘춘향가’가 갖는 독자성은 이와 같은 동·서편의 음악적 어울림, 그리고 여러 스승의 훌륭한 소리 대목을 탁월한 안목으로 배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애기 명창에서 예인이 되기까지

만정제 ‘춘향가’는 현재 여러 명창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이번 완창 무대의 주인공 안숙선이다. 남원 출신의 안숙선은 이모인 강순영 가야금 명인과 외삼촌인 강도근 명창의 영향으로 아홉 살 어린 나이 때부터 국악을 접했다. 강도근 명창에게 소리 학습을 시작한 시기는 열서너 살 때로, 이른 나이부터 ‘애기 명창’으로 불리며 소리·가야금·농악·무용 등을 하며 남원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그녀의 나이 열아홉 즈음, 남원국악원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안숙선을 보고 싶다는 김소희의 연락이었다. 그길로 안숙선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김소희를 만났다. 요즘 말로 하면 대명창의 오디션이었다. 그때부터 안숙선은 김소희 문하에서 ‘만고강산’ ‘운담풍경’ ‘역려가’ 등의 단가부터 시작해 판소리를 학습했고, 이후 향사 박귀희에게 가야금을 사사하며 본격적인 예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숙선은 오늘날 판소리 다섯 바탕의 완창을 모두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창일 뿐 아니라, 여러 스승의 소리를 두루 할 수 있는 독보적 소리꾼이기도 하다. 그녀의 ‘춘향가’는 김소희에게 배운 것이고, ‘수궁가’는 정광수에게 학습한 것이다. 그리고 ‘적벽가’는 박봉술에게, ‘심청가’는 정권진·성우향에게 배웠다. ‘흥보가’의 경우 김소희와 강도근을 사사했다. 이는 그녀가 소리에 대한 높은 집중력과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이면서 배우고자 하는 끝없는 욕심을 가진 소리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삶의 본질 닮은 만정제 ‘춘향가’

안숙선의 소리는 만정의 소리와 가장 닮았다는 평을 받는다. 맑으면서도 미려한 소리 색채, 정확한 음정, 절제의 미가 그것이다. 안숙선 명창에 따르면 김소희는 정확한 음정을 첫째로 강조했고, 다음으로 절제 있게 소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감정을 있는 대로 다 털어내 놓으면 결국 관객이 질릴 수 있다면서 말이다.
혹자는 판소리가 ‘한(恨)’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사실 판소리는 한과 신명,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소리’ 안에 오롯이 담아내는 그야말로 삶의 음악인 것이다. 안숙선은 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울리는 소리, 삶의 모습을 진실하게 그려내는 소리를 추구해 왔다. 기실 만정제 ‘춘향가’는 남녀의 사랑을 중심으로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임의 부재로 인한 그리움과 외로움, 재회의 환희와 행복 등 인간의 본질적 감정을 모두 담고 있다. 김소희가 스승의 소리 중에서도 대목별로 이를 잘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리를 가져왔으니 더욱 그럴 만도 하다. 안숙선 또한 그러한 김소희의 마음을 충실히 이해했다. 그녀는 만정제 ‘춘향가’의 매력에 대해 “화사하면서도 웅장함이 돋보이고, 때론 가벼우면서도 무겁다고” 전한다. 마치 우리 인생의 면모와 같다고 말이다. 이는 안숙선이 김소희가 그려내고자 한 ‘춘향가’, 나아가 판소리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숙선은 김소희와 음악적인 면모에서만 닮은 것이 아니라 예인으로 사는 삶의 태도도 닮았다. 김소희는 소리하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격식을 안숙선에게 강조했다. 공연이나 어떤 일을 할 때 명분도 중시했다. 소리는 아무 곳에서나 하면 안 되고, 어느 곳에서든 꾀부리지 않고 진정성 있게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고자 늘 겸손한 자세로 70여 년을 정진해 온 안숙선 명창.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명창이라는 말은 그녀에게 결코 과한 수식어가 아니다.

세대를 잇는 소리

2022년 9월 안숙선은 ‘춘향가’로 판소리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1997년 이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부문에서 예능보유자가 됐지만, 판소리와 관련된 활동을 누구보다 꾸준히 그리고 성실히 했고 판소리 ‘춘향가’에 대한 탁월한 전승 능력과 전수 활동의 기여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완창판소리>는 안숙선 명창과 그녀의 동료, 제자들이 함께 꾸린다. 안숙선의 동료이자 후배로 힘차고 우렁찬 소리, 익살스러운 연기가 돋보이는 유수정 명창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서정금·이선희·박민정·박자희 등 어린 시절부터 안숙선 명창을 사사한 소리꾼도 함께 무대에 선다. 그들을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안숙선 명창은 제자들이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성장해 개성 있는 소리꾼이 된 것이 대견하다고 한다. 그저 판소리가 끝이 없는 길인 걸 알고, 한결같이 열심히 해주길 바랐다. 그런 그녀의 바람이 실현될 것이다. 안숙선 자신이 스승의 모습을 보며 이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과 같이 오늘날 많은 소리꾼 역시 여러 뛰어난 스승을 보며 자신의 예술을 잘 지켜가리라 믿기 때문이다.
세대를 거쳐 충실히 전승되고 있는 만정제 ‘춘향가’. 한국의 대표적 고전을 한국을 대표하는 명창에게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리라 기대한다.

참고자료
신은주, 「김소희제 춘향가 연구」, 『판소리연구』 19, 판소리학회, 2005.
최혜진, 「김소희 바디 <춘향가>의 성립과 변화양상」, 『판소리연구』 23, 판소리학회, 2007.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2017)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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