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고전여행

판소리 열두바탕을 찾아서
인간적이라 더욱 끌리는 기녀와 왈짜
판소리는 18~19세기 발달한 시정 문화를 기반으로 함께 성장했다. 그런 만큼 판소리가 다루는 이야기 속에는 통속적이고 유흥적인 인물 유형과 그들이 벌이는 사건들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기녀와 왈짜다.

기녀와 왈짜는 신분상 천민과 중간계층이다. 이들은 신화 속 주인공처럼 신성한 핏줄을 타고난 것도 아니고, 영웅소설의 주인공처럼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도 않다. 전생에 선관선녀였다가 인간계에 추방당한 고전소설의 재자가인형 인물들과도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이들은 이야기 속에서 누군가를 유혹하거나 속이고, 또는 방탕하거나 바보스럽게 속아 넘어가는 부정적인 면모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앞서 살펴봤던 ‘강릉매화타령’을 비롯해 오늘 다루게 될 ‘무숙이타령’ ‘배비장타령’에서도 드러난다. 과연 이들은 누구이고, 왜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즐겼던 것인가?

판소리 속 기녀의 두 얼굴, 의양과 애랑

기녀는 신분상 관아에 속한 천민이지만 시와 가무에 능한 예술가로서 대접받은 존재다.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남성들과의 자유분방한 교류가 가능했기에, 양반 남성들의 연애 대상이었다. 드물게 일부는 양반 또는 양민 부자들의 경제적 후원에 힘입어 속신해 소실이 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여러 문학작품 속에서 기녀는 한편으로는 똑똑하고 재주가 많은 여성으로, 또 한편으로는 연애 대상인 유혹적이고 위험한 여성으로 두 얼굴을 가진 존재로 상상돼 왔다.
판소리 속에서 활약하는 기녀들도 ‘열녀형’과 ‘유혹형’으로 구분된다. ‘열녀형’은 춘향이 대표적이지만, ‘무숙이타령’의 의양 역시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한 기녀다.
장안의 갑부인 김무숙은 기생 의양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무숙은 방탕하기 그지없는 인물인데, 그것을 알고도 의양은 무숙의 마음을 받아들여 그의 첩이 된다. 의양은 무숙에 대한 의리와 정조를 지키려 애쓰는 인물이다. 주변의 온갖 오입쟁이들이 그녀를 비웃으며 회유하고자 하나 결코 넘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무숙의 방탕함이 날로 심해지자 의양은 무숙의 처에게 편지를 보내 상황을 알리고 무숙을 개과천선시키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래야만 자신의 신분 상승은 물론 경제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양이 택한 방법은 ‘충격요법’이다. 그녀는 계획적으로 무숙이 돈을 소비하게 해 재산을 모두 탕진한 것처럼 꾸민다. 거지가 된(줄 아는) 무숙이에게 의양은 자신의 허드렛일을 하는 중노미 일을 맡기고 온갖 잡일을 시키다가 별안간 이별을 통보한다. 무숙이 차라리 자살하기로 결심하자 의양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계획한 것임을 밝히는데, 그 후 무숙은 잘못을 뉘우치고 모범적인 인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한편 이와 달리 판소리에는 팜파탈적인 모습으로 남성들을 유혹해 망신당하게 만드는 기녀들도 등장한다. ‘배비장전’의 애랑이 바로 이 ‘유혹형’ 기녀다. 애랑은 ‘색태는 월서시, 양태진을 압도하고 지혜는 남자로 말하면 진유자에 내리지 아니하고 간교는 구미호가 환생’한 듯한 인물이다. 그녀는 정비장의 수청기생이었는데, 그와 이별할 때 그를 살살 꾀어 이별 선물로 온갖 물건을 다 받아낸다. 정비장은 상투도 잘라주고 심지어 앞니도 하나 빼 준다.
이 광경을 우연히 목격한 배비장은 정비장을 비웃으며 자신은 기생을 멀리하는 도덕군자라 자부하지만, 그도 결국 애랑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배비장이 애랑의 집에 찾아갔을 때 갑자기 방자가 애랑의 남편 행세를 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알몸으로 궤짝에 들어가게 된다. 궤짝은 관청 마루에 옮겨져 결국 배비장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궤짝 밖으로 나와 망신을 당한다. 이는 ‘강릉매화타령’에서 매화가 강릉 부사와 공모해 골생원을 유혹하고 망신시킨 것과도 유사하다.
열녀형이든 유혹형이든 위의 사례들은 모두 기녀들에게 남성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건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판소리가 아니더라도 많은 문학작품이 남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녀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녀 중에서는 순종이 승하하자 장례 광경을 보고 ‘신민된 의가 중해 애통한 심정’을 읊거나 ‘공동묘지 높고 낮은 저 무덤엔’ ‘양반 상놈 구분 없다’라는 사회적 의식을 드러낸 금홍과 같은 인물도 있다. 단순히 남성의 연애 대상으로만 생각해 온 기녀들에게 우리가 미처 몰랐던 모습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기녀가 길들인 탕아, 왈짜

한편 기녀만큼이나 조선 후기 시정 문화의 풍류 지향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인물 유형이 판소리 속 ‘왈짜’들이다. 기생처럼 왈짜 역시 한시·가사·한문단편 등 우리 문학작품의 전반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19세기 소비 지향적 시정의 중간계층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인물군이다. 왈짜는 신분상으로는 우리가 통상 ‘여항인’이라 부르는 중인 계층인데, 18세기 여항인들이 고급스럽고 지적인 풍류를 추구했다면 19세기 왈짜들은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놀이 문화를 향유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왈짜들을 대표하는 것이 앞서 살펴본 ‘무숙이타령’의 주인공 무숙이다. 무숙은 중촌의 장안 갑부로 어릴 적부터 글과 활쏘기 등을 익혔고 노래에도 재능이 있어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인물이다. 풍족한 성장 환경 덕인지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가졌으나 실상 지식은 없고 허랑한 마음을 지니기도 했다.
이 작품의 전반부에는 무숙이가 온갖 놀음을 통해 돈을 쓰는 유흥 양상이 아주 상세하게 펼쳐져 있다. 그는 왈짜 중의 대방 왈짜로, 온갖 귀한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를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인물이다. 학슬안경에 고급 쌈지주머니, 희귀한 보석과 비단으로 몸을 두르고 온갖 귀하고 맛있는 음식만을 먹는다.
휘황찬란한 잔칫상 옆에는 유리 양각등과 화산관 병풍이 있는데, 그 옆에서는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한다. 실제로 왈짜들은 당대 문화예술을 장악한 문화 권력자인 동시에 문화의 생산과 소비를 주도하는 문화 창조자이기도 했다. 왈짜들의 모임에는 항상 시정 상인이나 한량과 함께 각 분야의 최고 예술인들이 자리했다. 의양이가 방탕한 무숙이를 탕진시켜 깨우쳐 주기 위한 계교로 ‘호기 있게 노는 것과 돈 쓰는 구경을’ 하고 싶다고 요청해 유산놀음과 선유놀음을 벌이는 대목에서도 예인들이 동원되어 한바탕 선율을 연주하기도 한다.
‘무숙이타령’에서 묘사된 왈짜들의 호화로운 놀이 문화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숙종실록에 수록된 사헌부의 논계에는 “별감 송정희라는 사람이 6~7명의 불량한 젊은 사람들과 창녀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지르고 술과 고기가 낭자”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왈짜의 놀음은 고전소설 『이춘풍전』, 연암 박지원의 『광문자전』에도 등장한다. 이들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유흥문화에 대한 대리 체험을 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돈에 대한 윤리나 철학의 필요성을 촉구하기도 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진다.
이처럼 기녀나 왈짜는 영웅적이고 이상적인 인물 군상은 아니지만, 인간이라면 품을 수 있는 다양한 욕망과 인간이기에 범할 수 있는 실수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신분 상승과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욕망,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고픈 욕망과 성에 대한 욕망을 판소리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세속적 욕망의 정도를 ‘제어’해 한 인간이 공동체 내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할 뿐이다. 이렇듯 완벽하지 않은 인물들을 따뜻하게 포용하고 있는 판소리가 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아니 오히려 오늘날에 더 필요한 것임에 분명하다.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그림. 김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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