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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Ⅱ <역동과 동력>
‘역동’적 전환과 협연자라는 ‘동력’
<역동과 동력>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연주자들, 즉 비르투오소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원래 3월에 예정된 공연이었지만, 코로나19로 취소됐다가 다시 올랐다. 4곡의 협주곡에는 기타리스트 박규희, 가야금 연주자 지순자, 하피스트 황세희, 정대석과 5명의 거문고 연주자(오경자·정누리·주윤정·유연정·이선화)가 함께했다.

음악사에서 연주자들은 발전의 ‘동력’이자 ‘역동’의 흐름을 만든 주체였다. 명창들은 뛰어난 가창자이자 판소리의 흐름에 첫길을 낸 창작자였다. 산조의 명인들은 유파의 세계를 발전시켰고, 자신만의 기교와 기법을 담은 산조를 세상에 남겼다. 명창과 명인들, 그러니까 한국 전통음악의 비르투오소는 단순히 작품을 거쳐 간 존재가 아니라, 작품과의 합일을 통해 음악의 흐름을 바꾼 존재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공연에 함께한 이들은 협주곡들을 빛내는 존재들이자, 협주곡으로 인해 빛난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이번 공연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2021년 <대립과 조화:콘체르토>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위한 협주곡(콘체르토)을 선보인 시간으로 임현정(피아노)·김일구(아쟁)·김정승(대금)·홍진호(첼로)·신동일(오르간)이 함께했다.
도널드 워맥의 ‘서광’을 제외하면 4곡의 협주곡이 국악기인 가야금과 거문고, 서양 악기인 기타와 하프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현악기’가 국악관현악단을 교두보 삼아 만난 시간이기도 했다.

각기 다른 소리를 동력 삼은 협주곡들이 펼쳐지다

첫 곡 ‘서광’은 2021년 <이음 음악제>에서 위촉·초연된 도널드 워맥의 곡이다. 초연곡은 연주를 통해 진화하는 법이다. 롯데콘서트홀에서 막을 연 초연이 곡의 구조를 익힌 순간이었다면, 이번에는 악단과 단원들이 초연 때보다 ‘체화’된 연주를 들려주었다. 안정감이 잡혔고, 작곡가가 의도한 부분들이 섬세하게 들려왔다. 이어 4곡의 협주곡이 이어졌다.
호아킨 로드리고(1901~1999)가 작곡한 ‘아란후에스 협주곡’은 이고운이 편곡했고, 기타리스트 박규희가 연주에 참여했다. 원곡의 2악장은 KBS2 <토요명화>의 오프닝 시그널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이 협주곡에 대한 관객의 기대가 컸다. 2악장 도입부에서 애잔한 향수를 일으키는 잉글리시 호른 선율을 어떤 악기가 연주할까 궁금했는데 잔잔한 소리의 생황이 이를 대체해 관객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향수의 시간을 불러왔다.
기타는 피아노와 함께 ‘작은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악기다. 그래서 이 곡은 기타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진행되는 부분보다 기타 독주의 묘미를 살린 대목의 비중이 높고, 독주 중간에도 국악관현악이 소소하게 함께하거나 잠깐씩 연주하는 ‘교대의 협주곡’이다. 명곡을 국악관현악으로 듣는 묘미가 있었으나, 기타 독주 뒤에 이어지는 국악관현악의 음향과 결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성금연류 가야금산조 협주곡 ‘삶’(이정호 편곡)은 지순자가 지닌 산조에 대한 경륜과 국립국악관현악단에 배어 있는 민속음악의 에너지가 잘 결구(結構)된 연주였다. 회상해 보면 2021년 <대립과 조화:콘체르토> 공연에서도 박범훈이 작곡한 ‘김일구류 아쟁산조를 위한 협주곡’이 현장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끈 기억이 난다. 김일구가 직접 협연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국립국악관현악단에 녹아 있는 민속음악의 에너지가 협연자와 시너지를 형성한 것이었는데, 이번 공연에서도 악단의 이러한 공력이 돋보였다.

김희조(1902~2001)는 황병기의 17현 가야금 독주곡 ‘춘설’이 서양식 관현악단과 함께하도록 편곡했고, 손다혜는 이번 공연을 위해 하프와 국악관현악단이 함께하도록 ‘춘설’을 편곡했다. 하프와 국악이 함께할 수 있는 곡은 드물다. 1995년, 마르틴 에버라인(Martin Eberlein)이 해금과 하프를 위한 2중주를 작곡·발표하는 등 소소한 편성은 있었지만, 하프 연주자를 협연자로 내세워 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경우는 쉽게 보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번 공연은 국악관현악의 차세대 협연 악기로 하프가 시험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춘설’에 녹아 있는 황병기의 음악적 유산, 손다혜의 꼼꼼한 편곡력,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하프 속에 잠재된 동양적 감각을 꺼내고 다듬은 황세희의 손길. 가야금의 ‘황’병기와 하프의 ‘황’세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서양 현악기가 만나는 ‘황씨’ 가문의 음악적 일가를 이룬 것 같았다. 하피스트 황세희의 노력이 빛났다.
끝 곡은 정대석의 ‘고구려의 여운’이었다.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이기도 한 정대석은 대부분 독주곡으로 낳은 곡을, 이후 중주로 넓히고, 관현악 협주곡으로 확장하는 형식을 취한다. ‘고구려의 여운’은 거문고 2중주로 태어난 곡인데, 이번 공연에는 3명씩 한 조를 이루어 6명의 중주단이 협연진으로 함께하도록 재탄생시켰다. 6대의 거문고가 선보이는 음향의 부피감과 웅장함이 느껴졌다. 후반부에서 현을 거칠게 긁는 주법은 사물놀이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듯했다. 곡의 제목처럼 고구려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거문고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대석 특유의 섬세한 주법이 보이지 않아 내심 아쉬움이 남았다.

편곡의 힘, 악단의 공력

이번 공연에서 ‘편곡’의 의미를 간과해선 안 된다. 국악관현악의 역사에서 ‘편곡’은 ‘작곡’과 함께 작품을 생산한 중요한 동력 중 하나다. 오늘날에도 독주곡이 협주곡으로, 실내악이 관현악으로, 독창이 합창으로 편곡되며 국악관현악의 곳간을 채우고 있다. 편곡이란 원곡을 재현하되, 이러한 원본을 ‘다르게’ 보여주는 음악 행위다. 편곡에 임하는 작곡가는 원곡을 ‘반복’하되, 원본과 다른 ‘차이’를 반드시 불어넣어야 한다. 산조 협주곡은 ‘산조’를 반복하되 뭔가 다른 차이를 함의해야 하고, 국악관현악단에 걸맞게 편곡된 ‘아란후에스 협주곡’은 원곡을 보여주면서도 원곡과 다른 ‘그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 공연이 협연자들을 전면에 내세운 공연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일구는 음악적 전경(前景)을 받쳐줄 후경(後景)으로서의 국악관현악의 내공과 공력이 없다면 <역동과 동력> 같은 공연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려준 시간이었다.
따라서 이번 공연은 비르투오소를 내세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기교를 조명할 작품을 ‘편곡’하고, 그들의 기교와 함께 호흡할 국립국악관현악단의 ‘공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한마디로 협연자들의 ‘역동’적인 연주, 이를 위한 작곡가들(이고운·이정호·손다혜·정대석)의 편곡 ‘동력’, 그리고 지휘자와 국악관현악단의 ‘공력’이 한 무대에 공존한 시간이었다.

글. 송현민 음악평론가이자 월간 『객석』 편집장.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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