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스밍

칼럼니스트 한동윤의 플레이리스트
연말에 어울리는 음악
몰라보게 수척해진 달력을 마주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법 묵직했는데, 이제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미풍에도 쉽게 나풀거린다. 매년 한 달, 한 달, 내 손으로 살을 떼고 있음에도 여전히 새삼스럽다. 달력은 그렇게 야윈 모습으로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알린다.

연말이 다가오면 아쉬움, 허전함, 새해에 대한 기대감 등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또한 개인적인 결산, 겨우살이 준비, 새해 계획 같은 작업을 하느라 머리와 몸도 조금은 바빠진다. 만감이 교차하고, 챙겨야 할 것이 늘어나는 순간에도 음악을 곁에 두는 이가 많을 것이다. 연말에 특히 듣고 싶어지는, 연말과 궁합이 잘 맞는 음악을 소개한다.

Earth, Wind & Fire ‘September’

매년 9월이면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는 미국 밴드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9월(September)’을 틀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 제목 때문에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9월이 되면 ‘9월(September)’을 듣는 일이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실상 이 노래의 화자는 12월을 맞아 지난 9월의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화자는 9월 21일에 한 사람과 즐거움을 나눴다고 밝힌다. 마음이 울렸고, 영혼이 음악에 맞춰 노래했으며, 별들도 밝게 빛났다. 화자는 그와 춤을 췄다고 얘기하는데, 이는 잠자리를 가졌음을 일컫는 완곡한 표현이다. 석 달이 지난 지금, 화자는 9월에 나눈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깨닫는다.
노래에 결말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곡의 분위기가 밝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둘이 잘됐을 듯하다. 이런 이유로 노래 곳곳을 장식하는 풍성한 관악기 연주는 결실을 본 둘을 축하하는 팡파르처럼 들린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면서 짬짬이 자기 계발에 힘쓰는 사람도 많다. 연말이 돼서 한 해를 되돌아봤을 때 어떤 일을 완수했다면 성취감에 뿌듯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9월(September)’은 칭찬의 축포가 된다.

네스티요나 ‘폭설 (Piano Ver.)’

12월은 겨울에 들어서는 달이다. 곧 1년 만에 눈과 재회하게 된다. 누군가는 눈이 소복이 쌓인 아름다운 풍경을 고대하지만, 어떤 이들은 눈이 조금만 내리길 간절히 바란다. 제설 작업에 특히 신경 써야 하거나 눈 때문에 크고 작은 피해를 겪어본 사람들은 폭설이 끔찍하기만 하다.
록 밴드 네스티요나가 2008년에 발표한 ‘폭설’은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이의 애절한 마음을 소재로 삼았다. 전 애인은 노래의 화자를 이미 깨끗하게 잊었을지라도 화자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겠다고 한다. 아마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에 이별했는지 화자는 “우리의 마지막 날과 같은 모습으로”라고 말하며 그가 ‘내려온다’라는 표현을 쓴다. 가사에 눈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지만, 제목 때문에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찾아 듣는 사람이 많다.
오리지널 버전은 폭설을 소리로 나타내려고 한 듯 박력을 내보인다. 반면에 피아노 연주 버전은 유약한 연주로 서정성을 부각한다. 전 연인을 향한 집착이 깃든 오리지널 버전과 달리 피아노로만 이뤄진 버전은 연주가 상당히 차분해서 체념한 모습이 느껴진다. 앨범에는 피아노 버전이 마지막 트랙으로 자리하고 있으나, 이 곡에 이어서 오리지널 버전을 들으면 색다른 인트로가 될 듯하다.

The Mamas & the Papas ‘California Dreamin’

연말마다 취약계층은 올겨울은 또 어떻게 날지 걱정이 앞선다. 더운 날에는 문이라도 열어둘 수 있지만, 추위는 감당하기가 어렵다. 이들에게 월동 필수품인 연탄과 등유 가격도 올라서 근심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취약계층은 하루빨리 따뜻한 곳에서 지낼 수 있기를 염원할 것이다.
1963년 겨울, 나중에 혼성 4인조 마마스 앤드 파파스(The Mamas & the Papas)로 활동하게 되는 미셸 필립스(Michelle Phillips)도 따뜻한 곳에 가기를 바랐다. 그녀는 1962년에 싱어송라이터 존 필립스(John Phillips)와 결혼한 후 뉴욕에서 생활하며 노래를 만들었다. 기후가 온화한 캘리포니아주 출신인 부부에게 뉴욕의 겨울 공기는 더욱 매섭게 느껴졌고, 캘리포니아주를 그리워하는 ‘California Dreamin’을 만들게 된다.
네 멤버의 하모니는 따뜻한 기운을 빚어내지만, “나뭇잎은 모두 갈색이고, 하늘은 잿빛이죠.” 같은 가사 때문에 노래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쌀쌀하다. 특히 간주의 플루트 솔로가 스산함을 곱절로 만든다.
일반적으로 익숙한 악기를 원하지 않았던 존 필립스는 노래를 녹음할 때 같은 스튜디오에서 색소폰 연주자이자 플루트 연주자인 버드 섕크(Bud Shank)를 만나 연주를 요청했다. 버드 섕크는 즉흥으로 플루트를 연주했고, 그 한 번의 연주로 멋진 간주가 완성됐다.

김성재 ‘봄을 기다리며’

연말이 되면 평소보다 휴식이 더 간절해진다. 피로가 누적된 탓도 있겠고, 한층 차가워진 공기가 몸을 무겁게 만드는 영향도 있겠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연일 부푼다.
1995년에 발매된 김성재의 유일한 솔로 앨범 중 ‘봄을 기다리며’도 쉼을 갈구한다. 그와 함께 듀스(Deux)로 활동했던 이현도가 작사했지만, 김성재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1993년 데뷔한 듀스는 만 2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1995년 해체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음에도 정규 앨범 석 장, 비정규 앨범 한 장, 총 넉 장의 앨범을 냈다. 이때 가요계는 공백기 없이 바로바로 다른 노래로 활동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듀스는 춤도 격렬했다. 심신이 고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지쳤다고 직접적으로 피로를 호소하는 가사와 다르게 곡은 리듬감이 있다. 여기에 곁들이는 과하지 않은 전자음, 타악기가 노래를 가볍게 만든다. 간주와 후주를 담당하는 색소폰으로 곡은 온기를 유지한다. 하지만 김성재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에 ‘봄을 기다리며’는 언제나 슬프게 다가온다.

The Brand New Heavies ‘You Are the Universe’

연말은 많은 사람에게 참회의 순간을 갖게끔 한다. ‘올해에는 자격증 꼭 따야지!’ ‘이번에는 기필코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2022년을 시작하며 이런저런 목표를 세웠건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획했던 일들은 1월에 덩그러니 남겨둔 채 나만 홀로 12월에 와 있다. 데자뷔가 아니다. 작년에도 이랬다. 또 한 번 무책임하고 게을렀던 자신을 타박한다. 괜찮다. 목표를 세웠다는 것은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어나가려는 의지가 있다는 뜻이니까. 재정비하고 다시 엔진을 켜면 된다.
뜻을 품은 이들이나 의기소침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애시드 재즈 밴드 브랜드 뉴 헤비스(The Brand New Heavies)의 ‘You Are the Universe’를 들으면 힘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넌 우주야. 네가 할 수 없는 건 없어.” “네가 그걸 상상한다면 성취할 수 있어.” “넌 인생에서 승객이 아니라 운전사야.” 이런 긍정적인 가사로 기운을 북돋운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이들한테도 자양제가 될 만하다.
희망적인 내용이 담겼으니 당연히 곡 분위기도 흥겹다. 처음에는 다소 잔잔한 리듬으로 흐르다가 각 절의 마지막과 후렴에서 멜로디와 톤이 고조된다. 객원 보컬 시에다 개릿(Siedah Garrett)은 수많은 가수의 백업 보컬로 활동한 베테랑답게 반주와 호흡을 척척 맞춘다. 간주의 베이스 기타 솔로와 후반부 시에다 개릿의 애드리브도 근사하다. 노래를 들은 사람 중 다수가 속으로 이렇게 외치지 않을까 싶다. ‘그래! 난 우주야. 할 수 있어!’

글. 한동윤 대중음악평론가. 세태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예술가를 향한 애정이 깃든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힙합은 어떻게 힙하게 됐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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