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하나

국립무용단 <2022 무용극 호동>
과거에 비춰 현재를 바라보다
국립무용단은 창단 60주년을 맞이해 초대 단장인 송범의 원작을 동시대의 감각으로 재창조한 <2022 무용극 호동>을 발표했다. 과거를 비추어 이 시대의 사회와 예술을 담아낸 작품을 통해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을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한국무용에 기반한 동시대적 창작이라는 일관된 목표 의식

국립무용단(예술감독 손인영)은 1962년 창단돼 한국무용·발레·현대무용을 아우르는 공연을 펼치다가 1972년 장충동 국립극장 건립 후 지금과 같이 한국무용으로 전문화된 국립무용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장충동 국립극장을 지켜온 유일한 국립무용 단체로서 한국의 전통 춤사위에 근거한 현대 감각의 새로운 창작이라는 굵직한 노선을 일관되게 밟아왔다. 2010년대 들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무용에 기반을 둔 동시대적 창작’이라는 향상된 목표를 설정했으며 작금에 이르러서는 한국무용계의 컨템퍼러리댄스화(化)를 이끄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컨템퍼러리댄스라 함은 무용 분야 간의 경계를 부수고 타 장르와 융복합을 활발하게 시도하는 동시대의 주도적인 창작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무용계에서는 여전히 급진적인 창작 스타일이라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으나, 서유럽에서는 1980년대부터 생성되고 정착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에 현대무용계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발레계와 한국무용계로 확산됐다.
놀라운 점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던 국립무용단이 2010년대부터 이러한 한국무용의 컨템퍼러리화(化)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세 몽탈보나 테로 사리넨 같은 유럽의 현대무용가에게 안무를 의뢰하기도 하며, 국내 무용계의 역량 있는 젊은 안무가를 섭외해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2022 무용극 호동>은 국립무용단의 최근 예술적 행보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데,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구성으로 확장된 면모를 드러낸 점이 그러하다. 거기에 조명·영상·무대장치·음악의 융복합도 두드러진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국립무용단원 중에서 창작적 가능성을 지닌 이들을 발탁해 안무가로 성장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창작 역량을 인정받은 국립무용단원 정소연·송지영·송설이 안무를 맡아서 이끌어갔다는 점에서 최근 행보에 정점을 찍는다.

국립무용단의 대표작 <왕자 호동>의 2022년식 재창조

국립무용단의 역대 단장을 살펴보면 송범·조흥동·최현·국수호·배정혜·김현자 등 한국무용계에 한 획을 그은 창작자가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송범(1926~2007)은 초대 단장이자 가장 오랜 기간 재직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만큼 국립무용단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송범의 <왕자 호동>은 1974년 초연돼 무용극을 하나의 장르로 정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재구성한 <그 하늘 그 북소리>(1990)까지 국립무용단의 주요 작품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송범의 두 작품을 동시대의 감각으로 재창조한 신작이 바로 10월 27~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소개된 <2022 무용극 호동>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등장하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전쟁과 사랑과 죽음이라는 극적인 요소가 어우러져 지금도 널리 주목받는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다. 호동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조국을 배반하는 낙랑은 아비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에 깊은 죄책감을 느낀 호동이 자결하는 비극적 전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며, 1974년 초연된 <왕자 호동>에도 진득하게 묘사돼 있다. 2022년식 재창조에서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넘어 인류 보편의 갈등에 대한 이미지까지 중첩하고 있다.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주요 부분을 춤·조명·영상·무대장치·음악 등을 통해 이미지화해 놓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창작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춤과 조명, 영상, 무대장치, 음악의 융복합

<2022 무용극 호동>은 국내 뮤지컬계를 대표할 만한 연출가이자 프로듀서인 이지나의 대본과 연출을 비롯해 원재성의 조명 디자인, 박은혜의 무대 디자인, 이셋(김성수)의 음악이 춤과 함께 어우러진 상당한 규모의 융복합 작품이다. 연출가 이지나의 영향은 작품 전체에 나타나는데 특히 조명·영상·무대장치 같은 시각효과 면에서 두드러진다. 각도·위치·모양·색감을 갖춘 LED 조명은 그야말로 강렬하고 현란하게 무대를 장악했다. 춤과 창의적 교감을 하는 부분이 곳곳에 있지 않았다면 일방적인 조명 버라이어티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정도다. 이러한 조명의 강렬하고 다채로운 변화에 춤이 잠식당하지 않은 이유는 무용수의 내공, 정확히 말하면 밀도 있는 몸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상은 처음부터 전쟁과 관련된 이미지를 통해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인류 역사의 갈등을 되짚게 한다. 상징적이거나 은유적으로 표현된 장면에서는 역사적 전개를 텍스트로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듯 영상은 적절하게 작품의 긴장감을 돋우거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선에서 활용됐다. 3단으로 오르고 내리는 바닥이라든지 메탈 질감의 거대한 파티션 같은 무대장치도 현대적인 세련미를 더한다. 작곡과 음악감독을 맡은 이셋(김성수)은 뮤지컬과 대중음악을 넘나들며 활약한 만큼 여기서도 그러한 장점을 드러냈다. 전자음악을 활용해 우리 전통 장단을 새롭게 풀어냄으로써 원전의 동시대적 재창조라는 커다란 조직적 구현에 동참한 것이다.
모든 요소가 미니멀한 감각을 갖추면서도 버라이어티한 조직력을 보였고, 이로써 예술성과 대중성을 함양한 융복합 대작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예술단이 같은 주제를 현대무용으로 풀어냈다면 국립무용단은 뮤지컬 연출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다변적 융복합 추세를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

국립무용단의 진정한 주체로서 단원들

40여 명의 무용수는 한국무용의 본질을 갖추면서도 전통적인 춤사위를 고수하기보다는 젊은 감각의 현대무용적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다채로운 추상적 움직임으로 인해 그 시대의 그리고 이 시대에도 만연한 젊은 영혼들의 복잡미묘한 갈등에 대한 주제 의식은 두드러지게 된다. 남자와 여자의 듀엣에서는 표현적인 신체 움직임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군무에서는 철저하게 주요 전개를 이미지화한 현대무용적 동작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창작 경향을 읽을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무대에 서서 움직이는 장면으로, 동작이나 구성이 겹쳐서 일련의 실행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한 많은 단원을 한 무대에 세우려는 거시적 의도인지, 순수 무용과는 다른 뮤지컬적 춤 연출을 반영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인원을 나누고 공간을 확보한 후 실행했다면 무용수가 밀도 있게 춤을 잘 춘다는 것 이외도 안무적 디테일까지 확인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국립무용단원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체로서 한국춤의 고유한 위상을 지켜온 존재들이다. <2022 무용극 호동>은 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만들어졌다는 점에 가장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안무를 맡은 정소연·송지영·송설을 비롯한 43명(단원 38명, 인턴 4명, 객원 1명)의 출연진 중에서 총 41명에 달하는 국립무용단원이 참여했다. ‘모두가 호동이고 모두 낙랑’이라는 슬로건은 모든 이가 이야기의 주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더 나아가 단원 모두가 작품의 주역이며 국립무용단의 주체라는 점을 은유하리라 본다.

글. 심정민 무용평론가이자 비평사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춤평론가회장을 맡고 있다. 강의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경영지원센터·예술의전당 등 여러 기관에서 심사와 평가를 해왔고, 『서양 무용비평의 역사』 『무용비평과 감상』 등의 저서를 집필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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