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
삶을 바꾸는 멜로디
‘사우스 LA’, 즉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쪽 지역을 묘사하는 흔한 표현들이 있다.
‘빈민가, 경찰차, 사이렌, 그라피티….’ 멀게는 1992년 LA 폭동의 진원지였고,
히스패닉계와 흑인 인구가 전체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이 렌트 하우스에 살고 있다.
2007년, ‘슬럼’이라 불리는 이곳에 기적 같은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음악이 아이들의 삶에 불러온 기적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2007년 ‘LA 유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Youth Orchestra LA, 줄여서 YOLA라 부르는데, YOLA의 주요 구성원은 사우스 LA에 살고 있는 히스패닉계와 흑인의 자녀들이었다. YOLA 프로젝트를 맡은 담당자들은 음악의 힘을 믿었다. 가난하고 치안이 불안한 지역 한가운데로 들어가 단원을 모집했다. 관을 신뢰하지 못하는 부모를 설득하고, 무상으로 악기를 지급하며 가르쳤다. 그렇게 LA 유스 오케스트라가 창단될 수 있었다.
음악의 힘을 믿은 건 구스타보 두다멜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비슷한 경험을 지닌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LA의 실험에 앞서 베네수엘라에는 ‘엘 시스테마’가 있었다. 엘 시스테마의 구성원도 80퍼센트 이상이 베네수엘라의 극빈층 자녀였다. 열 살 때 엘 시스테마에 속해 바이올린 교습을 받을 수 있었던 두다멜은 계속 음악을 공부해 열여덟 살의 나이에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제 두다멜은 클래식 지휘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 하나다.
두다멜에겐 이런 서사가 있었고, 자신도 이 서사를 잊지 않았다. 2009년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된 두다멜은 기꺼이 LA 유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역할을 병행했다.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취임 연주회보다 먼저 LA 유스 오케스트라의 데뷔 연주회를 열 정도로 프로젝트에 진심이었다. YOLA 프로젝트가 가진 원대한 목표가 있었겠지만 어쩌면 두다멜의 마음속엔 소박한 바람이 자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음악을 통해 얻은 기쁨을 더 많은 아이가 느꼈으면’ 하는 하고 말이다.
엘 시스테마에서 시작해 YOLA가 일으킨 긍정적 결과는 미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만 명이 넘는 소외계층 유소년들이 각 지역의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과 만나지 못했다면 이 만 명이 넘는 청소년의 삶은 어땠을까. 상당수의 아이는 마약을 팔거나 마약 중독자가 되어 살아갈 것이다. 물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는 이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공장에서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직장을 다닌다 해도 음악을 취미로 듣거나 연주하며 사는 삶은 분명 다를 거라 확신한다. 음악이 삶을 얼마나 충만하게 하는지 그들은 이미 유소년 시절에 경험했기 때문이다.

  •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오케스트라 - 엘 시스테마>

성장과 변화, 그 이상의 경험

어린 시절의 문화 향유 경험은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단 한 번의 경험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의 청소년에겐 그런 경험을 할 기회조차 얻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특히 케이팝이나 대중음악이 아닌 클래식이나 국악을 사례로 들면 현실은 더 멀어진다. 한국의 방송 매체를 보면 한국에서 음악은 케이팝과 트로트만 존재하는 것 같다. 방송에서 클래식은 늘 정형화된 음악으로 소개돼 왔다. 그러면서 클래식과 국악 음악회 등에는 ‘문턱’이 존재하게 됐다. 그 문턱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국악과 클래식은 계속해서 고루한 음악이라는 이미지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다소 과거의 조사이긴 하지만 2000년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이 미래에 자주 하고 싶은 여가 활동에는 ‘영화·연극 관람, 음악회 참여’가 65.9퍼센트라는 높은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닌 ‘미래에 하고 싶은’이란 문구가 아프게 다가온다. 20년이 지난 지금 청소년의 현실은 더욱 각박해졌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경험해야 하는 것들이 여러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고 미래로 미뤄두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기에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어린이 음악회 <엔통이의 동요나라 2>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국립극장의 캐릭터인 엔통이와 함께 친숙한 동요를 국악 연주로 선보이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 <엔통이의 동요나라 2>는 2021년 초연됐다. 팬데믹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객석 점유율 96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어린이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음악회가 다시 돌아온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섬집 아기’처럼 친숙한 동요로 큰 호응을 얻었던 초연에 이어 여러 창작 동요를 국악기의 선율로 선보일 예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그동안 방송이나 유튜브에선 쉽게 볼 수 없었던 국악기를 직접 보고, 국악기가 내는 소리를 직접 듣는 경험이 유년기의 아이들에게 벅찬 하루로 남기를 바란다.

  • 2023년 <엔통이의 동요나라 2> 포스터
  • 2022년 <엔통이의 동요나라 2>

다양성이 공존하는 무대

<엔통이의 동요나라 2>가 유년의 경험을 위한 공연이라면 <2023 함께, 봄>은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공연이다. 한국판 엘 시스테마, 혹은 한국판 YOLA라 할 수도 있겠지만,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는 문턱을 한 번 더 낮추었다.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는 뷰티플마인드 뮤직 아카데미의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국내 최초 장애·비장애 통합 오케스트라로 학생들의 연주 실력 향상과 공동체 정서 함양 및 사회성 향상을 위해 창단되었다. 함양의 사전적 정의는 “능력이나 품성 따위를 길러 쌓거나 갖춤”이다. 단원들의 ‘연주 실력’이 ‘능력’이라면 ‘공동체 정서’와 ‘사회성’을 갖추는 것이 ‘품성’이다.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다양한 장애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통한 성장의 기록을 써나가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국립극장은 4월 9일, 싱가포르 장애 청소년의 음악을 통한 성장 여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매듭> 상영회도 진행한다.
2010년 창단 이래 실력을 벼려온 뷰티플마인드 오케스트라는 <2023 함께, 봄>을 통해 2022년 첫 공연 이후 두 번째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첫 공연에서 출중한 실력으로 호평받았던 이들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아닌 피아졸라의 ‘망각’을 첫 곡으로 선택하며 폭넓은 레퍼토리까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 2023년 <2023 함께, 봄> 포스터
  • 2022년 <함께, 봄>

함께를 위한 예술, 모두를 위한 공연

<2023 함께, 봄>의 홍보 문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무장애’ 공연이라는 표현이었다. 공연을 소개하는 영상 역시 수어가 중심에 있었다. 지난해 방탄소년단의 콘서트에서 공연만큼이나 화제가 된 건 청각장애가 있는 관객 두 명을 위해 고용된 수어통역사였다. 이미 방탄소년단은 ‘Permission To Dance’ 뮤직비디오에서 국제 수어로 구성된 안무를 추며 메시지를 전달한 적도 있다. 그 콘서트를 계기로 이른바 ‘배리어프리Barrier free’란 말이 다시 회자됐다. 배리어프리는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생활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 장애물이나 심리적 장벽을 없애기 위해 실시하는 운동 및 시책을 뜻한다.
방탄소년단의 콘서트를 계기로 배리어프리를 이야기할 때 국립극장의 무장애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시도가 긍정적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2023 함께, 봄>뿐 아니라 <엔통이의 동요나라 2>에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이 포함된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 1장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적어도 ‘문화적’ 생활 영역에서 장애인이 차별받아 온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영화 관람을 제외하고 장애인이 공연 및 전시를 관람한 비율이 5퍼센트를 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런 현실에서 국립극장의 ‘무장애 공연’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함께, 봄>이라는 제목은 더 와닿는다.
따뜻한 봄날, 모두가 함께 모여 볼 수 있는 공연이 국립극장에서 열린다. 영혼을 울리는 멜로디가 울려 퍼지면, 그 누군가에게는 삶을 바꿀 만큼 특별한 하루가 시작된다. 음악이 가진 위로와 치유의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글. 김학선 2000년 인터넷음악방송국 ‘쌈넷’ 기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한겨레신문 대중음악 전문 객원기자로 일했고,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EBS <스페이스 공감> 기획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 『케이팝 세계를 홀리다』 『한국 팝의 고고학 1990』(공저), 『멜로우 시티 멜로우 팝』(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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