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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무용단 <넥스트 스텝Ⅲ: 안무가 프로젝트>
경험에서 길어 올린 춤
<넥스트 스텝>이 어느덧 세 번째 무대를 맞았다.
안무가의 범위를 확대하고, 다양한 창작 스타일과 사유 방식을 지닌 안무가가 모였다.
이들의 춤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국립무용단의 <넥스트 스텝Ⅲ: 안무가 프로젝트>는 차세대 안무가 발굴을 목표로 하는 무대다. 안무가 발굴은 모든 춤 장르에서 공을 들이는 문제이지만 국립무용단과의 작업이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안무가는 한국춤의 장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동시대적인 작품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오랫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훈련받은 단원들의 몸에 밴 움직임의 규율에 어떻게 맞서거나 포용할 것인지를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안무가가 애써 내놓은 대답은 한국춤 장르의 가능성을 가늠케 할 단서가 된다. 국립무용단의 <넥스트 스텝>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지금까지의 <넥스트 스텝> 시리즈는 성공적이었다. 무용단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이재화의 <가무악칠채>가 대표적이다. 국립무용단원의 기량이 워낙 출중한 데다 오랜 시간 다양한 안무가와 작업하며 여러 가지 스타일의 작품을 경험해 온 역사가 쌓이면서 개개인의 창작 역량도 깊어졌기 때문이다.

<가무악칠채>

메아리 속에서 약동하는 생명력

올해의 <넥스트 스텝 III>은 전통공연예술 분야 창작자를 육성하는 ‘가치 만드는 국립극장-안무가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다. 민간과 협업하고 젊은 창작자 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문호를 개방해 국립무용단 내외부에서 신진 안무가를 모집했다. '안무가 프로젝트'를 통해 선발된 첫 외부 안무가는 정보경이다. 그는 선이 굵직하고 역동적이면서도 관조적인 작품을 선보여 왔다. 거친 것과 섬세한 것, 변하는 것과 머무르는 것, 그리고 역동적인 것과 고요한 것을 공존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티끌이 있어야 그를 둘러싼 광활한 공간이 비로소 의미가 있듯, 텅 빈 여백의 막막함을 활용할 줄 아는 안무가다. <넥스트 스텝 III>에서 정보경이 선보일 <메아리> 역시 여백을 강조하는 작품이다. 메아리는 벽의 존재를 드러낸다. 단단한 벽 앞에서 메아리는 희미하지만, 그 사소한 힘으로 벽을 드러낸다.
메아리는 멈추지 않는다. 공간을 떠돌며 부딪치고 되돌아오고 퍼져나간다. 어느 한 곳에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메아리에서 정보경은 실존의 조건을 보았다. 삶과 죽음, 낮과 밤, 하늘과 땅이 명확하게 나뉘면 좋으련만 그 경계는 모호하기만 하다. 살아 있는지 죽은 건지 가늠하기 힘든 경계 위에서 의식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정보경은 철새를 메아리의 메타포로 삼았다. 철새들은 거친 길 위에서 버티며 잠시 머물렀다 떠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새들은 행색이 남루하되 정신은 형형한 구도자의 모습과 겹친다.
<메아리>의 음악은 ‘수제천’을 재해석한다. 정보경은 한국춤을 추는 사람으로서 수제천을 듣다 보면 경외심이 든다고 한다. “수제천은 하늘과 같은 영원한 생명력을 꿈꾸는 음악이에요. 무박이라 춤추기는 어려워요.” 수제천에 맞춰 춤추려면 박자에 맞추기보다 무용수의 호흡으로 음악의 에너지 위에 공존할 수밖에 없다. 무용수 개개인의 역량이 중요할 테다. 그간 정보경이 ‘정보경 댄스프로덕션’을 이끌며 자신과 비슷한 무용수들과 작업해 온 점을 생각하면 단원 한 명 한 명이 춤 세계인 국립무용단에서 끌어낼 가능성이 기대된다.

<메아리> 안무가 정보경

공감의 구심점이 된 트라우마

박소영의 <라스트 댄스>는 국립무용단원인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작품이다. 국립무용단원은, 주연이 아니고선 모두가 똑같이 숨 쉬고 움직이기 위해 끝없이 반복 연습한다. 개인의 의식과 욕구를 지우고 전체의 흐름에 스며들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박소영의 말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야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내면을 지우는 게 그리 쉬울까.
무용수들은 자신으로 인해 전체에 균열이 올까 봐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때론 개인을 압도해 버린다. 박소영 역시 마찬가지다. 2016년에 국립무용단에 입단한 그녀는 수많은 공연을 소화해 내던 중 무대에서 공황장애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무대에 나가지 못할까 봐 부들부들 떨었던 순간이 고통스러운 상처로 남았다. <라스트 댄스>를 준비하며 그녀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무용단 선배 단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무대에서, 일상에서 두려웠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나요? 고통 속에서도 춤출 수 있나요?
선후배가 층층이 쌓인 국립무용단에서 비교적 나이 어린 단원인 그녀가 용기 내어 질문을 던졌고, 선배 단원이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면서 개인의 트라우마는 공감의 구심점이 되었다. 삶이 버거운 순간 어떻게 버티나요? 고통을 알아보고 안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개인이, 집단이 달라지나요? <라스트 댄스>가 던지는 질문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이지만 필연적으로 사회적이다. 국립무용단이라는 단체의 속성에서 출발해 인간 보편의 문제로 나아간다.
박소영이 <라스트 댄스>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심리다. ‘한국적인 것’이 강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적어도 20년 이상 춤춰 온 무용수들의 몸에 배어 있는 것이 한국춤이니, 작품에 의식적으로 담으려 하지 않아도 절로 담길 수밖에 없다.

<라스트 댄스> 안무가 박소영

가족 안의 우리, 우리 안의 야수들

박소영과 더불어 특히 현대적인 작품에서 활약해 온 무용수인 최호종은 한국의 가족주의를 다룬 <야수들>을 선보인다. 어느 가정이나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모순과 비극이 있기 마련이건만 ‘식구’가 ‘야수’로 돌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야수들>이라는 제목에서 화목한 가족이 점차 야수로 변해 가는 과정을 예상했으나, 최호종은 의외로 낯선 이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만난 무례한 사람을 보고 생각했어요. ‘그에게 가족이 있다면 어떨까?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가 내 가족이라면?’”
타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거두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그의 과거와 상황이 보이기 마련이다. 최호종에겐 그것이 가족의 역사, 나아가 공동체의 역사로 연결됐다. “뺏기고 탄압받고 보호받지 못했던 역사 속에서 자신을, 나아가 가족을 지키려 하다 보니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고, 타인을 짓밟고서라도 내 것을 지키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야수들이 우리 앞에 있다. 야수들은 나의 일부이자 한국인의 정체성이다.
최호종은 때론 해파리처럼, 때론 독수리처럼 움직이는 신묘한 댄서이며, 연극과 댄스필름 등 여러 장르에 관심이 많은 다재다능한 아티스트다. <야수들>은 야심만만하다. 영화 세트처럼 현실에서 뚝 떼어놓은 무대와 전자음악을 사용할뿐더러, 안무의 과정이 관습에서 벗어나길 시도한다. 그의 목표는 무용수들이 안무가가 주는 동작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자로 무대라는 공간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춤’이기 전에 춤이자 삶이길 바라는 것이다.

<야수들> 안무가 최호종

<넥스트 스텝Ⅲ>의 세 안무가는 지난해 10월 선발되어 워크숍을 거치며 차근차근 무대를 준비했다. 무대·조명 디자이너 여신동과 의상 디자이너 최인숙이 멘토가 돼 도왔다. 셋 다 뛰어난 퍼포머인 데다 안무에 대한 야심도 큰 이들이라 세 작품이 나란히 놓였을 때 발생할 시너지가 기대된다.

글. 정옥희 무용연구가이자 비평가로서 춤과 춤이 아닌 것의 경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저서로『이 춤의 운명은』과『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가 있다.

사진. ⓒ황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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