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하나

기억의 연금술, 관극시
소리의 정경을 포착하는 법
공연이라는 시간예술을 기록하고 간직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도 영상도 없던 시절, 한 편의 시로 공연의 감상을 나누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공연을 보던 시기가 있었다. 좋아서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비평에 관심을 두게 된 결정적 시간이었다. 흥미롭게도 그 시기에 내가 가장 몰두했던 건 글쓰기가 아니라 공연과 관련된 각종 홍보물과 티켓을 모으는 일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여러 번의 이사에도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버리지 못했다. 얼마 전 수년간 모은 자료를 다시 살펴볼 일이 있었다. 티켓과 홍보물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공연을 관람하던 당시의 감정과 느낌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물론 그중에는 관람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공연도 있었다.

강박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공연 티켓과 홍보물 수집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답이 스쳤지만 명료한 하나의 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휘발되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서’라는 간절함만큼은 모든 대답에 조금씩 스며 있었다. 어쩌면 나는 공연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소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반짝이고 사라지는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유’하기 위해 물성이 있는 무언가를 계속 수집한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음악과 공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수집벽도 거의 사라지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오늘날에는 공연을 기록하는 다양한 매체가 있다. 우리는 공연 실황 음반과 영상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이러한 기록을 개인이 소유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록 매체가 전무하던 시절의 사람들은 공연을 어떻게 기억하려 했을까. 휘발하는 시간 앞에 속수무책이었을까. 아니면 찰나의 순간을 복기할 수 있는 작은 단서를 어떻게든 마련하려 했을까. 과거의 사람들도 나처럼 놀람과 감동으로 가득 찬 순간을 소유하고 싶어 했을까.
과거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판소리와 연희를 보고 느낀 감상을 한시로 옮기곤 했다. 이러한 한시를 통틀어 ‘관극시’라고 일컫는다. 신위申緯, 1769~1845는 소리꾼을 자신의 집에 초대할 정도로 판소리 애호가였는데, 자신의 감상을 ‘동호東湖 6수’나 ‘관극절구觀劇絶句 12수’ 등의 한시로 남겼다. ‘관극절구12수’에는 ‘춘향가’ 소리판이 벌어지는 현장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구경꾼이 모여드는 모습을 시작으로, ‘춘향가’를 감상하는 청중의 모습, 판소리에 대한 비평, 공연이 끝난 후의 모습까지 판소리의 연행 과정을 순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수관·송흥록·염계달·모흥갑·김용운 등 당대 명창에 대한 묘사도 곁들여 소리꾼에 대한 신위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윤달선尹達善, 1822~1890은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에서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의 감정, 그리고 여항의 노래 사설은 만분의 일도 그대로 그려낼 수가 없어 진실로 붓을 놀리기가 어려웠다.”라며 판소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한시가 아닌 긴 문장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또한 송만재宋晩載, 1788∼1851는 『관우희觀優戱』에서 판소리의 음악성, 소리꾼의 기량과 연기력에 대한 견해를 유려한 한시로 담아내기도 했다. 20세기 초에도 관극시의 전통은 일부 유지되고 있었다.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은 당대 명창을 순천으로 초청해 소리판을 벌이곤 했다. 그는 명인·명창을 사진관으로 데려가 사진을 찍어 기록했으며, 판소리를 듣고 즉석에서 자신의 감상을 한시로 지어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관극시를 쓴 사람들은 특권적인 지위를 가진 존재였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정제된 언어와 그 언어를 기록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생생한 기록은 먼 과거에 판소리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 예술이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공연을 관람한 후 글을 쓰는 일은 비평가에게 가장 익숙한 일이지만 앞서 소개한 먼 과거의 기록은 가장 익숙한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목정원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품을 다 본 순간 그것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며, 기억도 금세 바스라진다. 그러므로 대개 공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가쁜 호흡으로 이루어진다. 흐릿해지기 전에. 영영 지워지기 전에. 그러나 아무리 현재적이어도 그 글쓰기는 공허를 면할 수 없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과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슬픔은 공연에 대한 글쓰기를 추동하는 강력한 원동력 중 하나가 아닐까.

※ 참고자료
전신재, 「19세기 판소리의 연극적 형상」, 『고전희곡연구』 제1집, 2000.

글. 성혜인 음악평론가. 전통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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