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당선작 요약문
우수상 수상작 : 김지수
국립극장이 주관하는 두 번째 공연예술 평론가상이 열렸다. 총 15명이 참여했고,
공연예술 분야의 전문가 4인은 이번 심사를 통해 한국 공연 평론의 미래에 큰 기대를 품게 됐다는 소감을 밝히며
3인의 수상자를 선정했다. 평론의 미래를 보여주는 이들의 글을 만나보자.
<제2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당선 소감 담담하고 생생하게, 열심히 쓰겠습니다

“아난다야,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져가는 것, 그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라.” (『대반열반경』 중에서)

어떤 날엔 이미 지나간 공연과 그때의 기분을 애써 글로 매어두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민할수록 쓰는 일이 어려워집니다. 그래도 좋은 공연을 마주치면 힘껏 호응하고 싶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무너지기 위해, 무너진 것들을 성실히 되짚어 보겠습니다. 담담하고 생생하게 살겠습니다.

아낌없이 축하를 건네준 가족들, 친구들, 동기 및 선후배들, 그리고 세심한 첫 독자이자 총명한 동료인
태인에게 고맙습니다. 또 사춘기 제자를 인내해 주시는 이성곤, 전지영 선생님을 비롯해
연극원과 전통예술원의 선생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빚고 나보다 먼저 극장에 있었을 창작자들에게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리처드를 다시 보는 방법: 들리지 않는 노래 듣기,
국립극장 <틴에이지 딕>

연극 <틴에이지 딕>(마이클 루 작, 신재훈 연출, 2022.11.17.~20.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은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동시대 미국의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 현장으로 옮겨 왔다. 공연은 장애를(혹은 장애인을) 순결하고 신실한 환영으로 빚어 낭만화하려는 어떤 ‘정의로움’을 전적으로 대면하고 의심한다. 이때 리처드는 『오디세이아』의 세이렌으로, 학내 구성원은 오디세우스(들)로 환유될 수 있다.
리처드는 학내 구성원들의 지지를 끝까지 받지 못했고, 선거 승리를 위해 과도하게 악랄해졌으며, 출마한 다른 후보들이 선거를 포기함으로써 학생회장이 된다. 그러나 그가 비非영웅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지나친 악랄함 때문만이 아니라, 학생들이 사회 레짐의 붕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세이렌은 귀 막고 몸 묶은 오디세우스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몰락한다.
<틴에이지 딕>은 다이글로시아 상태를 바이링구얼의 상태로 바꿔놓는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문어文語와 동시대 고등학생들의 일상어, 수어, 자막 등 다양한 언어가 서로를 번역하고 공존한다. 위계가 있다고 여겨지던 언어들 간의 질서는 무력해진다. 기술 매체상의 언어 역시도 발화어와 공존하고 마찰하며 다종 언어의 불不결속성을 고발해 낸다.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달콤하게 ‘설득’하는 세이렌의 노래, 즉 리처드의 연설은 트위터라는 바다 위의 오디세우스들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
리처드의 모든 행적은 장애라는 주인기표를 섬기는 부사副詞에 그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리처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권력 쟁취에 도전한다. 이때 사용하는 도구는 언변과 처세술이다. 팔루스 겨루기에 낄 수 없는 ‘루저’가 규범적 남성형의 독점 지대를 탈취하기 위해서는 설득과 유혹이라는 전술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세이렌의 하나뿐인 무기가 노래인 것처럼 리처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유혹하기, 설득하기다.
여성 캐릭터 구현의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공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리처드의 유일한 수단인 노래-설득-유혹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설득과 유혹을 가동시키는 동력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아니다. 노래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 또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이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세이렌들은 195분간 호소한다.

(가짜) 무당의 (불온한) 경계 지우기,
두산아트센터 <광: 경계의 시선>

추다혜의 공연 <광: 경계의 시선>(2022.9.29.~10.12.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이하 <광>)은 연극도 음악회도 아닌, 굿이거나 굿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면서 남의 이야기이기도 한, 서도민요거나 서도민요가 아닌 어떤 테두리를 저벅저벅 걸어간다. 무가와 밴드 사운드를 결합하겠다고 밝힌 <광>은 보통의 콘서트처럼 무대를 꾸렸다.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광>은 콘서트로도, 연극으로도, 음악극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추다혜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마틸다’가 되어 해설자의 입장에서 어떤 한 박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전통음악계에는 여전히 순혈주의와 원형주의가 팽배하다. 두 헤게모니에 의해 음악가는 전문가인지 아닌지, 그의 음악은 정통성 있는 음악인지 아닌지를 끝없이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추다혜는 이 암묵적 원칙을 굿과 서사극을 한데 결합하는 형식으로 극복해 낸다. 처음부터 자신은 무당이 아니지만 무가를 한다고 밝히고, 서도민요 창자 추다혜가 아닌 마틸다라고, 정체성을 인정하면서도 탈바꿈한다. 마틸다가 경계인이자 해설자로서 무대에 등장한 순간 기존의 계보는 헝클어지며 음악은 음악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마틸다는 굿의 가장 중요한 청자이자 놀아지는 대상인 신을 몰락시킨다. 신의 이름을 욕설처럼 사용하고, 무당으로 점지된 소년과 소녀를 대신해 “뱉어내라”고 외치고, 스스로 강림한 신이 된다. 발칙한 신성모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신의 비밀’에서는 “신은 몰랐던 거야” “신이 세상을 버렸다”라고 말한다. 마틸다는 이 비밀을 누설하고 관객을 공범 삼는다. 무가를 비틀어 신을 원망하는 발칙함은 마틸다 혹은 추다혜가 무가를 배우지만 무당은 아닌 소리꾼이기에 가능하다. 신도 포기해 떠난 이 세상에서 마틸다는 그저 고요한 명상의 세계로 들어갈 뿐이다.
마틸다는 신명이 아님에도 그(박수와 소미들)의 마음을 알아준다. 아니 어쩌면 마틸다는 스스로 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짜 무당과 가짜 신의 이름으로 무당 될 삶을 읽어준다. 무당과 ‘보통 인간’의 삶을 가르고 차별하고 구분 짓는 세상을 마구 헤집고 재조립하는 경계인은 그렇게 새로운 규칙을 배열해 냈다. 이분된 것들이 뒤섞인 사이보그 공연은 경계를 지우고 이것과 저것의 테두리를 공전함으로써 마침내 위로를 건넨다.

평론글 전문을 보고싶다면 클릭!

글. 김지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극학과 예술사과정 졸업 및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예술전문사과정 수료. 연극평론가 집단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 회원. 연극과 전통공연예술을 횡단하는 공연을 보고 평론을 쓰며, 이따금 드라마투르기 작업을 한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