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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니션, 그 이상의 자질을 갖춘 예술가
비르투오소를 찾아서
3월, 국립국악관혁악단에서 비르투오소와 함께하는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과연 어떤 연주를 선보일지 기대되는 마음과 더불어 비르투오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비르투오소는 그저 현란한 테크닉의 소유자일까. 비르투오소라 불릴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진정한 비르투오소를 찾아서.
ⓒPixabay

비르투오소란 무엇인가?

비르투오소란 무엇인가. 어떠한 난곡도 까다로운 기술도 한 치의 실수 없이 완벽히 구현하는 테크니션(Technician) 인가. 아니면 ‘기술자’ 이상의 자질을 갖춘 예술가 혹은 학자에게 붙이는 경칭인가.
현대에는 대개 전자의 의미로 쓴다. 예컨대 비르투오소(피아니스트)라고 하면, 물론 다른 음악적 요소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보통은 ‘테크닉’이라 부르는 표현 기술, 기교가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를 뜻한다.
그런데 비르투오소에 대한 이러한 흔한 관점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기술력이 곧 연주 실력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화려한 기교에만 집중하는 태도는 그 음악의 진가, 가령 작곡가의 경우 그가 선보인 시대를 앞서간 음악 구성이라든지 악기 활용이라든지 하는 것들, 연주자의 경우 작품과 작곡가에 대한 끈질긴 탐구로 이루어낸 깊이 있는 해석 같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
그러니 우리는 현대에서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쓰는지 말고, 고전적 의미에서 진정한 비르투오소란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르투오소(Virtuoso)의 어원은 이탈리아어에서 찾을 수 있다. 17세기에 처음 사용된 이 단어는 덕·선행·용기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명사 ‘virtu’에서 왔다. 원래는 음악뿐 아니라 예술, 학문 전반에서 특별한 실력과 지식을 가진, ‘덕이 있는’ 예술가나 학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기술자’ 이상의 자질을 갖춘 예술가 혹은 학자를 위한 경칭”인 것이다.
그러나 자극에 대한 열광이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공통의 본능이었기 때문인지, 이 의미는 굳이 21세기까지 올 것도 없이 18세기 들어 현대와 같은 의미로 변했다. 계기는 파가니니의 등장이었다.

장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린 니콜로 파가니니의 초상화(1819) ⓒ위키미디어커먼즈

파가니니는 비르투오소일까?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 현대에 그는 비르투오소의 대표 격이다. 그런데 파가니니에게 정말 ‘비르투오소의 자격’이 있을까.
현대적 관점으로 연주 실력만 놓고 보았을 때는 그렇다. 얼마나 뛰어났으면 세간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연주 실력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당시 사람들은 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과 비쩍 마른 몸 등 그의 외형과,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고서야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연주 실력 때문에 그 소문을 믿었다. 파가니니는 아주 고난도의 곡을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작곡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무반주 카프리스’ 외에도 그가 직접 쓴 작품은 상당한 난도를 자랑한다.
당대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표현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파가니니는 비르투오소라 불려왔다. 그러나 파가니니의 음악 생활이 오로지 음악을 위한 것이었는지 물어보면, 그가 진정 ‘덕’이 있는 음악가였는지를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젊은 시절의 파가니니는 욕심이 많았고, 도박꾼이었다. 덕망을 조건으로 내세웠을 때는 어김없이 탈락인 것이다.
그렇다면 피아니스트 중에서는 진정한 비르투오소를 찾을 수 있을까. 파가니니와의 동시대로 가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리스트다.

앙리 레만이 그린 프란츠 리스트의 초상화(1839) ⓒ위키미디어커먼즈

리스트는 비르투오소일까?

일찍이 베토벤, 체르니의 인정을 받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이미 20대 초반에 완벽한 연주를 구사하던, 당대 최고 실력의 피아니스트였다. 리스트는 공연 때마다 현란한 기교로 청중을 환호케 했다. 노년에도 기량은 여전했다.
리스트는 작곡가로서도 뛰어난 음악가였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 기법과 작곡 방식은 단순히 어려운 것을 넘어 진보적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초절기교 연습곡’은 수많은 피아노곡 가운데서도 극악의 난도로 유명해 ‘기교를 자랑하는 곡’으로 오해를 사지만, 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곡이다. 리스트는 이 곡을 통해 그저 기술을 익히는 수준에 머무르던 ‘연습곡’을 완전한 구성과 서사를 갖춘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쇼팽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가 파리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리스트는 훗날에도 바그너·그리그·스메타나 등 재능 있는 음악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1838년 헝가리에서 발생한 대홍수 피해자를 돕기 위해 자선 연주회도 열었다. 말년의 리스트는 성직자가 되어 종교음악을 개척했다.
아쉽게도, 그런 리스트에게도 ‘덕’과는 거리가 먼 흠이 있었다. 수많은 여성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녔던 것이다. 물론 뜨거운 인기의 혈기왕성한 청년이니 사랑에야 수차례 빠질 법했다. 그러나 유부녀와 밀월여행을 떠난 일은 문제적이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위키미디어커먼즈

진정한 비르투오소를 찾아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을 때 ‘고전적 의미에서 진정한 비르투오소’라 할 만한 연주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극소수의 연주자에게는 자격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20세기의 위대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다.
카잘스는 카탈루냐의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1세의 카잘스는 바르셀로나 골목의 중고 서점에서 첼로로 연주할 악보를 찾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견했다. 지금이야 ‘첼로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명곡이지만 당시에는 책방 구석에서 찬밥 신세였다. 어린 카잘스는 이 작품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비올라 다 감바를 위해 쓰인 이 곡을(바흐 시대에는 첼로가 없었다) 첼로로 연주하기 위해 12년간 열정적으로 악기와 악보를 연구했다. 결국 카잘스는 자신의 원대로 이 작품을 전곡 녹음하는 최초의 첼리스트가 된다.
카잘스는 이 과정에서 구시대적 첼로 주법의 한계를 발견하고 현대적 첼로 연주법을 발전시켰다. 첼로를 비로소 독주 악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음악사에서 카잘스의 가장 큰 공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첼로 연주-음악 발전의 공과 성실함만이 카잘스를 ‘첼로의 성자’로 만든 것은 아니다. 카잘스는 그가 늘 말하던 것처럼 “연주자이기 전에 인간”이었다. 특히 평화주의자였다. 카잘스는 스페인 내전 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재 정권에 항거했다. 유럽을 돌면서 스페인의 평화를 호소하는 연주회를 열었고 프랑코 정권을 승인하는 나라에서는 결코 연주하지 않았다.
카잘스는 연주자가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교는 두 번째였다. “삶에는 조건보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하던 그는 감정적 연주가 주목받던 후기 낭만주의 시대에 단 하나의 선율을 연주하는 곡으로 첼로의 가치를 증명했고, 프랑코 정권의 독재 시대에도 협박에 굴하지 않고 평화주의를 외쳤다. 음악과 첼로에 대한 순수한 열정, 평화에 대한 갈망, 그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갖고 평생을 살았던 카잘스야말로 ‘비르투오소’다. 어쩌면 연주하는 악기와 연주자의 성격이 닮는다는 말은 카잘스로부터 왔을지 모른다. 첼로는 가장 사람을 닮은 악기라고 하지 않나.

글. 송지인 ‘올댓아트’ 에디터. 네이버 공연전시판에서 클래식 파트를 담당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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