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하나

리어왕의 물, 노자(老子)의 물
리어왕의 물, 노자(老子)의 물
한없이 고요하면서도, 때로는 잔인하도록 사나운 존재. 물은 인간의 기구한 운명을 은유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다. 동양 사상에서 친숙한 물이라는 테마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과 만난다.
변화무쌍한 물의 움직임은 인간의 기구한 운명과 닮았다.ⓒshutterstock

리어왕의 운명, 거센 폭풍우가 되어 내리다

“왕은 어디 계시오?” 켄트가 묻자 신사가 답한다. “사나운 비바람과 겨루시는 중이오. 땅덩이가 바닷속으로 꺼지도록 바람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몰아치는 파도가 육지로 밀려와서 천지를 거꾸로 뒤엎든지 아니면 없애버리라고 고함을 치고 계십니다. 머리를 움켜잡고 쥐어뜯고 계십니다만, 폭풍우는 미친 듯 사납게 그분의 백발을 희롱할 뿐입니다. 인간이라는 작은 몸뚱아리 하나만 믿고, 여기저기서 부딪치고 흩어지는 비바람을 깡그리 무시하고 계시죠.”
셰익스피어 ‘리어왕’ 3막 1장의 첫 부분부터 이렇게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곧 뒤이은 3막 2장에서 폭풍우가 계속되는 가운데, 광대와 함께 등장한 리어왕이 절규한다.
“바람아, 불어라. 나의 뺨을 찢을 때까지 불어라. 미쳐 날뛰어라! 불어라! 폭포처럼 쏟아지는 호우여, 땅에 이는 회오리바람이여, 높은 탑이 물에 잠기고, 탑 위에 바람개비가 물에 빠져 가라앉을 때까지 실컷 퍼부어라! 생각같이 빠른 유황의 불이여! 참나무를 쪼개는 벼락의 선구자인 번개여! 내 흰 머리를 태워라! 그리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우뢰여! 두껍고 둥그런 이 지구를 때려 납작하게 만들어라! 만물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모태를 부수고, 배은망덕한 인간을 낳는 모든 씨를 당장에 없애버려라!”
리어왕 곁의 광대가 깐죽거린다. “아저씨, 마른 짚 속에서 찔끔대는 성수(聖水)가 들판에 퍼붓는 장대비보다 나아. 착한 아저씨, 들어가자.” 리어왕, 켄트, 광대의 말이 번갈아 이어지다가 광대가 다시 말한다. “헤이호, 비바람이 불어치네. 운수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해요. 비바람은 언제나 불어친대요.”
왕국을 물려주고 여생을 편히 보내겠노라 선언한 리어왕. 그런 부왕(父王)에게 아첨하는 첫째 딸, 둘째 딸과 달리 솔직하고 정직하게 답하는 막내딸 코딜리어. 리어왕은 그런 막내딸의 상속권을 박탈한다. 결국 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 버림받아 발광하고 마는 리어왕.
그런 리어왕 곁의 광대는 왕을 조롱하는 것 같으면서도 왕의 잘못을 일깨우며 왕의 처지를 은근히 위로한다. 충신 켄트는 왕에게 버림받은 다음에도 변장하고 왕을 따른다. 리어왕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오만함에 대한 대가를 혹독한 운명으로 치르고야 말았다.

바다의 광포함을 그린 아이바좁스키의 작품은 폭풍우 속에서 괴로워하는 리어왕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Ivan Konstantinovich Aivazovsky, Ship In A Stormy Sea, pencil and wash heightened with gouache on paper, 1888, 20 x 30.5cm

“뱃심껏 짖어라! 불 튀기고 비 뿌려라! 비도 바람도 천둥도 번개도 내 딸 아니다. 은혜를 모른다고 욕하지도 않아. 나라도 안 주고 자식이라고 안 했다. 복종할 책임도 없어. 끔찍한 재미를 맘껏 누려라. 난 너희 노예야. 왜소하고 힘없고 내쫓긴 늙은이지. 하지만 너희도 비굴한 앞잡이야. 악랄한 딸년들과 한 덩이 돼서 하늘의 군대로 이토록 늙은 백발에게 전쟁을 벌이다니. 참 치사하구나!”
역시 3막 2장에서 폭풍우를 맞으며 이렇게 외치는 리어왕에게 켄트와 광대는 비바람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가자 권한다. 왕에게 폭풍우는 “저 하늘 위에서 무섭게 꾸짖는 강한 신들이 원수들을 찾는” 바람이자 소리이고 물이었다. 그 원수들이란 자신을 저버린 딸들이자 어리석기 그지없는 리어왕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리어왕’에 나타나는 물은 거센 바람과 함께 하늘에서 요란하게 퍼부어 내리는 폭풍우의 물이다. 쫓겨나 방랑하는 리어왕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물이다. 리어왕의 어리석음을 가혹하게 징벌하는 물이다. 리어왕이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로 치르는 참담한 운명을 피할 길 없는 것처럼, 리어왕이 광야에서 피할 길 없이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물이다. 어리석음·배신·분노·징벌·운명·회한 등이 뒤섞인 물이다.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고, 낮은 데에 머무는 ‘노자’의 물

하늘에서 쏟아붓는 ‘리어왕’의 물과 다르게 ‘노자(老子)’의 물은 땅에서 흐른다. ‘노자’ 제8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며 서로 다투지 않는다. 물은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道)에 가깝다.” 요컨대 물의 세 가지 덕은 이로움을 주고, 다툼이 없으며, 낮은 데에 머무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물의 효과 또는 능력은 무엇일까? 제8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머묾은 땅처럼 낮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사람과 사귈 때 어질며 말에는 신의가 있고, 정치를 하면 백성들과 친하게 되고 일은 능숙하게 처리하며, 움직임은 때에 맞게 잘 따른다. 물은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다시 리어왕을 생각해 본다. 리어왕은 정말로 모든 권력을 놓아버리려 한 것일까? 명예만 취하고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뜻이 진심이었을까? 형식적으로는 왕국을 물려주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권위와 권력이 명예와 함께 보존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가 두 딸에게 느낀 배신감은 바로 그러한 속내 탓에 더욱 깊어진 것은 아닐까? 그는 왕국을 물려주려고 했으나 자신이 낮아질 마음은 없었다. 겉으로 꾸미며 아부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막내딸 코딜리어를 미워하며 판단력을 잃고 권력을 휘둘렀다. 마음이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고요할 틈 없이 분노하고 집착하며 파도친다. 사람을 대할 때 어질지 못하고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다. 자기 성에 차지 않으면 꾸짖고 다툰다.
‘노자’에서 그런 리어왕에게 직접 충고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제66장이다. 진정한 왕의 조건을 이렇게 말한다.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계곡물을 거느리는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능히 자기를 잘 낮추어 수많은 골짜기의 아래가 되기 때문이니, 그래서 수많은 계곡물의 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성인(聖人)은 백성의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말을 낮추어야 하고, 백성의 앞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뒤로해야 한다.” 그렇게 처신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가?
“그리하면 백성은 성인이 앞에 있어도 해롭게 여기지 않고, 위에 있어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 모두가 기꺼이 받들며 싫다 하지 않는 것은, 성인이 백성과 다투지 않음으로써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누구도 성인과 다툴 수 없다.”
수많은 계곡물의 위에만 있고자 했던 리어왕은 강이나 바다가 될 수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 그를 기꺼이 받드는 이는 켄트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세월의 흐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처럼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어리석게도 거부했다.

아래로 아래로 흘러 결국 큰 강과 바다를 이루는 물의 힘은 리어왕을 향한 노자의 충고를 담고 있다.
정선, 신묘년(辛卯年) ‘풍악도첩(風樂圖帖)’ 중 백천교도(百川橋圖), 1711년, 비단에 연한색, 36 x 37.4cm, 국립중앙박물관

‘리어왕’의 격류는 창극 ‘리어’에서 어떻게 흐를까?

국립창극단의 창극 ‘리어’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은, 우리의 소리로 ‘리어왕’을 재해석한 창극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너른 들, 좁은 계곡, 가파른 곳, 굽이진 곳, 작은 물길 등 다양한 폭과 높이와 넓이로 흐르는 우리의 소리를 통해 ‘리어왕’의 격류와 소용돌이, 폭풍우가 과연 어떻게 새롭게 탄생할 것인가?
사계절이 차례로 갈마들어 계절이 순환하고 식물이 생육하듯, 동아시아인의 심성에서 물은 대체로 수평적으로 흐르며 순환한다. 땅을 넉넉히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물의 이미지가 익숙하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땅을 사람 살기 좋은 입지로 여겼다. 하늘에서 내리며 인간 운명의 비극성을 더욱 깊게 만드는 ‘리어왕’의 물이 보여주는 수직적 성격이, 수평적 순환성과 만나면 어떤 경지가 펼쳐질까?
어쩌면 ‘리어왕’ 전체를 물의 움직임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잔잔하던 물에 권력 이양의 파문을 일으킨 리어왕. 여전한 권력욕과 오만, 독선, 잘못된 판단으로 물결은 점점 거세진다. 급기야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욕망이 격류와 큰 소용돌이를 이루고, 리어왕은 헤어날 길 없는 운명의 격랑에 휩싸여 파멸로 치닫는다. 결국 모두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리어왕 스스로 일으킨 물결이 운명의 격랑, 격랑의 운명이 되어 그 자신에게 되돌아와 리어왕 자신을 집어삼켰다는 점에서 인과응보이자 자업자득이다. 우리는 세월이 간다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다면 흐르는 물은 곧 시간과 운명의 상징일 수도 있겠다. 운명의 격랑이 잦아들고 사람들이 최후를 맞이한 뒤, 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잔잔하게 흐른다. 우리 인생이 그러하고 또한 역사가 그러하다.

참고한 책들 ‘리어 왕’ 김정환 옮김, 아침이슬, 2008.
‘셰익스피어 전집’ 이상섭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백서노자’ 이석명 지음, 청계, 2003.
‘사유하는 도덕경’ 김형효 지음, 소나무, 2004.
‘노자’ 최재목 역주, 을유문화사, 2006.
글. 표정훈 작가·출판평론가. 한양대학교 특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로 일했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