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여섯

국립창극단 ‘완창판소리’ 3월
예술가와 교육자 사이
예술가와 교육자의 길을 충실히 걷는 이 시대의 소리꾼이 코로나 시대, ‘흥보가’로 전달하고픈 희망의 메시지를 들어보자.

예술가와 교육자의 길을 충실히 걷는 이 시대의 소리꾼

매년 돌아오는 국립극장의 ‘완창판소리’ 무대. 2022년 임인년의 첫 포문은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심청가) 이수자이자 현재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인 왕기철(59) 명창이 연다. 왕기철 명창은 전라북도 정읍 출신의 소리꾼으로 그의 나이 16세에 향사 박귀희(1921~1993) 명창과의 만남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형인 故 왕기창 명창이 먼저 소리의 길에 들어선 후 박귀희 명창과의 인연을 이어주었고, 그녀로부터 가야금 병창과 소리를 배운 이후 정권진·김소희·조상현·한농선·김경숙·왕기창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창에게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등을 사사하였다.

왕기철 명창은 2001년 제27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을 하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1999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판소리와 창극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에서 1985년부터 1999년까지 14년 동안 교편을 잡았고, 2013년 국립창극단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생 교육을 맡아온 교육자이기도 하다.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는 1960년에 박헌봉·박귀희·김소희 등이 설립한 국악예술학교가 2008년에 국립으로 전환된 교육기관으로, 왕기철 명창의 모교이기도 하다. 왕기철 명창은 2017년 9월에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행정가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데, 스승 박귀희 명창이 설립한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 다시 돌아와 교장으로 부임했다는 데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번 완창판소리는 2002년 동편제 ‘흥보가’, 2003년 동편제 ‘적벽가’ 이후 국립극장에서 행하는 그의 세 번째 완창 무대이다. 어느 무대이건 소리꾼에게 쉬운 무대는 결코 없지만, 완창이 주는 무게감은 특히 더 하다고 하겠다. 왕기철 명창 또한 20여 년 만의 완창 무대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통예술의 미래인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정진하는 스승의 모습을 통해 예술의 꽃을 계속해서 피워나가는 것의 가치를 직접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완창의 의미가 깊다고 하였다.

“자네 나한테 흥보가 한 바탕 안 배울랑가?”

왕기철 명창이 박록주제 ‘흥보가’를 배운 것은 한농선(1934~2002) 명창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1999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강사로 왔던 한농선 명창이 어느 날 학교 입구에서 “자네 나한테 흥보가 한 바탕 안 배울랑가?”라고 물었고, “너무나 영광”이라는 그의 대답에 그럼 하자고 선뜻 이야기한 것이다.
한농선 명창은 가야금 명인인 한성기의 무남독녀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줄풍류를 학습했다. 목포의 최막동에게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우고, 김소희·박초월·박록주 등에게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 등을 배웠다. 그녀가 왕기철 명창에게 가르쳐준 ‘흥보가’는 박록주에게 사사한 것으로 송흥록을 시조로 하여 송광록·송우룡·송만갑·김정문의 동편제 계보를 이으면서도 박록주의 개성과 독자성이 가미된 박록주 고유의 것이었다. 박록주는 스승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파라도 좋은 것을 받아들여 소리를 제정했다. 한농선은 다양하고 정교한 시김새, 음정 변화가 많은 선율, 그리고 꼬리를 달지 않는 소리를 한다는 점에서 박록주제 ‘흥보가’의 분위기를 가장 잘 구현하는 명창이기도 하다.
1999년 왕기철 명창은 한농선 명창에서 ‘흥보가’를 배우기로 하고, 수업료 얼마를 챙겨 스승에게 내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농선 명창은 이를 거절하며 단번에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리를 재능 있는 이에게 남겨주고자 했던 한농선 명창의 진실함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이후 왕기철 명창은 약 6개월에 걸쳐 치열하게 ‘흥보가’ 한 바탕을 학습했고, 스승의 가르침에 보답하고자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반드시 선생님께 배운 ‘흥보가’로 국립극장의 완창판소리 무대에 서겠노라고. 그리고 왕기철 명창은 약속대로 2002년 6월 국립극장 완창판소리에서 ‘흥보가’를 선보였다. 그러나 한농선 명창은 그런 제자의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하고 2002년 4월 69세의 일기로 작고했다. 그녀가 2002년 3월에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받고 두 달도 채 되지 못한 시점이었다.
2022년 3월 왕기철은 또다시 박록주제 ‘흥보가’로 완창판소리 무대에 선다. 스승이 떠난 이후 꼭 20년 만이다. 그에게 ‘흥보가’를 남겨준 한농선 명창을 떠올릴 때도, 그리고 여러 스승의 사랑과 기대 속에서 40년이 넘게 묵묵히 소리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도 뜻깊은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 시대의 ‘흥보가’가 줄 수 있는 기적에 대한 희망

‘흥보가’는 가난하면서도 착한 흥보와 부자이면서도 욕심 많은 놀보라는 두 형제를 통해 빈자와 부자의 삶, 그리고 형제간의 갈등과 화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흥보의 삶과 갖은 부정과 극도의 이기심으로 부를 축적하는 놀보의 삶은 당대 불합리한 민중의 삶은 물론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이후 제비가 가져다준 보은포 박씨로 부자가 된 흥보의 모습은 가난한 민중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특히 쌀과 돈, 비단이 무수히 쏟아지고 고대광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박타는 장면은 현실의 답답함과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그야말로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대목이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재난으로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인이 고통을 겪어왔다. 누군가는 이러한 재난 속에서도 부를 축적했지만,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거나, 생업을 포기하거나 이에 대한 곤란을 겪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모를 분노와 혐오가 난무했고 서로 갈등했다. 지금의 우리에게 옛이야기 ‘흥보가’는 무엇을 전달해 줄 수 있을까.
왕기철 명창은 ‘흥보가’가 주는 긍정의 메시지를 모두와 나누고 싶다고 했다. 물질이 중심이 되는 사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지 말아야 할 흥보의 ‘선함’, 욕심을 부리고 갈등하지만 끝내는 이루어야 할 ‘화해’, 그리고 기적과도 같은 흥보의 ‘행운’이 그것이 아닐까 한다. 판소리 ‘흥보가’는 울리고 웃기는 대목이 많으며 재미있는 재담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록주제는 사설이 비교적 간명하고, 놀보 박 대목은 없다는 특징이 있으나, ‘흥보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적 즐거움은 당연히 유지된다. 놀보에게 쫓겨난 흥보가 추운 겨울 형에게 양식을 빌리러 왔다가 서러움만 당하는 ‘흥보 놀보집 찾아가는 대목’은 진계면조로 가난한 흥보의 서러움을 전달하는 눈대목 중 하나이다. 또한, 금은보화가 쏟아지며 그야말로 인생 역전하는 흥보의 ‘박타는 대목’은 흥겨움과 환호가 쏟아지는 대목이다.
창극 ‘흥보가’에서 흥보 역을 도맡다시피 한 왕기철 명창이 오로지 소리로만 정면 승부해 들려줄 ‘흥보가’가 기대된다. 더욱 깊고 단단해진 소리와 창극 배우로 쌓은 노련한 연기를 감상하며 관객은 그의 무대를 그저 즐기면 될 듯하다.

글. 송소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17년 ‘20세기 창극의 음반, 방송화 양상과 창극사적 의미’의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해 판소리와 창극 관련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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