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유니버설발레단 ‘발레 춘향’
한국적 창작 발레의 시작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춘향. 초연 후 15년간 끊임없는 성찰과 변화의 과정을 거쳐온 ‘발레 춘향’의 내일을 만나본다.

해외 발레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한국 무용수가 많다. 1990년대 들어 1세대 허용순(전 뒤셀도르프 발레단원)과 강수진(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원)이 수석 무용수가 된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서희·안주원(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김기민(마린스키 발레단), 강효정(빈 슈타츠오퍼), 최영규(네덜란드 국립발레단), 박세은(파리 오페라 발레) 등 일일이 꼽기도 어려울 정도다. 한국 무용수들의 활발한 해외 진출에 대해 ‘K-발레’ 붐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바로 한국에서 창작된 발레가 해외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K-발레의 나머지를 채울 창작 발레는 한국 발레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매년 창작 발레 작품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완성도가 높지 않은 데다 레퍼토리로서 지속성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나 스토리가 있고 규모가 큰 그랜드 발레로 가면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국내에 창작 발레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재정 여건과 단원을 가진 직업 발레단이 손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이하 UBC)은 1984년 ‘한국 발레의 중흥과 국제화’를 목표로 창단된 국내 최초 민간 직업 발레단이다. 당시 UBC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국제 수준에 걸맞은 운영으로 충격을 안겼다. 창단 초기부터 해외 저명한 안무가들을 초청해 레퍼토리를 구축하는 한편 한국적 창작 발레 제작을 목표로 삼은 UBC는 한국인라면 누구나 아는 3대 고전 설화 ‘심청전’ ‘춘향전’ ‘흥부놀부전’의 발레화를 목표로 삼았다.

‘발레 춘향’ ⓒUniversal Ballet

효의 대명사 ‘심청전’을 토대로 한 발레 ‘심청’은 UBC가 처음 선보인 창작 발레로 K-발레의 선봉장으로 꼽힌다. ‘심청’은 음악평론가 겸 작가 고(故) 박용구의 대본을 토대로 UBC 초대 예술감독이던 애드리언 델라스(Adrienne Dellas) 안무와 작곡가 케빈 바버 피카드(Kevin Barber Pickard) 음악으로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문화축전에서 처음 공개됐다. 델라스는 1976년 선화예술학교 발레교사로 부임해 러시아 명문 발레 학교인 바가노바 방식으로 9년간 어린 학생들을 훈련해 UBC의 토대를 마련한 주역이다. 초연 당시에도 한국의 고전 설화를 완성도 높은 고전발레 양식으로 창작했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UBC는 이후 예술감독 올레그 비노그라도프(Oleg Vinogradov), 유병헌 등과 함께 작품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했다.
3막으로 이뤄진 ‘심청’에서 폭풍우 몰아치는 인당수에서 펼쳐지는 선원들의 역동적인 군무, 영상으로 투사되는 바닷속 심청, 바다 요정과 왕궁 궁녀들의 우아한 군무, 달빛 아래 펼쳐지는 심청과 왕의 ‘문라이트 파드되(달빛 2인무)’ 등은 놓칠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덕분에 ‘백조의 호수’와 함께 UBC의 해외 공연 핵심 레퍼토리가 된 ‘심청’은 그동안 12개국 50개 도시(전막 기준)에서 공연돼 한국 특유의 효 정신과 아름다운 발레가 어우러졌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12년 발레의 종주국이라 불리는 러시아 모스크바와 발레를 극장예술로 꽃피운 프랑스 파리에 초청돼 ‘한국 발레 역수출’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러시아의 유력지 코메르상트는 “우리는 이 공연을 통해 동·서양 문화의 훌륭한 조화를 목격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UBC가 ‘심청’ 초연 이후 무려 21년 만인 2007년 두 번째 창작 발레로 ‘발레 춘향’을 처음 선보였다. 문훈숙 UBC 단장의 아버지이자 발레단 창단의 주역인 박보희 이사장이 배정혜 안무의 국립무용단 ‘춤, 춘향’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 출발점이 됐다.
국립무용단의 ‘춤, 춘향’은 2001년 배정혜 예술감독이 ‘춘향전’의 에피소드를 테마별로 묶어 다양한 춤으로 엮은 ‘춘당춘색고금동’을 이듬해 춘향과 몽룡의 사랑에 집중해 개작한 것이다. 박 이사장은 한국춤만이 아니라 발레로도 ‘춘향전’을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뒤 직접 발레 대본을 썼다. 그리고 UBC는 안무 유병헌, 연출 배정혜, 의상 이정우, 그리고 발레 ‘심청’의 작곡가 케빈 바버 피카드를 합류시켜 ‘발레 춘향’의 제작에 나섰다. 중국국립발레단을 거쳐 1999년부터 UBC 발레마스터로 활동한 유병헌은 2009년 예술감독이 됐는데, 2001년부터 안무를 시작해 ‘백조의 호수’ ‘심청’의 개정 및 다양한 작품의 안무에도 관여한 바 있다.
UBC는 개관을 앞둔 고양문화재단과 손잡고 2006년 1막 쇼케이스에, 이듬해 5월 고양아람누리에서 ‘발레 춘향’ 전막을 세계 초연했다. 당시 단옷날 처녀들이 창포로 머리를 감는 장면, 춘향과 몽룡의 사랑의 2인무, 과거 시험과 어사출두 장면에 등장하는 남성 군무 등이 인상적이라는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2010년 재연됐다. 다만 배정혜가 2001년 안무해 국립무용단의 레퍼토리가 된 ‘춤, 춘향’을 기본 틀로 하다 보니 UBC만의 개성이 다소 약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 2009년 국립무용단 ‘춤, 춘향’ Photo by, 탁영선
  • 2002년 국립무용단 ‘춤, 춘향’

UBC는 이후 창단 30주년이던 2014년에 안무, 음악, 무대, 의상의 대대적인 개정 작업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발레 춘향’을 내놓았다. 무대미술가 임일진을 영입해 무대를 새롭게 연출했으며, 초연부터 함께했던 디자이너 이정우는 한복 디자인을 전면 수정해 의상을 절반 이상 새롭게 제작했다.
‘발레 춘향’의 개정판에서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음악이다. 유병헌 예술감독은 초연 때 사용한 창작곡을 차이콥스키 음악으로 전면 교체했다. 차이콥스키는 고전발레 3부작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인형’ 외에 수많은 오페라와 관현악곡을 남겼는데, 서정적인 멜로디와 구조적인 완벽함 때문에 다른 발레 작품의 음악으로 사용되곤 한다. 존 크랑코가 안무한 명작 발레 ‘오네긴’이 대표적이다.
유 감독 역시 차이콥스키의 음악 특징이 ‘발레 춘향’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유 감독이 차이콥스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직접 선별한 뒤 발레음악 작·편곡자인 모토야마 후미요가 하나의 연결된 음악으로 만들었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의 2인무에 사용된 만프레드 교향곡 Op. 58과 환상 서곡 ‘템페스트’ Op.18(1873), 풍운아 변학도의 해학성을 묘사한 교향곡 1번 Op.13 등은 ‘발레 춘향’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2막 3장으로 구성된 ‘발레 춘향’은 1막 춘향과 몽룡의 사랑과 이별, 2막 1장 몽룡의 과거시험, 2막 2장 변사또의 잔치와 어사출두로 이뤄져 있다.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남녀 주인공이 추는 사랑의 파드되다. 초야의 설렘, 이별의 애틋함, 재회의 기쁨이라는 세 테마를 각각 보여준다. 1막에서 풋풋한 긴장감을 손끝과 발끝으로 드러내는 초야 파드되와 춘향과 몽룡의 애절함을 보여주는 이별 파드되가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2막의 재회 파드되는 춘향과 몽룡이 역경을 뚫고 비로소 행복을 맞이하는 기쁨을 표현한 춤으로 극의 대미를 장식한다.
2인무 이외에도 2막의 장원급제와 어사출두 장면에서 보여주는 남자 무용수들의 군무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뽐내며, 기생들의 요염한 춤은 화려한 장신구와 형형색색의 한복과 어우러지면서 주색에 빠진 변학도를 부각한다.
‘발레 춘향’은 2018년 한층 진일보한 무대로 돌아왔다. 무대 막을 최소화하고 LED 영상을 이용해 화려하면서도 깊이 있는 무대를 만든 것이다. 대개 LED 영상을 이용한 무대 연출은 극 전개가 빠르고 무대 전환이 많은 뮤지컬에서 사용된다. ‘발레 춘향’은 디자이너 장수호의 무대 영상을 통해 계절의 변화나 시대 배경 등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발레 춘향’은 2014년 중동 오만과 2018년 남미 콜롬비아 등 2곳에서 공연됐지만 앞으로 UBC의 해외 레퍼토리로 좀 더 자주 선보이게 될 전망이다. ‘발레 춘향’이 ‘심청’보다 해외 공연에 좀 더 적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효 사상을 담은 ‘심청’이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만, 인신공양이나 자식의 희생 같은 내용이 현대 관객에겐 자칫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어서다. 이에 비해 ‘발레 춘향’은 가벼운 인스턴트식 사랑에 익숙한 현대 관객에게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되새기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초연 이후 지금도 수정 및 보완 중인 ‘심청’처럼 ‘발레 춘향’ 역시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발레 춘향 ⓒUniversal Ballet
글. 장지영 국민일보 선임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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