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고전여행

판소리 열두바탕을 찾아서
제비가 물고 온 박씨에서 자라난 이야기
3월,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새가 있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몸통에 흰색 얼룩무늬 꼬리깃을 가진 제비. 오늘날에는 도심에서 제비를 보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본디 제비는 봄과 함께 한반도를 찾아오는 흔한 나그네새 중 하나였더랬다. 그 제비 하면 딱 떠오르는 우리의 고전, ‘흥보가’에 주목해 보자.

제비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강남(중국 양쯔강의 남쪽 지역)으로 떠났다가 음력 3월 3일 삼짇날에 다시 한반도를 찾아온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숫자가 겹치는 날에 왔다 가는 새라서 민간에서는 영물 또는 길조로 여겼다. 지금도 제비가 찾아와서 처마 밑에 집을 지으면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이야기한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제비 이야기를 하자면 ‘흥보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흥보가’의 제비도 중양절에 강남으로 떠났다가 삼짇날에 흥보의 집을 찾아온다. 일전에 대망(大?, 큰 구렁이)에게 잡아먹힐 뻔한 자신을 구해 주고 또 부러진 다리까지 살뜰히 치료해 준 흥보를 위해 은혜 갚는 박 ‘보은포’의 씨를 물고서 말이다.
보은포를 흥보 내외 앞에 떼구루루 떨쳐놓고서, 제비는 대들보 위에 앉아 명랑하게 지저귄다. “지지주지 주지주지 거지연지 우지배(知之主之 主之主之 去之燕之 又之拜)요, 낙지각지 절지연지 은지덕지 수지차(落之脚之 折之連之 恩之德之 酬之次)로, 함지포지 내지배(含之匏之 來之拜)요, 빼드드드드드드.” 언뜻 단순히 새가 지저귀는 것을 흉내 낸 소리로 들릴 뿐이지만 실은 그 속에 이런 의미가 숨어 있다. “아시는지요 주인님 주인님, 떠나갔던 제비가 다시 인사드립니다. 떨어져 부러진 다리를 이어주신 은덕을 갚으려고, 박씨를 물고 돌아와 인사드립니다.” 은혜를 갚으려 먼 길을 날아와 다정하게 건네는 제비의 인사말이 기특하고 귀엽지 않은가. 봄바람과 함께 박씨를 물고 온 제비처럼 ‘흥보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본다.

제비의 눈으로 바라본 명승지

모두 잘 알다시피 ‘흥보가’에서 제비는 흥보와 놀보에게 각각 박씨를 선물한다. 그래서 제비가 강남에서 찾아오는 여정을 그린 ‘제비노정기’도 흥보박을 물고 올 때와 놀보박을 물고 올 때 총 두 번 등장하는데, 후자의 경우 생략된 것도 많다.
올 3월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왕기철의 박록주제 ‘흥보가’ 완창판소리 공연에서도 이 제비노정기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흥보가’ 창자들은 김창환이 만든 제비노정기를 부르고 있는데, 대부분 박록주 명창이 김창환에게 배운 것을 새로 다듬은 박록주제를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제비노정기의 백미는 제비가 국내외 방방곡곡을 두루 거쳐오는 길을 읊어 내려가는 데에 있다. 제비는 축융봉(祝融鳳), 봉황대(鳳凰臺), 금릉(金陵) 등 ‘구운몽’ 같은 소설이나 두보, 이백의 명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중국의 여러 명승지를 지나온다. 재밌는 것은 실제 조선의 연행 사신들이 요동반도를 지나 북경으로 들어갈 때 거쳐 가는 경로와 압록강을 건너 의주-평양-서울로 오는 귀로가 이 제비노정기에 실제로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쉽지 않던 시절, 사람들은 풍문으로 들어 상상만 하던 절경들을 제비의 눈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돈과 사랑 중 무엇이 우선일까

흥보는 반남 박씨 가문의 양반이지만 극심한 가난 속에 품팔이 노동으로 근근이 먹고살다가 박을 타서 나온 재물로 신흥 부자가 되는 인물이다. 이러한 흥보의 성공담에는 봉건적 신분제 사회가 와해되고 경제력을 신분 상승의 가치로 귀하게 여기기 시작한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삼강오륜이 끊어져도 보이는 건 돈밖에 또 있느냐, 돈돈돈 돈 봐라 돈.” 흥보의 흥얼거림은 만물 위에 군림하게 된 돈의 위엄과 가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부모자식이나 부부 간의 관계도 경제적 교환 관계로 여겨지지 않는가. 결혼, 부양이라는 단어에 ‘얼마를 쓸 수 있느냐’를 따지게 되면서 사랑이나 공경이라는 단어는 빛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런데 흥보와 흥보 처의 돈독한 관계는 그 어떤 경제적 문제로도 위협받지 않는 양 굳건하다. 흥보는 양반 체면을 다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매를 대신 맞아 돈을 벌어보려고 마음먹는다. 두려움에 벌벌 떨지만 오직 가족을 생각해 내린 결정이다. 이때 흥보 처는 집을 나서는 흥보를 막아서며,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며 눈물로 만류한다. 아내의 호소를 외면하고 병영에 도착한 흥보는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와 매를 맞고 돈을 받아가 버린 것을 알고서 망연자실한다. 돈 벌어 오겠노라 큰소리를 떵떵 치고 나왔는데 가족들에게 이를 어찌 알린단 말인가. 그러나 흥보 처는 빈손으로 돌아온 흥보를 보고 실망하기보다는 그저 건강하게 돌아와 감사하다며 어깨춤을 춘다.
오늘날 흥보는 능력도 없으면서 아이들을 많이 낳았다고 손가락질받고, 그의 선한 품성이나 돈독한 가족관계는 살아가는 데 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돈과 사랑, 과연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인가?

놀보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합당한가

최초의 ‘흥보전’으로 알려진 1860년 경판본 이후, 흥보 이야기는 변주를 거듭했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에서 후반으로 넘어갈 무렵 이 이야기의 결말에는 크게 두 가지 버전이 공존한 것 같다. 이것은 ‘구풍(仇風)’, 즉 ‘원수 갚을 풍파’라고 쓰인 놀보박이 놀보를 어떻게 징치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된다.
흥보의 보은박에서 돈과 쌀이 쏟아지거나 솜씨 좋은 목수가 나와 대궐 같은 집을 지어주는 것과는 달리 놀보의 구풍박에서 나온 각종 군상은 돈이나 쌀, 집을 모두 뺏어간다. 경판본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부류에서는 놀보의 박에서 나온 인물들이 놀보에게 가혹한 육체적 징벌을 내린다. 왈짜들이 나와 놀보를 뜯고 차고 굴리고 회초리로 후리고, 장비나 초란이가 나와 놀보를 크게 다치게 하는 것이다. 놀보는 각혈하고 피똥을 싸며 아픔을 호소한다. 이 부류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흥보를 선한 인물로, 놀보를 악한 인물로 그리는 경향이 있기에 악인인 놀보를 피도 눈물도 없이 징벌해 권선징악에 따른 보상 심리를 제공한다.
신재효본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부류에서는 박에서 온갖 인물이 나와 놀보로부터 돈을 뜯어가는 방식으로 벌을 내린다. 부의 축적을 필생 과업으로 삼았던 그에게 경제적 몰락은 가장 소중히 해온 것의 상실과도 같다. 이 경우 가학적 체벌의 정도는 낮아지고 대신 온갖 사당패나 연희패가 나와 돈을 뜯어가려고 놀보를 살살 구슬리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흥겨운 유희판이 벌어진다. 이는 점차 놀보를 포용하는 쪽으로 시선이 변화했음을 말해 준다. 신재효본에서 흥보가 패배주의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놀보를 보는 시선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부자가 된 흥보를 질투하는 마음이나 금은보화가 들어 있는 화초장을 욕심내는 놀보의 마음은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선하지만 내 삶을 주체적으로 꾸리는 데에는 다소 소극적인 흥보, 적극적으로 생계를 강구하지만 주변 사람에게는 다소 심술궂은 놀보. 이 두 인물은 사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양면적인 모습이 아닐까.

글. 이채은 판소리 연행의 의미화를 몸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읽고 쓰고 있다
그림. 윤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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