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선율

국립국악관현악단 대금 파트 수석 박경민과의 대화
거대한 힘과 환상을 담은 관현악곡,
김성국의 ‘영원한 왕국’
2007년에 입단해 현재 대금 파트 수석을 맡고 있는 음악가 박경민. 고구려 벽화 ‘사신도’에 담긴 거대한 기상, 그리고 상상력 넘치는 관현악적 환상을 그려낸 작곡가 김성국의 ‘영원한 왕국’을 소개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만난 곡 중 주로 어떤 경향의 곡에 관심을 가져오셨나요?

이제까지 연주해 온 곡을 보면, 무척 모던한 음향을 표현한 곡도 있고, 무속이나 전통 장단을 투영한 곡도 있고, 거대한 서사를 다룬 곡도 있고 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어느 한쪽에 집중한 곡보다는 여러 요소를 고루 다루는 곡,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이 추상화 한 점을 함께 본다고 했을 때는 각자가 느끼는 감정이 다 다르잖아요. 그런 것보다는 한 그림을 봤을 때 ‘같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을 표현한 음악을 선호합니다. 그런 곡들이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소개해 주실 곡은 김성국 작곡가의 ‘영원한 왕국’입니다. 어떤 곡인지 간단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성국 작곡가님이 고구려 시대 고분에 있는 벽화 사신도를 보고 작곡하신 곡입니다. 사신도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청룡·백호·주작·현무라는 가상의 동물을 그려둔 것이지만 그 안에는 매우 예쁜 꽃이나 자연적 모습도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말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서 보면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색채감도 화려하고, 또 공간감이 엄청나다는 거예요. 그 무덤 안에 구성되어 있는 각 공간이 지닌 의미도 다 있고요. 그런 공간을 음악으로 담아낸 거죠.

이번 ‘마음의 선율’ 코너에서 이 곡을 소개하기로 결정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일단 곡을 듣고 있으면 마치 앞을 못 보다가 눈을 딱 뜬 것처럼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또 ‘영원한 왕국’이 고분벽화 속의 사신도를 모티프로 하는 만큼 음악에서 공간감이 느껴지죠. 그리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듯한 긴장감이 계속 유지되는데, 특히 이 곡은 이완됐다가도 다시 급박하게 변화하기를 반복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지속시킵니다. 전통 어법과 현대 어법도 잘 섞여 있고, 구체적인 서사는 없지만 마치 칸타타 같은 대곡을 감상하는 기분이 들어요.

연주할 때는 전반적으로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김성국 작곡가가 사신도의 엄청난 에너지를 음악 안에 담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곡은 단락의 구분이 확실한 편이에요. 보통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는 잠시 소리를 줄이거나 속도를 늦추면서 ‘이제 변화할 거야’ 이런 식으로 미리 힌트를 주곤 하는데, 이 곡은 그런 준비 단계 없이 급변해요. 또 극적인 전개가 한창 이루어지는 와중에 무언가 끝날 것 같은 느낌을 주다가도 곧장 다음 대목이 시작되죠. 그래서 이 곡은 맨 마지막 부분 빼고는 매우 묵직하고 진한 분위기가 이어집니다. 커피에 비유하자면 에스프레소 같다고 할까요.

또 사신도가 무덤 속에 그려진 그림이었으니 우선은 그 무덤의 주인이 있을 것이고, 그 무덤의 주인을 위한 그림을 그린 당시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또 나중에 그곳에 들어가서 많은 것을 느낀 사람들의 마음이 있겠죠.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는 공간에 들어가면 마치 우주의 작은 점이 된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은데, 김성국 작곡가님이 그런 복합적인 것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고분인 만큼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권의 여러 요소를 담아냈다고도 느꼈습니다.

이 곡에서 특별히 매력적인 부분을 꼽아주신다면요?

‘영원한 왕국’에서 대금은 두 파트로 나뉘는데 그 둘이 레고 블록처럼 꼭 짜맞춰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게 서로 온전히 다른 것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두 파트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에 가까워요. 한 파트가 강박에 오는 음들을 연주한다면, 다른 파트는 그걸 듣고 나머지 박들을 연주하는 거죠. 근데 그게 혼자 연주할 때와는 정말 느낌이 다르고, 아주 잠깐만 다른 생각을 해도 금방 어긋나요. ‘젠가’라는 보드게임을 할 때 블록 하나가 빠지면 전체 구조물이 무너지잖아요. 이 곡에서도 그런 스릴이 있어요. 그래서 그만큼 두 파트가 딱 맞춰졌을 때의 희열이 굉장히 커요. 레고가 혼자 떨어져 있으면 하나의 조각일 뿐이지만 그게 하나둘 쌓였을 땐 입이 딱 벌어지는 완성품이 되잖아요. 그래서 음표가 조각이라고 하면 연주자들이 이걸 하나씩 짜맞춰서 멋진 형태를 만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요. 특히 그런 부분이 대금의 매력을 딱 보여줄 수 있는 멋진 대목이기도 해서 더 좋습니다.

레터 C 47마디부터 대금 1 파트보(왼쪽)와 대금 2 파트보(오른쪽)

이 곡을 들으며 입체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말씀하신 부분도 그런 인상을 만든 요인 중 하나겠네요.

맞아요. 게다가 박이 마디를 다 넘나들어요. 보통은 음악을 잘 아시는 분들이 음악을 듣거나 악보를 보시면 ‘이게 지금 무슨 장단이고 몇 박자로 가고 있구나’ 하는 걸 예측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곡에서 박이 복잡하게 얽힌 부분이 나올 때는 연주하는 입장에서도 한 번에 다 그 흐름을 읽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듣고 연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큰 만족감을 주기도 하죠.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악보계님에게 따로 부탁해서 대금 두 파트가 하나로 합쳐진 악보를 달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야 다른 파트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가 예측되잖아요. 때로는 제가 따라갈 수 있고, 때로는 받아서 연주할 수 있고, 서로 채워주고, 메워주고, 짚어주면서 한 덩어리를 만들어야 해요.

꼼꼼한 연습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영원한 왕국’은 얼마 전 국립국악관현악단 이음 음악제 ‘2021 오케스트라 이음’에서도 연주됐죠. 그때 지도 단원으로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연습 과정은 어떠셨나요?

정말 쥐 잡듯이 했죠(웃음).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대학생들에게는 이 ‘영원한 왕국’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악보도 처음 보는 데다가, 사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관현악곡이 많다고 하기는 어렵거든요. 물론 솔로곡은 워낙 다채로운 핑거링을 요구하는 곡이 많아서 정말 다들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관현악은 얘기가 조금 달라요. 내가 잘하는 건 당연하지만, 거기에 더해서 호흡이 맞아야 하고, 듣는 능력도 좋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파트별로 나누어 교육도 하고, 묶어서도 연습하고, 다시 나눠서 연습하고, 그렇게 연습해서 딱 맞을 때까지 계속했더랬죠. 그게 벌써 작년 봄의 일이죠. 저희 관현악단에서도 연주하고, 이음 음악제에서도 연주해서 저는 이 곡에 다른 분들보다 애착이 더 많이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또 다른 부분들은 어떤가요?

물론 저는 대금 연주자니까 대금이 특별하게 돋보이는 부분을 말씀드리게 됐지만, 그렇다고 이 곡에서 다른 악기가 절대 소외되지 않아요. 중간에 해금이 아주 리드미컬하면서도 에너제틱하게 나온 부분도 있고, 가야금의 현란한 핑거링, 거문고 대점을 치는 부분, 피리의 아주 꼿꼿하고 정악스러운 느낌의 어법이 곳곳에서 눈에 띄어요. 특히 문묘제례악 느낌이 나는 부분에서는 피리에 주목하게끔 구성하셨어요. 그러니까 전체 악기가 합주하며 만드는 웅장함이 있으면서도 촘촘한 블록 구성, 민속악적인 부분, 수제천 같은 느낌이 풍기는 부분 등, 이렇게 많은 요소가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엮여가요. 또 소금 파트에서 굉장히 민속악스러운 부분이 나오기도 하고, 소금과 아쟁의 라인이 너무 멋지게 합쳐지면서 풍성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곳도 있죠. 그래서 여러 악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서 어느 파트 하나 소외되지 않게 하신 것 같아요. 굉장히 다양한 요소를 포괄하기도 했고요.

악기 간의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들었습니다. 워낙 악기 음량 차이가 크기도 하고요.

어떤 곡들은 한 악기에 조금 더 많이 치중되어 있기도 해요. 가야금 같은 경우 핑거링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음역이 넓으니 굉장히 어려운 부분을 가야금 파트에 몰아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곡은 전혀 그렇지 않죠. 게다가 박을 아주 딱딱 맞춰야 해요. 저희는 전통음악을 아주 오래 해온 음악가들이에요. 박자를 마치 무 자르듯이 딱딱 나눠서 인지해 온 게 아니라 장단을 그루브로 이해하고, 굉장히 유연한 그루브를 타온 사람들인 거예요. 몇십 년간 그 감각을 몸에 체화해 왔고요. 그래서 박을 맞추는 게 또 쉽지 않은 과제였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또 그런 다른 방식의 박자감을 경험해 볼 수 있었죠.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또 다른 국악관현악곡도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요.

제가 김성국 선생님의 곡을 정말 좋아해요. 연주할 때마다 이분의 곡과 제가 참 잘 맞는다는 걸 많이 느껴요. ‘공무도하가’라는 곡도 있는데 그 곡도 참 좋아하고, 또 김대성 작곡가의 ‘열반’도 좋아합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관현악곡 중에서도 임팩트 있고 이른바 ‘대곡’으로 꼽힐 만한 곡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대부분 보면 김성국 작곡가 아니면 김대성 작곡가의 곡이에요. 그런 곡들은 뭔가 마냥 듣기 좋고 서정적인 라인을 보여주기보다는 작은 실내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관현악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상상력 넘치는 환상을 보여주죠.

레터 L중 마디 322부터 마디 373까지
레터 L중 마디 322부터 마디 373까지
레터 L중 마디 322부터 마디 373까지
레터 L중 마디 322부터 마디 373까지
레터 L중 마디 322부터 마디 373까지
이음 음악제 ‘2021 오케스트라 이음’ 공연 중 ‘영원한 왕국’ 영상

마지막으로 국악관현악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국악관현악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많은 분이 이야기하시잖아요. 국악관현악의 시대는 갔다, 정체되어 있다, 이런 얘기도 많이 들려오고요. 그렇지만 제가 악단에 소속된 단원의 입장으로 봤을 땐, 날이 갈수록 국악관현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저희 단원 선생님들이 기량도 특출나지만, 무엇보다 무대 위에 올라왔을 때 선생님들이 갑자기 너무 달라져요. (웃음) 물론 연습할 때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지만 무대에 딱 올라가서는 마지막 한 톨의 힘까지 다 쏟아붓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걸 지휘자도 느끼고, 연주가도 다 느껴요.

관객이 이 연주가들의 경험에 자연스레 공감하며 뭔가를 느낄 수 있다면, 관객분들도 분명 어느 순간 이 음악으로부터 희열을 느낄 거라고 생각해요. 많은 연주가가 ‘사람들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 모르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사실 관객분들은 정말 작은 부분까지 캐치하면서 많은 걸 봐요. 표정도 보고, 몸짓도 보고요. 또 마스크 벗고 연주하는 파트가 저희 대금밖에 없어요. 연주가들의 표정을 보고 느끼는 희열이 또 있잖아요. 그래서 그걸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고, 게다가 자리도 한가운데 있어서 연주가 끝나면 언제나 마음을 담아서 확 웃어요. 그럴 때면 마치 보이지 않는 줄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다 연결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많이 듭니다.

모더레이터. 신예슬 음악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동시대 음악에 관한 의문으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음악학을 공부했고, ‘음악의 사물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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