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언어

한국춤의 허리와 엉덩이
걷어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은 매일 아침을 ‘국립기본’으로 시작한다. 발레에 바가노바 혹은 체케티 메소드가 있다면, 한국춤에는 ‘기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무용을 주창한 송범 선생이 다듬은 국립기본은 전통춤의 아성을 간직하는 동시에, 판이 아니라 극장 무대에 서야 하는 무용수들에게 꼭 맞는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굿거리장단으로 시작되는 기본은 무용수에게 규율이자 그 위에 새로운 것들을 쌓기 위한 기반이 돼왔다.
그리하여 한국춤의 몸짓에 깃든 이야기를 되새겨 보고자 국립기본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팔다리부터 손과 발, 허리, 어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호흡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짚어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유명한 그림, 조선 시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담긴 ‘무동도’를 떠올려 본다. 삼현육각의 악사들이 둘러앉아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그 앞쪽으로 어린 무동이 음악에 맞춰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든 채 춤추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림에서 장단이 들려오는 듯 물씬 고조된 장면 속에서 악사들의 모습은 반듯한 필치로 그려진 것에 비해 무동은 좀 더 강약이 뚜렷한 선으로 표현돼 있다. 무릎 아래 행전을 차고 소맷자락이 길게 늘어진 녹색 겉옷을 입은 춤추는 이의 모습은 종이에 그려진 평면의 그림이건만, 곡선의 느낌과 리듬감을 자아내며 입체로 다가온다. 몸통에는 엇갈려 묶은 하얀 띠가 소맷자락과 반대 방향으로 흩날리고, 들어 올린 오른 다리 위쪽 허리에는 앞섶을 묶은 끈이 반대편 매듭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섬세한 원근 표현으로 인해 그림 속 몸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왼쪽 골반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회전시킨 움직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화가의 눈썰미는 그 순간, 춤의 리듬을 포착하기에 충분했다.
일반적으로 인체의 중심은 배꼽으로 생각하지만, 한국춤에서 중심부는 허리와 골반·엉덩이라 할 수 있다. 회전축을 360도로 둘러싸고 있는 복부와 엉덩이가 온몸의 움직임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척추와 그 주변을 보호하는 근육으로 이루어진 허리는 겉으로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작용하며 춤의 균형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주로 상체가 가동될 수 있는 범위를 좌우하기 때문에 허리의 유연한 움직임으로 풍성한 춤사위를 만들어내게 된다.

동일하게 오른팔을 위로 들고 왼팔을 허리 근처에 감고 있지만, 허리와 골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움직임의 방향과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 춤의 느낌을 만든다.

한편 골반은 춤의 방향을 만드는 위치에 있다. 복부 전면과 측면의 골반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에 따라 시선의 방향이 결정되고, 또 그에 따라 움직임이 제시하고자 하는 방향성이 드러난다. 후면의 엉덩이는 골반과 동반하는 자리에서 힘을 만드는 부분으로, 무용수의 호흡에 따라 ‘조이고’ ‘풀고’ ‘당기고’ ‘밀며’ 춤동작의 언어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든다. 메소드로 정리할 수 없으나 춤의 맛을 결정하는 ‘쪼’*와 맺고 푸는 한국춤의 미학은 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움직임과 느낌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한국춤이 내포한 유교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 춤은 기표보다는 기의, 구체적 의미 전달보다는 전체적인 맥락과 느낌을 형성하는 것을 중시해 왔다. 발레의 경우 교습법이 발달하고 차츰 무용수 개개인의 테크닉이 성장한 것과 달리, 우리 춤은 체계적인 메소드를 확립하기보다 무용수의 즉흥적인 해석과 개성의 가치를 주목했으니 말이다. 얼굴학자로 알려진 조용진 박사는 춤이 한국인의 체질과 기질에 가장 잘 맞는 예술이라고 언급하면서, 그 이유를 체간의 움직임을 미묘하게 조절해 ‘힘과 섬세함이 조화를 이루는 양식’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허리와 골반·엉덩이의 사용에 대해 움직임의 방법을 특정하거나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서술할 수 없을지언정 그것의 중요성만은 익히 파악할 수 있다.

*‘쪼’란 배우들의 연기에서 드러나는 버릇이나 습관을 지칭하는 데서 확장한 표현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술가 혹은 예술가의 표현이 각인되게 만드는 특정한 움직임을 말한다. 예를 들어 “네 춤은 다 좋은데, 쪼가 없어”와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여성 무용수의 골반 움직임은 그것을 덮고 있는 치마에 따라 표정을 달리하기도 한다. 길고 날렵하게 혹은 넓고 풍성하게.

신무용기를 대표하는 무용가이자 세계 무대에서 동양의 미를 알린 최승희의 움직임을 보면 춤에서 허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그는 ‘보살춤’에서 반라에 가까운 의상을 입었고, 허리와 골반을 주요하게 움직여 동작의 입체성을 만들어냈다. 허리를 살짝 틀어 오른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왼쪽 엉덩이는 뒤쪽으로 숨겨지는 동시에 오른쪽 골반은 도리어 앞으로 내밂으로써 무용수와 관객 사이를 밀고 당기며 쥐락펴락한다. 당시 ‘센세이션’으로 기록되는 이 춤이 전례 없는 것이었을까? 아니다. 사실 풍성한 한복 치마에 가려져 있던 기존의 한국춤이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

단단한 중심부의 힘은 더욱 다채로운 움직임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축을 기준으로 넓고 또 좁게 회전하는 컴퍼스처럼 척추를 중심축 삼아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중심부를 움직이는 동력은 호흡이다. 내면으로부터 끌어올린 깊은 호흡은 근육을 섬세하게 움직이는 한편, 역동적인 리듬까지 만들어낸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 호흡과 움직임이 치열하게 교차하며 만들어낸 결과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춤 무대에서 발견되는 다채로운 움직임은 풍성한 치마 혹은 너풀대는 바지 속에서 빛이 들건 들지 않건 열심히 춤춰 온 숨은 조력자를 주목하는 흐름과 함께한다. 사방이 트인 판에서 조명이 드리우는 무대로, 그리고 다시금 화이트 큐브와 같이 열린 공간으로 자리를 옮긴 춤은 관습과 환경의 싸개를 걷어내고 차츰 가려져 있던 멋과 맛을 드러내고 있다. 전통을 다시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해온 신체 중심부의 움직임처럼 단단한 뿌리를 가진 기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일 터다.

자문. 국립무용단 훈련장 장현수
무용. 국립무용단 송설·송지영
사진. 전강인
글. 김태희 춤으로 시작해 전통예술·연극·시각예술까지 범위를 넓혀가며 예술을 글과 책으로 엮어내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발레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무용이론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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