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선율

타악 수석 연제호가 말하는 ‘금잔디’
우리는 장단의 민족이니까
김대성 작곡가의 ‘금잔디’를 통해서, 국악관현악의 핵심부에 위치한 장단, 그리고 타악이 맡고 있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역할을 짚어주는 국립국악관현악단 타악 수석 연제호의 이야기.

김대성 작곡가의 ‘금잔디’는 2019년 초연된 곡입니다. 어떤 곡인지, 선정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2019년은 이건우 작곡가의 탄생 100주년이었어요. 이 작곡가의 음악 중 김소월의 시에 붙인 ‘금잔디’라는 가곡이 있었는데, 김대성 작곡가가 이걸 더 큰 편성으로 확장하며 더 풍성한 이야기를 담은 게 국악관현악곡 ‘금잔디’입니다. 곡 초반부터 애절하면서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친숙한 테마가 나오는데 거기에 어떤 힘이 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악보에 ‘고구려의 옛 성에 핀 꽃’이라는 구절도 적혀 있는데요, 저는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찬란했지만 이제는 역사로만 남아 있게 된 고구려의 존재가 그 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음악에 더 몰입할 수 있었죠.

‘고구려의 옛 성에 핀 꽃’을 표현한 악보

이건우의 가곡과 더불어 고구려 역사를 상징하는 꽃, 그리고 경기도당굿의 올림채장단 등 눈여겨볼 만한 키워드가 많은 곡이었습니다. 타악의 입장에서 이 곡의 어떤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을까요?

김대성 작곡가의 음악을 보면 악기나 음악에 대해 탐구를 많이 하셨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 특히 개중에 다른 작곡가가 많이 어려워하는 장단을 잘 다루시는 편이에요. 실제로 장단과 민요를 공부하러 직접 지방으로 자주 돌아다니신다고도 하고요. 장단은 서양 타악과는 다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고, 또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관현악에서 여러모로 다루기 어려운 것 중 하나예요. 또 우리 타악이 민속악이나 정악에서처럼 치고 나가는 리더 역할을 하자니 앙상블이 깨질 위험이 있고 해서, 중간 지점을 잘 찾는 게 관건이에요. 또 쉬운 가락인데도 불구하고 연주자가 약간 힘을 빼고 ‘드르럭’으로 치느냐, ‘기덕’으로 치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워낙 그 기본을 꿰뚫고 계시니까 재미있게 했죠.

연주할 때도 즐거웠고, 듣기에도 좋았던 한 부분을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올림채장단이 나오는 부분이겠죠. 올림채는 도당굿에서 쓰는 혼소박 10박 장단이에요. ‘3박+2박+3박+2박’, ‘3박+2박+2박+3박’. 이런 박 구조가 모여서 장단을 이루는데 이런 박의 특징이 뭐냐면, 솔직히 안정적인 느낌이 들지는 않아요. 계속 바뀌니까요. 근데 그런 변화가 있으면서도 무척 다양한 감정을 넣을 수 있는 장단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 그런 장단이 참 많거든요. 36박인데 계속 2박과 3박이 교대하면서 만드는 칠채장단도 있고요. 물론 다른 선율이라든지 화성으로도 뭔가를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장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고 또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올림채장단을 사용한 141-162마디 악보

악보를 보니 굉장히 여리게 시작해야 하는데, 이 부분 연주하실 땐 어떠셨어요?

타악 하는 사람에게 제일 어렵게 다가오는 말이 ‘작게, 하지만 느낌은 살아 있게’인데 (웃음) 이 부분이 딱 그래요. 전형적인 올림채 기법인데, 어떤 작은 선율에서 튀지는 않지만 들었다 놨다 하면서 톡톡톡톡 튀는 느낌을 만드는 게 올림채 본연의 특징이에요.
그리고 올림채장단 나오기 전에도 이미 10박에서 7박으로 넘어오는 식으로 조금씩 그런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올림채장단 이후에서도 발뻐드레장단을 잘 이용해서 연결되게끔 붙여놓으신 거죠. 그래서 약간 확장된다고 해야 될까요? 올림채에 미묘한 박이 두 박 더 들어가면서 안정적이고, 그러면서도 힘이 붙는 장단이 됐죠. 올림채를 둘러싼 장단의 변화에 주목해 보면 훨씬 더 재밌게 볼 수 있어요.

장단의 변화를 볼 수 있는 타악 파트보

장단을 들여다보면 한국 전통음악이 얼마나 복합적이면서도 유연하게 시간을 구조화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무궁무진한 세계 같아요.

어떻게 보면 지금 대중음악도 그렇고 현대음악도 그렇고, 소재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장단을 들여다보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요. 이걸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정말 많은 게 달라지고, 아직도 써먹을 수 있는 재미있는 게 많으니까 너무 좋죠. 물론 배우려면 너무 한없이 배워야 해요. 타악 연주자조차 배울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완전히 장단의 민족이라니까요. (웃음)

‘금잔디’뿐만 아니라 리허설에서 타악 파트끼리만 연주할 때 소리가 어떨지 상상해 봤는데 어쩌면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곡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럼요. 재밌죠. 다른 파트는 같은 선율을 여러 명이 같이 연주하는데, 저희는 사실상 각자가 다 솔로예요. 거기다가 장단을 끌고 가야 되는 악기들이라서 솔로 연주자가 한 파트씩 맡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물론 그 솔로 연주자의 호흡들이 또 하나가 돼야 해요. 그런 점에서 팀원들에게 정말 고맙죠. 다 함께 이해해 주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면서, 호흡을 잘 맞춰가고 있거든요. 또 얼마 전에 진행한 <소소 음악회>에서 타악 솔로가 몇십 마디나 나올 정도로 타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곡들이 있었어요. 근데 이 악보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충분하지 않아서 연출 선생님도, 저희도 적극적으로 어디는 유니즌으로 구성하고, 어디는 세션을 좀 다르게 맞춰보자고 서로 제안하면서 정말 재밌게 했어요.

2016년, ‘예술가의 초상’ 인터뷰에서 악보 초반에 기본 장단만 적혀 있고, 이후 실제로 장단을 어떻게 변주해 나갈 것인지는 타악 연주자의 몫이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그간 악보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타악기와 장단을 잘 아는 작곡가는 악보 그대로 연주해도 훌륭한 연주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꼼꼼하게 기보해 주셔서 연주가 수월해요. 반면에, 경우에 따라서 타악주자가 변화를 줘서 연주해 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 어떤 작곡가가 “너무 좋은데, 제 의도랑은 좀 달라서 악보대로 해주시면 어떨까요?” 이런 말씀을 하시면, 오히려 기쁘더라고요. 작곡가들이 더 책임감을 갖고 타악을 이해하고 정확하게 적으려고 하는구나 싶어서요.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는 일단 악보대로 하고, 혹시나 작곡가의 특별한 요청이 있거나, 아니면 저희가 먼저 건의하면서 수정 보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악보와 관련해서, 타악 파트보에 ‘대금’ 파트가 적혀 있던데요.

일단 저희 파트보에는 반복되는 구절이 많고, 마디 수 세기도 좀 어렵다 보니 파트보만 보고 어떤 부분인지 해석할 때 ‘눈 가리고 길 찾기’ 하는 느낌이에요. (웃음) 그래서 악보계에 특별히 부탁해서 눈에 띄는 선율을 많이 연주하는 대금 파트보를 같이 그려 넣어달라고 해요. 그렇게 해두면 선율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죠.
사실은 오선보뿐 아니라 어떤 기보법으로도 타악을 잘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저는 악보를 보면서도 그 음악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느낌을 기억해요. 힘이 넘치게 딱 들어오는 장면이었으면 그 느낌을 살리면서 연주하는 식으로요. 장면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 맛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늘 그런 부분을 생각하죠. 아마 그 장면에서 어떤 선율을 듣는지는 타악 연주자마다 다를 거예요.

연주하는 악기뿐 아니라 각자 듣는 것도 다르군요. 다른 편성이 아닌 ‘국악관현악’이기 때문에 더 두드러지는 타악의 역할이나 매력이 있다면 뭘까요?

우선 국악관현악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것 중 하나예요. 타악이 민속악이나 정악에서처럼 치고 나가는 리더 역할을 하자니 앙상블이 깨질 수 있고, 국악관현악에서는 밸런스를 맞추는 게 또 중요하고. 그 중간 접점을 잘 찾는 게 관건이죠. 사실 밸런스만 따지면 타악의 맛을 낼 수가 없어요. 휘모리를 하면서 작게 치면서 동시에 맛을 내라고 하니까요. (웃음) 그래서 가끔은 국악관현악에서, 타악은 그 밸런스의 외적인 것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무조건 소리가 클 필요는 없지만 내줘야 할 때는 과감하게, 그 힘을 받아서 가는 게 국악관현악답지 않을까 싶어요.
예로부터 타악은 분위기 메이커였어요. 장단을 이끌어가는 걸 떠나서라도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타악의 숙명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학생들 가르칠 때도 ‘우리는 거의 지휘자이자 매니저 같은 역할이니까, 음악이 재미없거나 느려지지 않게 책임감을 가져야 더 좋은 연주자가 될 거다’라는 점을 강조하죠. 또 워낙 악보대로 연주하는 게 아니다 보니까 타악 연주자에 따라 음악 색깔이 확실히 바뀌어요.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하죠. 저도 갈수록 더 준비를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너무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혹시 ‘금잔디’와 더불어 추천하고 싶은 또 다른 곡이 있을까요?

김성국 작곡가의 ‘공무도하가’라는 곡이 있는데, 딱 이 작곡가만의 스타일이 있어요. 합리적이고, 계산적이고, 치밀하고. 제가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확실하고 딱 떨어지는 걸 좋아해요. 물론 ‘공무도하가’는 애절한 마음이 꾹꾹 눌러 담긴 곡이죠. 하지만 이런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힘 있게 꾹꾹 쌓아두다가 폭발적인 클라이맥스를 만드는데,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쾌감이 있어요.

국악관현악의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게, 정말 엄격한 태도로 봤을 때 대중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건 쉽지 않아요.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고,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는 곡이 아주 많지는 않아요. 물론 간혹 어떤 공연에서는 관객과 확실히 소통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짜릿한 순간도 있고, 저희 공연을 지속적으로 찾는 마니아층도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죠.
또 계속 다듬어가야 할 부분도 있어요. 악단의 전체적인 사운드가 그렇게 크지 않으니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개량하는 것도 필요하겠죠. 특히 소리를 잘 감싸주는 전문 공연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요. 사랑방 음악은 많은 사람 앞에서 큰 사운드를 내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 바로 앞에서 호흡과 시김새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걸 무대 개념으로 확장해서 음악의 매력을 잘 살려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 신예슬 음악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동시대 음악에 관한 의문으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음악학을 공부했고, 『음악의 사물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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