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국경을 넘어선 국악
K-뮤직,
세계 무대에서 만개하다
“영정 마누라 내다 불고, 비단바람 디려나 불고, 물결같이 살펴주고 도와를 줄 때, 잘 받아놔요,
드는 삼재 업 삼재요, 나는 삼재 재수야 삼재로, 천하영정 지하영정, 영정마누라 영정각시”
(악단광칠, ‘영정거리’ 중)

한국인조차 생경한 주술 같은 노랫말이 미국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이른바 K-템(K-아이템)으로 떠오른 검고 작은 갓을 쓰고, 붉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영정거리’로 나온 세 명의 보컬. 말은 통하지 않아도 느낌이 온다. “악단광칠의 음악에 강렬한 기운이 있다”는 예감, 질병과 액운을 쫓아주리라는 직감이다. 눈을 떼기 어려운 자태와 독특한 음악색, 무속인의 퍼포먼스는 단박에 ‘국제 무대’를 홀렸다. 2015년 정가악회 유닛밴드로 결성된 악단광칠이다. 서도민요와 황해도 굿을 접목했고, 전통 국악기로 서양음악의 강렬한 록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악단광칠은 6월 9일부터 미국 시카고를 시작으로 캐나다까지, 북미 지역에서 2주간의 투어를 진행했다. 공연 첫날 비행기가 연착, 새벽 5시에 미국 땅에 당도한 것도 모자라 악기와 의상조차 도착하지 않은 위기 속에서 공연을 마쳤다. 일촉즉발의 연속이었으나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김약대 악단광칠 단장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곡을 준비했는데 관객들도 그 부분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관계자로부터 들었다”며 “매우 곤란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관객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악단광칠 ⓒ정가악회

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던 한국음악이 국제 무대에서 날개를 달고 있다. ‘전통’을 기반으로, ‘전통’의 경계를 넘어선 이들이다. 악단광칠을 비롯해 고래야·블랙스트링·입과손스튜디오·이날치·잠비나이·해파리 등 새로운 음악 세계를 보여주는 밴드가 주축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 전통을 기반으로 한 음악의 새로운 시도가 폭발적 관심을 받은 것은 2020년이다. ‘1일 1범’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유튜브를 강타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한국관광공사 홍보 영상으로도 제작되며 누적 조회수 5억 회를 넘겼다. 국내에선 ‘새로운 전통’에 열광했고, 해외에선 이른바 ‘K-뮤직’에 홀렸다.
외부의 시선으로는 이 사건들이 “팬데믹 시대에 난데없이 터진 신드롬”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선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일들의 성과”라고 입을 모은다.
전통음악의 세계 무대 진출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 전통음악의 국제 교류가 본격화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김희선 국민대학교 교수는 “1960년대는 국악의 현대화, 1980년대는 국악의 대중화, 현재는 국악의 세계화 등 시대마다 형태와 지향은 다르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국제 무대를 두드려왔다”고 말했다.

결핍·갈망·다양성…‘새로운 전통’의 시작

지금의 국악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낡고 오래된 것’, 그래서 ‘지루하고 고루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진작에 벗었다. 1980년대부터 대중음악과 ‘접선’을 시도한 국악은 1990년대 안숙선·김덕수 명인의 ‘레드썬 프로젝트’로 시작해 푸리·공명·바람곶 등 다양한 밴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후반 황신혜밴드·어어부프로젝트 등 국악의 정서를 받아들인 홍대 인디 신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나왔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전통을 포스트록으로 승화한 잠비나이, 대중음악을 접목한 고래야 등 달라진 세대와 함께 전통음악은 도전과 실험을 이어갔다. 판소리는 팝으로(이날치), 잡가는 재즈(이희문)와 만나 재해석됐고, 무가는 록(악단광칠)으로 태어났다.
새로운 시도의 원동력이 된 것은 ‘결핍과 갈망’, ‘다양한 음악 장르의 유입’이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국악계의 새로운 세대에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자리했다. “대중이 관심을 갖지 않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콤플렉스, “아무리 해도 인기를 얻지 못한다”는 트라우마였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욕구와 갈증, 대중이 외면하는 전통에서 벗어나 새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추동 엔진 역할을 했다.
악단광칠의 보컬 홍옥은 “국악이 소외된 시절부터 우리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는 예술가를 고민한 끝에 악단광칠이 나오게 됐다”며 “우리 음악으로 자립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보자는 노력 끝엔 생존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의 생존 본능과 창작을 통한 소통 의지, 동시대화에 대한 욕망은 새로운 전통을 탄생시킨 큰 힘이었다.
여기에 2000년대에 접어들며 인터넷의 발달로 다양한 음악 장르가 유입되자, 이들에게도 신세계가 열렸다. ‘월드뮤직 개념’이 유입됐고, 지구상에 다양한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자국의 전통음악을 현대화하는 작업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목도하며, 전통음악의 재해석은 한결 자신감을 얻었고, 더욱 활발해졌다.

고래야 ⓒ플랑크톤 뮤직
해파리 ⓒ플립드코인뮤직

새로운 활로 찾아 세계로…해외 진출의 시작과 의미

음악인들의 시도와 노력이 무색하게도 국내시장은 작았다. ‘한국 음악시장’ 자체의 규모도 작은데, 그 안에서 전통음악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전통음악이 K-뮤직 반열에 오르는 과정이 필연적이었던 이유다.
한국음악의 해외 진출은 국제 교류 형식의 초청 등 민관의 다양한 지원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한국음악이 월드뮤직 시장에서 두각을 보인 중요한 사건은 2010년 세계 최대 월드뮤직 페스티벌로 꼽히는 워맥스(WOMEX, World Music Expo)였다. 당시 오프닝 무대에서 토리앙상블·바람곶·비빙이 합동 무대를 선보이며 ‘한국음악 신고식’을 치렀다. 현재 세 팀은 사라졌지만, 이들의 DNA는 또 다른 곳에 뿌려져 만개했다. 비빙의 장영규는 씽씽에서 이날치로, 바람곶의 허윤정은 재즈와 접목을 시도한 블랙스트링으로 이어졌다. 장영규는 현재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원일 예술감독과 황신혜밴드·어어부프로젝트를 함께 했다.
김희선 교수는 “워맥스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이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글로벌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밴드를 만들어 그 경험을 공유하고 전승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이후로도 다양한 활동은 이어졌다. 전통음악 기반의 밴드에게도 해외 무대는 “조금 더 자유롭고 반가운 무대”(고래야 경이)다. “밴드의 활동 반경이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고래야는 2012년 벨기에의 월드뮤직 페스티벌(Sfinks Mixed)로 첫 해외 공연 무대에 섰다. 이를 발판 삼아 유럽·북미 지역으로 무대가 확장됐고, 미국 유명 라디오 방송인 NPR ‘타이니 데스크’에도 출연했다. 오는 10월엔 멕시코의 음악 축제에 초청돼, 현재는 투어 준비에 한창이다.
2017년 씽씽이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NPR ‘타이니 데스크’에 출연한 이후 K-뮤직은 더욱 큰 무대로 나아갔다. 새 활로를 찾고자 했던 악단광칠은 해외 진출의 1차 목표가 워맥스였다. 2018년 주(駐)엘살바도르 한국대사관 초청 연주를 시작으로 다양한 해외 음악 관계자를 만나게 됐고, 체코 ‘컬러스 오브 오스트라바’에 초청된 것을 계기로 2019년 마침내 워맥스 무대에 섰다. 2020년엔 팬데믹 와중에도 뉴욕 글로버 페스트에 섰고, 지난해 말엔 미주 투어를 진행했다. 잠비나이는 미국 코첼라, 영국 글래스톤베리, 스페인 프리마베라 사운드, 프랑스 헬페스트, 미국 세계 최대 음악산업 축제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이하 SXSW)에도 참가했고, 지난해엔 ‘타이니 데스크’에 출연했다. 박민희가 소속된 해파리도 최근 SXSW에 참가했다. 판소리 창작 집단 입과손스튜디오도 지난 6월 벨기에에서 무대에 섰고, 오는 10월엔 멕시코 세르반티노 축제 무대에 오른다.

이날치 ⓒ하이크hike

티켓 파워·뛰어난 예술성…‘청신호’ 켜진 K-뮤직

세계 무대로 나간 이들의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한국음악 밴드의 해외 진출을 지원해 온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에 따르면 유럽 등 세계 무대의 ‘월드뮤직’ 신에선 한국의 전통음악 기반 밴드와 새로운 밴드 데뷔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음악 밴드를 통한 티켓 파워와 음악 팬의 반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악단광칠에 따라붙는 ‘코리안 샤머닉 펑크’ ‘K-포크팝’도 해외 팬들이 붙여준 수사다.
김약대 단장은 “해외에서 국악이 의미 있는 반응을 일으키려면 기존 음악을 이해하고 있는 대중의 인식에 들어가야 하고, 그 인식 안에서 우리의 음악적 정체성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국제 무대에서 선보이는 K-뮤직은 이러한 필요조건을 담보, “뛰어난 예술성을 가진 장르”로 평가받는다. 많은 사람이 깊이 있는 시선을 보내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김약대 단장은 “현지에선 우리 음악의 의미와 굿에 대한 의미, 복색과 심지어 ‘한’이라는 정서에 관심을 보낸다”고 말했다. ‘젊은 판소리’를 지향하는 입과손스튜디오는 유럽 무대에서 판소리에 대해 달라진 인식을 확인했다. “이날치와 입과손스튜디오의 판소리는 이런 점이 다른 것 같다”는 분석까지 할 정도다. 이향하 입과손스튜디오 대표는 “이전에는 판소리가 한국에서 온 낯설고 신기한 장르로 비쳤다면 지금은 유럽 내에 ‘판소리 신’이 생길 만큼 저변이 확대되고, 조금 더 진하고 깊이 있게 장르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많아져 놀랐다”고 말했다.
지금 K-뮤직의 가장 큰 호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기가 ‘한국 문화의 전성기’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K-팝, K-드라마, K-무비 등 어느 때보다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을 이들 역시 체감한다. 이향하 대표는 “K-팝이나 드라마, 영화 등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판소리 등 한국음악으로도 이어지고 있고, 그 수혜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한국음악은 거대한 시장 안에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확인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의 전망이 더 밝다. 앞으로의 진출기에도 청신호가 켜진다. 다양한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 단장은 “이제 재해석의 시도를 넘어 동시대 사람들에게 재해석의 결과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때”라고 봤다.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성을 띠는 K-뮤직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글로벌한 장르”(김희선 교수)가 되리라는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

글. 고승희 『헤럴드경제』 문화부 기자. 공연·대중음악·미술 등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취재하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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