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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크리에이터
이렇듯 힙한 한국화라니!
우리 선조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풍속화를 남긴 조선 시대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이들이 21세기에 살고 있다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한국화가 김현정 작가의 작품에 그 답이 있을 것 같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그랬듯, 김현정 작가 역시 일상을 위트와 해학을 담은 풍자적 시선으로 재해석해 화폭에 그려낸다.
김현정 한국화가 ⓒ김현정

2017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김현정 작가를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30 under 30 Asia 2017)’에 꼽았다. 이 잡지는 매년 경제·과학·산업·예술 등 10개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젊은이들을 지역별로 30명씩 선정해 기사화한다. 그간 국내에서 축구선수 손흥민, 배우 김수현,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등의 스타가 꼽혀왔지만, 국내 순수 미술작가로는 김현정 작가가 처음이었다.
『포브스』가 주목한 김현정 작가의 영향력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김현정 작가에 대해 “한복을 입고 맥도널드 배달 오토바이를 타는 여성 등 동양화를 대표하는 기존의 틀을 깨고 관습에 도전했다.”라고 평가했으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참가한 가장 젊은 작가 중 하나다.”라고 작가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내숭: 절제’ ⓒ김현정

전통과 현대, 기대와 본능 사이의 유쾌한 충돌

김현정 작가의 그림 속 여성들은 모두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있고 남들의 기대와 시선, 통념을 비웃듯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내숭: 아차’ 속 여성은 휴대용 가스버너에 라면을 끓여 먹다가 명품 가방 위로 커피가 쏟아지는 장면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내숭: 절제’ 속 여성은 쇼핑 뒤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들고 지친 듯 쭈그리고 앉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으며, ‘내숭: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곳이 아닌가’ 속 신사임당은 단풍나무 아래 고고하게 앉아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한 손에는 양산을 다른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지극히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결혼: 육아전쟁’ ⓒ김현정

그런가 하면 김현정 작가는 명화를 패러디하는 방식으로 결혼 생활의 이상과 현실에 대해 풍자하기도 한다. ‘결혼: 아침을 여는 샘’ 속 여성은 앵그르의 ‘샘’의 자세로 물병의 물 대신 상자에 담긴 시리얼을 쏟고, ‘결혼: 피로타’ 속 여성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조각상의 자세로 집안일에 지친 여인을 안고 안타깝게 바라보는가 하면, ‘결혼: 육아전쟁’ 속 여성은 아이를 업고 한 손에는 청소 도구를 들었지만, 여전히 굽 높은 구두를 포기하지 못한의 모습이 그야말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성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과도 같다.
모두 한눈에 봐도 재미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전통 의상과 현대 소품,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본능, 격식과 일상 등 정반대 요소들의 충돌로 통쾌하고 유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김현정 한국화가의 한지 콜라주 과정 ⓒ김현정

수묵담채화와 한지 콜라주로 완성한 신비로움

김현정 작가의 작품이 더욱 특별한 것은 한국화가 가진 아름다움에 그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이 더해진 덕분이다. 그는 전통적인 수묵담채화에 서양식 콜라주 기법을 더해 독특한 대비성을 드러낸다. 작업 방식도 흥미롭다. 한지 위에 인물을 누드로 그리는데, 인물은 담채(淡彩)로, 인물이 활용하는 사물은 진채(眞彩)로 표현한다. 여기에 옷을 입히는데, 작가는 이 과정을 ‘종이 인형 놀이’에 비유한다. 상의는 한복 저고리의 독특한 느낌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직접 염색한 한지를 콜라주 방식으로 붙이고, 하의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의미를 담기 위해 먹으로 반투명하게 채색해 몸의 라인을 드러낸다.
김현정 작가는 “‘내숭 시리즈’에서 한지 콜라주는 한복의 효과적인 표현 수단인 동시에 화면에 긴장감과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서 “형상과 색채에 따라 작품 전체의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고, 인물의 수묵담채와 결합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된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기법들이 ‘내숭’이라는 키워드와 적절히 잘 어우러져 시너지를 낸 것이다.

‘내숭: 나를 움직이는 당신’ ⓒ김현정

그렇다면 김현정 작가가 ‘내숭’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현정 작가는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의 표리부동한 모습을 희화화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지만, 그는 “‘내숭’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면서 “내숭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보편적 욕구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감추고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흔한 ‘불일치’며,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한다.
김현정 작가의 작품 세계는 ‘내숭 시리즈’에서 보여준 자기 자신과 욕망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 점차 넓어지고 있다.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2019년 작가가 서른 살을 기점으로 기획한 <계란 한 판 결혼할 나이> 전시회다. 대한민국 청년 작가상 수상 기념전으로 마련된 이 전시에서 김현정 작가는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솔직하고 흥미롭게 그려낸 작품들을 선보였다.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 갖는 의미에 주목하면서 여성의 결혼·출산·육아에 대한 생각과 감정, 우리나라 결혼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 등을 심도 있게 담아냈다.

김현정 한국화가와 한국조폐공사가 협업해 제작한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곳이 아닌가’ ⓒ김현정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선 ‘한국화의 아이돌’

김현정 작가는 데뷔 처음부터 주목받았지만, 누구나 예상했던 성공은 아니었다. 한국화가 현대 미술계에서 주류는 아니다 보니 선화예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동양화과까지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 역시도 성공은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존 한국화 문법이 아닌 파격적인 소재의 그림이다 보니 새로운 길을 가는 개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는 달리, 첫 전시부터 화제였다. 2013년 첫 개인전 <내숭 이야기>의 출품작 13점이 이틀 만에 완판됐고, 2014년 <내숭 올림픽>과 2016년 <내숭 놀이공원>에 각각 관람객 2만3,887명과 6만7,402명이 다녀갔다. 특히 <내숭 놀이공원>전은 국내 작가 개인전에서 최다 관람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게다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초대전, 뉴욕 타임스퀘어 기획전, 중국 베이징 중국미술관 등에서도 내숭 연작 시리즈를 선보일 수 있었다. 이 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2014년 『동아일보』의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됐으며, 같은 해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의 ‘주목할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김현정 한국화가와 해태제과가 협업해 제작한 ‘신십장생도’ ⓒ김현정

김현정 작가의 작품들은 소수의 미술 애호가가 아닌, 대중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덕분에 미술관 문턱을 낮추고 한국화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가 자신도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자신의 전시회에서 도슨트로 나서서 작품을 설명하거나 한국화에 친숙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체험 활동을 진행하기도 한다. 또한 SNS와 블로그 등 온라인 매체를 활용해 대중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으며, 작품 속 주인공처럼 한복을 차려입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전통 의상과 한국화의 매력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덕분에 김현정 작가는 ‘한국화의 아이돌’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김현정 작가의 작품은 미술관 조명 아래에 전시되는 것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상업 브랜드와 예술 협업 작업을 통해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사이에서 영리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우리카드와 진행한 ‘카드의 정석’ 디자인이나 해태제과와 협업한 연양갱 추석 선물세트 패키지 ‘신십장생도’ 등은 업계나 소비자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현정 작가는 “매력적인 한국화가 음악처럼 누구나 향유하고 즐기는 세상을 꿈꾼다.”라고 말한다. 바람대로 그 포문은 이미 열린 듯하다.

글. 두경아 여행작가, 인터뷰어(프리랜스 기자). 『레이디경향』『여성조선』에서 취재기자를 지냈고, 인터뷰어로 『여성, 예술을 만들다』(2021)를 공동 집필했으며, 여행작가로 『무작정 따라하기 후쿠오카』(2017)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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