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하나

몰리에르 탄생 400주년
400년을 이어온 웃음 장인
몰리에르는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극작가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프랑스 연극의 긍지이자 자부심이라 할 수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몰리에르 흉상에 새겨진 문구는 한 나라가 한 사람의 예술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자 명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영광을 위해 그가 필요할 뿐이다.” *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을 구성하는 5개의 아카데미 가운데 하나. 프랑스 한림원(翰林院)이라고도 하며, 가장 권위 있는 명예로운 학술기관. (출처: 온라인 두산백과)
17세기 프랑스 화가 피에르 미냐르가 그린 몰리에르 초상화, 1658년 작품 ⓒRene-Gabriel Ojeda

2022년은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몰리에르의 탄생 4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프랑스의 대표적 국립극장인 코메디 프랑세즈는 올해를 ‘몰리에르의 해’로 지정하고 공연과 낭독회, 학술 행사와 강연 등 그를 기리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하지만 사실 탄생 400주년이라는 타이틀과 상관없이 프랑스 연극계, 특히 ‘몰리에르의 집(Maison de Moliere)’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몰리에르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극상 중 하나가 ‘몰리에르상’이고, 프랑스어를 지칭하는 표현 중 하나가 ‘몰리에르의 언어(La langue de Moliere)’라는 사실만 봐도 이 17세기의 극작가가 프랑스 문화계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몰리에르의 집’이라고도 불리는 코메디 프랑세즈 ⓒ위키피디아커먼즈

연극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

프랑스 고전 희극, 나아가 서양 희극의 완성자로 칭송받으며 수많은 걸작을 남긴 몰리에르는 자신의 생애 역시 한 편의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극적 요소가 많았다. 유랑극단의 무명 배우로 시작해 루이 14세의 비호 속에 ‘왕의 극단’이란 칭호를 얻기까지 숨 가쁘게 이어진 화려한 경력, 귀족과 성직자, 동료 예술가 등 수많은 적으로부터 쏟아진 비난과 이에 대항하며 벌인 끝없는 투쟁, 불행한 결혼 생활과 고독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다. 특히 마지막 작품 <상상병 환자>를 연기하던 중 무대 위에 쓰러져 생을 마감한 그의 최후는 평생 무대를 위해 살다 간 예술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극적 죽음’이었다. 몰리에르가 죽은 뒤 그의 극단은 ‘왕의 극단’이란 칭호를 계속 사용하면서 이어지다가 이후 다른 극단과 합쳐져 코메디 프랑세즈의 원형이 되었다. 이렇듯 연극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던 몰리에르는 작품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으로도 많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고, 실제로 그의 삶은 영화·문학·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로랑 티라르 감독의 <몰리에르>,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왕의 춤>, 베라 벨몽 감독의 <마르키스> 등 몰리에르란 인물을 직·간접적으로 조명하는 영화가 여러 편 제작되었고, 20세기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는 루이 14세와 몰리에르를 주인공으로 한 『위선자들의 밀교』란 희곡을 썼으며, 현대 발레의 거장 보리스 에이프만 역시 <동 쥐앙과 몰리에르>란 작품을 통해 선배 예술가인 몰리에르에게 경의를 표한 바 있다.

몰리에르의 작품인 <수전노>의 주인공 아르파공 ⓒ위키피디아커먼즈

희극의 완성자이자 종결자

몰리에르와 그의 작품이 서양 연극사에 남긴 영향과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당시까지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소품, 휴식과 여흥거리를 위한 프로그램에 불과하던 희극을 비극과 동등한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그는 소극과 코메디아 델라르테로 대표되는 서양 희극의 요소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단순히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비판적인 시선과 생생한 인물 묘사를 더해 희극의 품격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몰리에르를 서양 희극의 종결자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몰리에르의 희극 작품은 대부분 당시의 사회적 폐단을 비판적이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웃음을 주기 위해 쓰는 것이라 생각했던 기존의 희극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작가란 모름지기 동시대를 바라보는 가장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시선을 지녀야 한다고 믿었던 몰리에르는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모든 사회계층과 인물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이를 고스란히 무대에 올림으로써 당대의 풍속과 동시대인에 대한 최고의 관찰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평생 소극·발레희극·성격희극·풍속희극 등 다양한 장르의 희극을 쓴 몰리에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장르는 역시 성격희극이라 할 수 있다. 『타르튀프』 『인간 혐오자』 『수전노』 『동 쥐앙』 등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며, 문학적으로도 가장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이 작품들에서 몰리에르는 당대의 부르주아 계층이나 귀족사회에 대한 풍속 묘사의 수준을 넘어 인간과 사회를 꿰뚫는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주었고, 이러한 보편성 덕분에 이들은 지금까지도 가장 널리 공연되고 있다. 또한 이 작품들에서 몰리에르는 위선자 타르튀프, 염세주의자 알세스트, 수전노 아르파공 등 이후 프랑스 문학의 전형이 되는 개성적인 인물들을 창조해 냈다.

몰리에르의 작품 『인간 혐오자』 1719년 판 1면 삽화 ⓒ위키피디아커먼즈

몰리에르 희극과 <인간 혐오자>

주로 부르주아 계층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사교계 살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인간 혐오자>는 등장인물 대부분이 귀족계층이라는 점에서 다른 희극들과 구별되는 작품이다. 또 알세스트라는 인물의 독특한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그를 둘러싼 당대의 사회적 위선과 분위기를 신랄하게 묘사한 덕에, 이 작품은 성격희극인 동시에 풍속희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인간 혐오자>는 몰리에르 희극의 보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가장 또렷한 지점은 그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들이다. 몰리에르는 작품 속에서 언제나 어느 한 인물이나 계급만을 콕 집어서 비방하지 않는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의 시선은 극 중 여러 인물군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뻗어 있으며, 각기 다른 그들의 치부와 약점을 거울처럼 비춘다. <타르튀프>에서 몰리에르는 위선자 타르튀프만이 아니라 그에게 속아 넘어간 오르공의 무지함과 고지식함을 함께 비판하고 있으며, <동 쥐앙>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 호색한 동 쥐앙과 함께 신실한 그의 하인 스가나렐의 비겁과 위선을 동시에 비꼬고 있다.
<인간 혐오자>에서도 마찬가지다. 극 중 등장인물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아첨과 비방 등 사교계의 풍습에 철저히 물든 인물들과 이러한 사교계의 위선을 알면서도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 그리고 이 두 부류를 혐오하는 주인공 알세스트다. 여기서 몰리에르는 이들 모두의 모순과 치부를 드러낸다. 위선과 가식으로 똘똘 뭉친 사교계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음으로는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예절과 관습에 따라 이를 용납하는 인물들 또한 은연중에 꼬집고 있다.
특히 주인공 알세스트에 대한 몰리에르의 시선은 매우 입체적이다. 알세스트는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사교계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을 극도로 혐오하지만, 동시에 그토록 자신이 비판하는 가식과 허영의 대명사인 셀리멘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과 뜨거운 열정으로 고통받는다. 결국 이러한 내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알세스트는 사교계로부터 거부당하고 셀리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채, 스스로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지적이고 위선을 싫어하는 정직한 성품이면서도 스스로의 모순으로 충돌하는 알세스트의 모습은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적 주인공을 넘어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하나의 개성으로 자리 잡았다.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사람을 울리는 것보다는 웃기는 것이 훨씬 어렵다. 시대를 초월해 보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비극과 달리, 희극은 조금만 시류를 벗어나도 웃음의 코드가 달라지기 때문에 훨씬 더 까다롭고 시대에 민감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400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오르며 여전히 유쾌한 웃음과 풍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몰리에르의 희극은 새삼 그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이번에 <NTOK Live+>를 통해 소개되는 Pathe Live의 <인간 혐오자>는 올해 탄생 400주년을 맞이한 이 위대한 거장을 기억하며, 그의 작품이 던지는 웃음과 성찰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좋은 기회다.

글. 김주연 월간 『객석』 기자로 출발해 공연 현장과 이론을 잇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여러 매체에 공연 및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쓰면서 대학 강의와 드라마투르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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