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하나

국립극장 기획공연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
구음과 판소리가 펼쳐낼 감각의 스펙트럼
섬세한 소통으로 ‘고비사막을 걷는 두 낙타’를 그린 이 작품은 장벽이 무엇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과
장벽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이의 경계를 허문다.

요즘 연극계의 화두 중 하나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다. 배리어프리란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없애자는 움직임을 지칭한다. 사실 이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것은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다. 1974년 유엔 장애자 생활환경전문가회의에서 주창된 배리어프리는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주로 건축설계와 관련해 오래전부터 언급돼 왔다. 그런데 그런 배리어프리가 21세기 한국의 연극판에 어느 순간 호출돼 수년째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이렇게 된 연유를 한 가지로 꼭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배경에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있다. 2010년대 들어 연극계는 부쩍 젊은 연극인을 중심으로 자본으로부터의 소외, 성별이나 성적 지향의 차이에 따른 차별 등의 문제를 동시대적 이슈로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어느새 아주 오래된 소수자인 장애인에게 다수의 시선이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연극계 전반을 보면, 애당초부터 장애인이 겪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깊게 해왔다기보다는, 여러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 장애인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좀 더 타당할 것이다. 이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까닭에 장애인 차별 문제라는 소재는 몇몇 연극에서 단발성으로 소모되는 데 그치지 않고 좀 더 긴 생명력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어떤 대상에 대해 무지한 경우, 우리는 그것을 아예 외면해 버리거나 아니면 제대로 알기 위해 더 깊이 파고들게 된다. 비록 속도는 더디지만, 한국 연극계가 현재 후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장애인 차별 문제에 대해 최근 국공립극장이 나서서 인프라 측면과 공연 내적인 측면 모두를 두루 살피며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젊은 연극인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오감으로 만끽하는 배리어프리 공연

국립극장이 레퍼토리시즌 2023-2024 프로그램 중 한 작품으로 당당히 내세운 음악극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가 반가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는 대중에게 익히 잘 알려진 헬렌 켈러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인데, 홍단비 극작가와 이기쁨 연출가가 함께 호흡을 맞춘다. 너무도 잘 알려진 실존 인물들, 영상매체에서도 이미 익히 다룬 서사이지만 연극 무대와 만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각과 청각 장애를 모두 가진 헬렌 켈러를 무대 위로 불러내는 순간, 많은 물음표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눈이 안 보이는 것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 연극 관객 앞이라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해 보라. 연극 무대 위에선 신기하게도 배우가 마치 실제로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는 것처럼 보이게끔 연기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대에서는 이를 사실적으로 연기하면 할수록 표현이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헬렌 켈러의 경우 시각과 청각이라는 두 가지 감각에 장애를 겪은 인물인 까닭에 더욱 그렇다. 무대 위 배우가 제아무리 실제 사실에 가깝게 열연한다고 해도, 클로즈업 같은 카메라의 힘을 빌리는 영화와는 달리 연극 무대에선 여간해선 같은 감흥을 얻기 힘들다. 결국 무대에선 관객으로 하여금 시각과 청각 장애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인물의 상태가 ‘느껴지도록 하는’ 정교한 연극적 장치를 고안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는 헬렌 켈러의 역경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여덟 살 때 시력을 잃은 애니(앤 설리반 선생님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와 태어난 후 열아홉 달 만에 시력과 청력을 잃은 헬렌이 평생에 걸쳐 나눈 깊은 우정에 방점을 찍을 예정이다. 공연팀을 이끌고 있는 이기쁨 연출가는 애니와 헬렌의 우정, 그리고 이들의 변화 과정을 집중적으로 그리기 위해 2인극의 형식을 택하고, 또 판소리의 소리를 연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선 이 극은 헬렌이 아닌 애니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애니 역할은 배우 한송희가 맡는다. 또한 일인다역을 통해 애니의 남동생 지미, 애니가 유년 시절 만났던 소녀 넬라 등 애니 주변 인물들과의 에피소드를 적지 않게 다루면서, 애니가 헬렌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를 간접적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시각과 청각 모두 장애를 가진 헬렌 역할을 맡는 이는 배우이자 소리꾼인 정지혜다. 정지혜 배우는 우선 의미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음이 담긴 소리, 즉 구음에서 시작해 이후 단어나 간단한 문장 등의 형태로 소리를 나누어 내며 헬렌의 변화상을 감각적으로 선보인다.

공연팀은 이 과정이 혹여 우열의 상태를 구분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고민하며 조심스레 작품을 가다듬고 있다. 이기쁨 연출가는 “공연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각·청각·지체 장애인으로부터 피드백을 들었는데 표현하는 형태에 대한 궁금증이 있더라. 당시 리딩으로 진행했는데 ‘말을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전달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피드백을 들었다”며 관객들이 이질감을 덜 갖도록 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방안 중 하나는 아마도 배리어프리 자막이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공연에는 연극 <틴에이지 딕>에서 몰입도 높은 자막으로 호평받은 고동욱 디자이너가 함께하는데, 연출가의 귀띔에 따르면 자막에 인물의 감정 상태를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형태가 삽입돼 말의 뉘앙스를 표현하는 데 힘을 보탤 예정이다.

책상과 걸상 외에는 대체로 비어 있는 무대에서 헬렌과 애니는 지문에 해당하는 말까지 표현해 내며 2인극의 묘미를 살려낸다는 계획이다. 수어 통역사들이 일명 그림자 통역의 형태로 붙어 이들의 표현을 시청각 장애인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 밖에도 무대를 채울 중책을 맡은 이들은 또 있다. 이 극은 음악극으로 꾸며지는 만큼 타악·전자음악·마림바·고수 등 4명의 음악인이 무대에서 애니, 헬렌과 긴밀하게 호흡하며 표현의 빈 공간을 풍성히 채워낼 예정이다. 작품의 내용도 내용인 만큼 이 같은 다채로운 다각도의 표현이 과연 장애인 관객이 관람하는 데 겪곤 하는 불편을 어느 정도까지 해소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고비사막 같은 세상 속을 걷고 있는 낙타들에게

그런데 헬렌 켈러 이야기를 담은 공연의 제목이 왜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일까.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제목에 공연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오롯이 녹아 있다. 이 공연은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카트야 베렌스의 『헬렌 켈러 평전』, 앤 설리번의 『헬렌 켈러는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등 책의 내용을 일부 참고해 만들었는데, 낙타는 실제로 헬렌이 애니에게 처음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동물이다.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는 헬렌이 애니의 도움을 받아 언어를 습득해 가는 과정에서 낙타를 흉내 내며 즐거운 마음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이후 여러 번 반복해 언급되면서 헬렌이 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건네는 위로와 응원의 말로서 의미를 짙게 띠게 된다.

애니와 헬렌은 극 전반에 걸쳐 고비사막을 걷는 두 낙타에 비유된다. 영하 30도에서 영상 4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를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 낙타는 너무 더운 날씨엔 서로 몸을 기대어 포개며 체온을 내리곤 한다고 한다. 사막의 공기보다 낙타의 몸이 더 시원하기 때문이다. 낙타들의 이런 모습은 여덟 살 때 시력을 잃은 애니, 태어난 후 열아홉 달 만에 시력과 청력을 잃은 헬렌의 관계와 닮아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히 헬렌이 애니로부터 도움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돼주는 데까지 나아가는 상호 보완적 관계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 장애의 양상마저 다른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는 과정을 두 마리의 낙타를 빌려 표현하며 이들의 인생 역시 재미있는 것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무래도 비장애인으로서 실존 인물인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그리려다 보니 공연팀은 한편으론 걱정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섬세한 접근을 통해 소통의 지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동시에 품고 있다. 스스로 장애에 대해 무지함을 인정하고 이것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는 이기쁨 연출가는 “결국 하려는 이야기는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 연대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힘줘 말한다. 또한 “공연을 만들다 보면 표현 방법과 형식에 대한 고민에 치우칠 때가 있는데, 그것에 쫓기다 보면 본질적으로 해야 하는 이야기를 놓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도 덧붙였다. 비장애인이 그리는 장애인들의 세계가 혹여 장애인들에게 완벽하게 다가가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서툰 노력이 계속해서 촘촘히 더해진다면 세상은 좀 더 소통 가능한 곳으로 변해가지 않을까. 무지하다고 외면해 버리는 대신 더디지만 알려고 노력하는 요즘 연극계의 움직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헬렌이 애니와 마음을 나누면서 열어가는 새 세상의 구체적인 모습은 12월 6일부터 1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글. 김나볏 방송영상학과 연극학을 공부했으며, 연극을 중심으로 한 공연 관련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지금 여기 우리와 소통하는 글, 동시대적 감수성과 동떨어지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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