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명작의 조건
명작과 리메이크의 상관관계
명작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지만, 공통적인 건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사랑받는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명작 리메이크가 장르는 물론이고 국가·언어·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명작이란 무엇인가

명작의 정의는 다양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랑받는 ‘고전’을 지칭할 수도, 당대의 대중에게 사랑받은 작품을 뜻할 수도, 예술적 가치와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 수도 있다. 결국 평가의 기준이 무엇이고, 누구에 의해 평가되느냐에 따라 명작의 정의는 달라질 수 있는데, 이는 곧 시대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말하는 명작이란 무엇일까. 한때 전문가의 평가가 그 작품의 성취를 좌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에 반해 오늘날은 대중의 평가가 더 중요해졌다. 즉 이 시대 명작의 첫 번째 조건은 더 많은 이가 재미있다고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드라마·K팝과 같은 장르를 ‘대중문화’라고 지칭하게 된 것 역시 그만큼 대중의 평가가 중요해진 문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그간 순수예술로 불리던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이 시대의 명작 또한 대중적인 성공이라는 양적 가치로만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성 같은 질적 가치 또한 중요한데, 이 또한 대중과 무관할 수 없다. 오늘날 대중은 전문가 수준의 눈과 귀를 가졌다. 인터넷 공간 등의 공론장을 활용한 소통으로 집단 지성은 계속해서 대중의 눈높이를 높이고 있다. 명작이란 재미는 물론이고 의미도 있어야 하며, 따라서 양적인 가치와 더불어 질적인 가치도 갖춰야 함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평가 주체가 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만큼 대중성이 확보된 작품이어야 그 의미도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방향성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리메이크, 명작의 중요한 또 하나의 조건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명작을 정의하는 조건을 더하라면 리메이크다. 고전이 여전히 소비될 수 있는 까닭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서다. 오늘날 무대에 오르는 셰익스피어 연극을 보자. 원전의 색깔을 그대로 두기보다 현재의 관점과 감성을 더해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캣츠>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오페라의 유령> 같은 뮤지컬은 현재도 전 세계에서 공연되는데, 저마다의 해석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즉 명작이 되려면 시대를 뛰어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결국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는 리메이크이기에 가능하다.
같은 장르 안에서만 리메이크가 이뤄지는 건 아니다. 명작으로 불리는 원작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변주된다. 예를 들어 다프네 뒤 모리에가 쓴 <레베카>는 1940년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미국에 진출해 영화화한 첫 작품이다. 히치콕 감독은 이 작품으로 그의 영화 중 유일하게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2020년 벤 휘틀리 감독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뮤지컬로 리메이크된 <레베카>로 더 익숙하다. 뮤지컬 <엘리자벳> <모차르트!> <마리 앙투아네트> 등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만든 오스트리아 뮤지컬 <레베카>는 2013년 한국에서 초연된 후 지금껏 계속 리메이크되는 명작 뮤지컬이다. 소설에서 영화로, 또 영화에서 뮤지컬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리메이크는 국가와 언어,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당대의 관점과 해석까지 더해지는 방식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물론 지속가능성이 중요하겠지만 리메이크되는 작품이라면 명작의 필요조건을 어느 정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
  • 뮤지컬 <레베카>

리메이크되는 우리 고전 명작

이처럼 계속 리메이크되는 고전 명작은 우리 전통문화 콘텐츠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홍길동전』 같은 소설은 끊임없이 구전되어 이어져 왔고, 1930년대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됐다. 1998년 김석훈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 <홍길동>은 외환위기를 맞은 당시 상황과 맞물려 ‘난세의 영웅’을 그려냄으로써 큰 인기를 끌었고, 2008년에 제작된 드라마 <쾌도 홍길동>은 신세대 홍길동의 재해석으로 화제가 됐다.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리메이크된 고전의 대표작은 역시 『춘향전』이다. 판소리 춘향가가 원본인 작자 미상의 이 연애소설은 양반의 자제 이몽룡과 은퇴한 기생 월매의 딸 성춘향의 신분 차를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명작이 됐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영화까지 수없이 리메이크된 이 이야기는 사실상 한국적 멜로의 공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많은 한국의 멜로드라마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이르는 남녀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주로 장날 공터에서 연희가 되곤 했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또 사회가 변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던 마당극이 ‘마당놀이’로 이름을 바꿔 부활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고전 명작 덕분이었다. 1981년 MBC가 창사 20주년을 맞아 마당놀이 <허생전>을 기념공연으로 선보였고, 그 반응이 의외로 뜨거워 방송으로도 내보내면서 이 고전 명작들은 다시 현재성을 갖기 시작했다. 마당놀이 인간문화재 3인방으로 불리는 윤문식·김성녀·김종엽 트리오가 탄생했고, 방송에서 분리되어 나온 공연은 국립극장의 스테디셀러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놀보가 온다> <춘풍이 온다> 같은 작품은 『흥부전』이나 『이춘풍전』 같은 고전 명작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걸 잘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도 전제가 있다. 수백 년 전에 탄생한 고전 명작이라고 해도 현시대에 맞는 재해석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춘풍전』을 각색해 현시대 대중에게 각광받은 <춘풍이 온다>는 기생 추월의 유혹에 넘어가 가산을 몽땅 탕진한 춘풍과 그를 지혜롭게 구해 내는 김씨 부인과 몸종 오목이의 대비를 통해 당당한 여성들의 통쾌한 이야기로 해석한 점이 주효했다. 현시대가 요구하는 ‘여성 서사’를 고전 속에서도 찾아내고 재해석함으로써 ‘과거의 재현’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이 고전 명작의 리메이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 1998년 드라마 <홍길동>
  • 2009년 드라마 <쾌도 홍길동>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명작으로 탄생하는가

역사가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현재의 관점을 담은 해석이라고 할 때, 역사와 리메이크는 절묘하게 맞닿는 부분이 존재한다. 즉 그 많은 사극과 시대극은 사실상 역사의 리메이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영화화되어 화제가 된 국내 창작 뮤지컬 <영웅>은 2009년에 초연되었다. 하지만 <영웅>의 역사적 소재인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는 여러 차례 작품을 통해 변주되었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만을 놓고 봐도 2004년에 서세원이 감독한 <도마 안중근>이 있고,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가 이처럼 다양한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건, 삶 자체가 극적이면서도 다양한 결로 해석될 수 있는 전기이기 때문이다. 항일운동을 한 독립투사로서의 안중근도 있지만, 그의 삶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인간의 해방을 위해 죽음을 향해 기꺼이 걸어가는 ‘도마’라는 종교인 안중근도 있다. 특히 제국주의는 미워하되 일본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동양 평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여전히 대결과 상생 사이에서 갈등하는 글로벌 시대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국립창극단에서는 오는 3월 초연되는 <정년이> 역시 이러한 현재적 관점으로 재조명되는 역사적 사실을 담은 작품이다. 서이레가 쓴 원작 웹툰이 주목한 건 1950년대 여성국극단에서 활동한 여성 소리꾼들의 꿈과 성장, 연대다.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은 모든 배역을 여성 출연자들이 맡아서 공연하는 창극의 한 갈래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낯설게 느껴지는 소재일 수 있지만, 온전히 여성이 주축이 되어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또 함께 연대해 시대와 싸워나가는 여성 서사는 오히려 현시대에 울림을 갖는 면이 있다. 흥미로운 건 <정년이>의 국립극장 공연이 웹툰의 리메이크지만, 여성국극이라는 창극이 무대에서 일부 재현될 것이라는 점이다. 서이레 작가가 말했듯, 창극을 웹툰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연출가 남인우와 소리꾼 이자람의 합류로 기대감을 높이는 이 작품이 두고두고 리메이크되는 명작으로 남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명작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그것은 끝없는 재해석을 전제한다. 리메이크는 그래서 명작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통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만, 또한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 그것이 명작이다.

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KBS <연예가중계>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저서로 『숨은 마흔 찾기』 『드라마 속 대사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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