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보기
하나

여성국극
영웅들이 쌓아 올린 역사
1950~60년대를 풍미한 예술 장르가 있었다. 여성국극이다. 여성국극 배우는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살았다. 해변의 모래성처럼 한순간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의미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여성국극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창극사 연구』라는 제목의 낡은 책에는 가까운 과거에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예술 단체가 있었고, 그들이 만든 창극이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모멸로 가득 차 있었다. “창극사에 길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이라거나 심지어는 “속죄할 수 없는 죄과”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좋은 예술’을 가르는 기준, 그 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여성국국은 ‘판소리’와 ‘창극’으로 대별되는 주류 전통에서 이탈한 예술이기 때문에, 그 중심에 여성이 있었기 때문에 저속한 예술로 평가받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지만, 국악계에 여성의 힘으로 쌓아 올린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젠더와 퀴어 담론을 횡단하며 오늘날까지 전복적 사유와 영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여성국극이 가진 ‘힘’을 예감하게 했다.

여성들의 판

짧지만 강렬했던 여성국극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미래의 가능성으로 충만하면서도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제강점기 기생을 관리하고 양성하던 ‘권번券番’의 해체는 여성에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예고했다. 권번에 적을 두고 활동하던 여성은 자신의 소리와 춤의 의미를 재정립하며 새로운 사회규범과 질서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실천은 순탄치 않았다. 남성 중심의 국악계에서 여성은 수많은 불합리를 감내해야 했다. 한 명의 예인으로서 존중받기보다 전통적 통념에 따라 남성 예인의 조력자가 될 것을 요구받았다. 남성과 동등한 금전적 대우를 받지 못하기 일쑤였으며, 기생을 향한 사회적 편견 탓에 스승으로부터 성적 착취를 당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모색하던 여성 예인이 맞닥뜨린 현실은 부당하고 가혹했다.
여성이 주축이 된 예술 집단의 맹아가 움트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 3년이 지난 1948년이었다. 김소희·박록주·박귀희·임유앵·임춘앵 등 당대 최고의 명창 30여 명이 결집해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했다. 여성국악동호회는 국악계의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반기를 들고 여성만의 무대를 만들어보고자 했던 의지와 용기의 결실이었다. 그해 10월, 명동에 있는 시공관에서 창립 공연 <옥중화>를 발표했다. 여성국극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눈부신 영웅들의 서사

여성국극은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기존의 창극과 달랐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기본으로 하는 창극보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포괄하고 있었다. 근대화된 무대 양식에 영향을 받아 소리와 춤·무술 등이 함께 어우러졌고, 음악 면에서도 훨씬 대중적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모든 배역을 여성이 연기한다는 점이었다. 남역 배우는 여성국극의 흥행과 직결될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다. 첫 작품 <옥중화>는 실패했지만, 후속작인 <햇님 달님>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각색한 작품이었음에도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웠다. 여성국극의 가능성을 확인한 박초월·임춘앵·조농월·조농선 등은 1950년 ‘여성국극 동지사’라는 이름의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공주궁의 비밀> <황금 돼지> <반달> <청실홍실> 등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여성국극이 당대의 핵심 대중문화로 자리매김하는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6·25전쟁 중에도 여성국극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여성국극의 배우는 임시 수도였던 부산을 거점으로 공연 활동을 이어나가며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공연을 거듭하면서 제작 시스템도 체계화됐다. 무대 기술과 의상은 더욱 화려해졌고 배우의 예술적 기량도 나날이 향상했다. 여성국극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일상 속에서 대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며 예술의 가능성을 증명해 냈다. 가장 참혹한 시기에 전례 없는 눈부신 성장을 이뤄낸 유일한 예술이었던 셈이다.
6·25전쟁 이후 여성국극 단체는 양적으로 팽창했고 공연 활동도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0년대 TV가 보급되면서 영상 매체와 경쟁해야 했던 여성국극은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는다. 또한 전통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탄생한 국가무형문화재 제도에서 배제되면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다른 종목들과는 달리 국가의 ‘전통’으로 기록되어야 할 정당성도 얻지 못했다. 여성국극 배우는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하나둘 무대를 떠났고 여성국극의 역사도 저물게 된다.

여성국극은 여러 면에서 전복적인 공연예술이었다. 여성국극의 배우는 남성을 연기함으로써 “새로운 신체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성애화하며, 규율된 여성 신체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는 전략”(정은영, 『전환극장』)을 구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국악’ ‘민족’ ‘전통’과 같은 주류 국악계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동원해 여성이 일구어낸 여성국극의 위상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여성국극의 전설적인 스타였던 임춘앵이 부른 단가 중에는 “우리 생명 영원하게 전심에 전력 / 태산같이 높다 해도 오르고 또 올라 / 청사에 길이 남기라 민족 국악을 / 전 세계에 빛나리라 우리의 노래”(반재식·김은식, 『여성국극왕자 임춘앵 전기』)라는 가사가 있다. 역사가 여성을 지우려 해도 예술을 향한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글. 성혜인 비평가. 전통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월간 국립극장> 구독신청 <월간 국립극장> 과월호 보기
닫기

월간지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 구독 신청

뉴스레터 구독은 홈페이지 회원 가입 시 신청 가능하며, 다양한 국립극장 소식을 함께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또는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편리하게 '월간 국립극장'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회원가입 시 이메일 수신 동의 필요 (기존회원인 경우 회원정보수정 > 고객서비스 > 메일링 수신 동의 선택)